'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특별한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늘 음악이 내 옆에 있었다. 음악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 전까지 와인과 함께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음악이 특별하지 않은 음악가다."

이번 100인 인터뷰의 주인공은 버클리 음대 유학 1세대의 주인공이자, 작곡가 겸 가수, 작사가, 호원대 실용음악과 교수 등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일을 하는 '음악인' 정원영이다. 스스로 "음악이 특별하지 않은 음악가"라고 소개한 정원영은 개인 7집 앨범뿐 아니라 여러 편의 영화 음악, 정원영밴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정원영을 만나 그의 삶과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부터 끊임없이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후배들에게 실용음악의 신으로 평가받는 이유, 음악을 업으로 꿈꾸는 이들을 위한 메시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확인해본다.

   
 

문화뉴스의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 선정된 소감은?
ㄴ 100명이 아니고 500명, 더 나아가 1,000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이 각자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힘든 여정에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나?
ㄴ 바쁘게 지내고 있다. 최근 7집 앨범 '사람'을 냈고, 학교 교수 일과 공연, 그리고 미국에 LA, 뉴욕 등에 열흘 있다가 오는 여러 일정이 있었다. 다 음악과 관련한 일이다.

1집부터 7집까지의 변화 과정을 듣고 싶다.
ㄴ 1980년대 뉴욕에 있을 때, 내가 접목한 것은 재즈와 피아노다. 작곡도 진행했다. 1990년대 한국에 들어왔을 땐 그런 앨범을 내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행히 버클리가 재즈를 가르쳐주는 학교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재즈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이 여러 가지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를 담은 것이 1집(1993년, '가버린 날들')이었다.

1~3집(1995년 2집 'Mr.Moonlight', 1998년 3집 'Young Mi Robinson')을 낼 당시 가요계엔 서태지, 김건모 등이 있었다. 1990년대 우리나라 가요의 전성기였고, 33살에 첫 앨범을 내면서 그들과 경쟁하지 말고 내 색깔을 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1~3집은 대중들의 눈치를 본 것 같다. 음악을 들어보면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갖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긱스라는 밴드도 하면서 4집(2003년, Are You Happy?)을 낼 때부턴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배들도 4집부터 음악이 바뀌니 정말 신경을 쓰지 않으신군요라고 말했다. 그게 정말 편해진 음악이고 지금까지 그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훨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4집과 5집 사이엔 7년의 공백이 있었다. 2004년에 아프면서 학교도 그만두고 2년을 쉬게 됐다. 회복 후 정원영밴드를 결성해서 밴드로 앨범 2장을 냈고, 7년 만에 솔로 앨범을 다시 냈다. 2010년에 발매한 5집 앨범 제목은 굉장히 길다. '꿈과 한패인 선잠에 눌러있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빈 침대에는 누군가는 그리워할 내 냄새가 아직 남아 있을 꺼야'다. 혼자 써놓은 글의 구절 중의 하나인데, 사진작가인 김중만 형한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편집자 주 : 그 후 정원영은 6집 '걸음걸이 주의보'(2012년), 7집 '사람'(2015년)을 발매했다)


▲ 정원영 5집 앨범 중 '겨울' ⓒ CJE&M MUSIC 공식 유튜브 채널

곡을 쓸 때, 써 놓은 다음에 초창기엔 모든 곡을 솔로앨범에 넣는데 어느 순간부터 곡을 쓰고 이건 내 솔로 앨범, 저건 밴드 앨범에 넣어야겠다고 구분 지어서 활동하게 됐다.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밴드와 해야 하는 음악은 밴드가 하고, 피아노 소품 같은 음악은 내가 혼자 피아노 치는 방식이다.

대중음악과 실용음악의 차이가 있는가?
ㄴ 차이는 없을 것 같다. 실용음악의 정의와 이름이 적당한지에 대한 의논을 하기도 했다. 왜 의논을 했냐면, 실용음악과라는 과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악과라고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클래식하는 분들과 오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대중음악과라고 하면, 또 여기가 대중음악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어서 안 된다고 했다. 실제로 학교에서 100명의 학생이 있다면 노래 쪽은 대다수가 대중음악 쪽을 원하지만, 연주 쪽 중 몇 명은 훌륭한 재즈 연주자가 된다. 이렇게 되면 대중음악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통합해서 음악과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도 했다. 클래식도 음악, 대중음악, 실용음악도 음악이기 때문에 장르를 학생들이 고르면 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대중음악 하면 K팝 혹은 인디성이 떨어진 느낌이다. 실용과 도전정신이 있는 것이 실용음악의 통념처럼 느껴진다.
ㄴ 그렇지는 않다. 실용음악에 들어오더라도 처음 들어오는 학생들은 스타를 목표로 들어오기도 한다. 노래하는 애들은 학부모도 포함해 그렇게 되길 원하는 딜레마도 많다. 작곡하는 친구 중에도 대중가요를 작곡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악기 연주하는 친구들도 대중가수들의 세션맨이 되고 싶다. 하지만 실험적인 영화음악 작곡이나 피아노 연주 등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래서 하나로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음악적 영감을 영화에서 많이 얻는다고 들었다.
ㄴ 영화라기보단 자신의 배경 환경에 의해 큰 좌우가 된다. 20대 때도 물론 영향을 받겠지만, 어떻게 자라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학생들이 학교에 오면 "미안하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나 형제가 있어서 클래식, 재즈, 록을 들으면서 자라는 경우도 있고, 전혀 그런 것을 못 듣고 가요밖에 못 듣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차이는 가면 갈수록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주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지금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어렸을 때 느꼈던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요즘 들어 좋은 연주자와 음악가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런 여건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그런 부모들이 별로 없었다.

가정에 그런 분위기가 있던 것 같다.
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셔서 어쩔 수 없이 들었던 것이 있고, 음악이 하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영화도 많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피아노 선생님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무서운 분으로 바뀌셨다. 그래서 집에 저금통에 있는 돈을 갖고 나가서 영화 두 편씩을 보고 집에 갈 때쯤 들어가게 됐다.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본 이유는 당시 동시상영관은 미성년자 입장 불가도 없었다. 그 영향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도 영화를 보면서 살았다. 미국에 가서도 그런 식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다시 음악을 좋아한 이유는 무엇인가?
ㄴ 음악을 사실 너무나 좋아했다. 처음 내 돈을 주고 산 앨범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당시가 1970년대 초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온 앨범을 초등학교 때부터 먼저 뜯어서 듣기 시작했다. 영화음악도 앨범을 사고 집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밴드를 하자고 했다. 당시 나는 음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를 쳤으니, 밴드를 하자는 제안에 하게 됐고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 정원영 6집 앨범 중 '행복해졌어' ⓒ 네이버 온스테이지 공식 유튜브 채널

무대에서 느껴지는 것이 어렸을 때와 지금은 다를 것 같다.
ㄴ 특별하진 않다. 계속 그렇게 살아와서 매우 큰 무대와 훌륭한 분들도 만나봤다. 음악 대회에 가기 힘들었던 만큼 꿋꿋하게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지만 너무 감사하다. 특별한 무대와 사람들한테 내 음악을 들려주는 것들이 모두 음악 때문에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제일 크다. 음악을 통해 이뤄진 것에 최고로 감사하다.

실용음악계의 신적인 존재라고 후배들이 그렇게 말한다.
ㄴ 말도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다. (웃음) 아이들과 친하다. 몇몇 아이들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아팠을 때, 아픈 걸 알고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야기한 것 같다. "늘 동등한 입장에서 저희를 대해주셔서 매우 고마웠다"는 것이다. 선배가 아닌 뮤지션으로 똑같이 의견을 이야기하고 논쟁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린 후배들과 이슈가 나오는 것에 대해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선배이기 때문에 그러지마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대했으니 친구들이 음악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 음악에 대해 선배로 먼저 알게 된 것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다 보니 편하게 이야기해준 것 같다.

버클리 유학 1세대다. 어떻게 공부했나?
ㄴ 지금이랑 똑같다. 아주 많은 호기심을 했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 하드 워킹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가르치는 것이 훨씬 많다 보니, 단어 선택부터 정리하고 직관적인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직관적인 것을 보며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 당시엔 나만 잘났다고, 나만 잘되어야 한다고 연습만 했다. 곡을 쓰고 도움될 것을 찾아서 하드 워킹을 했다. 지금은 사람을 볼 때 그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점,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알아보는 일을 하게 된 것 같다.

정원영 밴드 이야기를 해 달라.
ㄴ 한국에 들어와서 밴드 방송을 나갈 때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 위주로 같이 나갔다. 지금은 다들 교수들이 되어 있는데, 그땐 학생이었다. 이 밴드엔 유연성이 있었다. 같이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다 2003년 4집 앨범을 내고 고민을 하면서 02학번 위주로 밴드를 조직하게 됐다. 그들과 밴드 공연을 하면서 그 당시에 음반을 낼 생각은 없었는데, 공연을 계속하다 보니 밴드사운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가 아팠다. 회복 후에 멤버들 모아서 다시 공연을 시작하면서 밴드사운드가 나오니 아까웠다. 독특한 사운드가 나왔는데, 음악을 만들어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에 곡을 쓰고 연습을 아주 오랫동안 해서 앨범을 냈다. 그 앨범을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했다.


▲ 정원영 5집 앨범 중 '5月' ⓒ 문화콘서트 난장 공식 유튜브

그 앨범은 어떤 장르였나?
ㄴ 여러 가지였다. 내 음악이 원래 그렇다. 1990년대 기자분들이 그랬다. 왜 이번엔 이런 음악을 냈는가? 그때마다 나는 "내 음악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는데 당신이 무슨 생각인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밴드 음악은 '이건 안 되겠더라'고 생각했다. '솔로 앨범만 나의 스타일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냈다. 사실은 제작년에 앨범 낼 땐 밴드 음악을 해야겠다고 곡을 썼는데, 지난해에 밴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음악적 영감을 덜어내지 않으면 못 살겠다 싶었다. 그래서 솔로 음반을 냈다. 이번엔 노래도 들어갔다. 그 덕분에 노래연습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렇다. 무언가를 정해서 하는 것보다 음악이 정말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보다 내 속이 해결되어야 했다. 속을 해결한 후엔 다음엔 또 다른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앨범엔 직접 노래를 불렀다.

ㄴ 다른 앨범에선 다른 친구들도 많이 불렀다. (미성의 소리가 인상적이다. 타고난 보이스 컬러다) 노래를 많이 안 불러서, 야구 선수가 혹사 안 해서 어깨 싱싱한 것 같은 느낌이다. (웃음)

끊임없이 연주할 수 있는 원동력은?
ㄴ 매일매일 음악을 듣는데, 옛날 것과 새로운 것을 찾아 듣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는다. 그게 정말 좋다. 그거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자정에 집에 들어가면 음악을 듣는다. 와인을 따라놓고 2~3시간 음악을 듣고 잔다. 저번 주엔 영화 '러덜리스', '우먼 인 골드', '트립 투 이탈리아'를 봤다. 세 편이 다 다르지만, 너무나 음악적이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인데 모두 아름답다. 아이들에게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볼 때, 음악인이라면 "끝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학, 미술, 음악이 됐던 예술이기 때문에 끝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영화와 음악이 나오는 것 같다.

   
 

 
  

오늘 입은 옷이 영화 '위플래쉬'의 '플렛처' 교수를 보는 것 같다. 평소 교육 철학은 무엇인가?
ㄴ 30대와 40대, 지금이 다르다. 30대는 내 욕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연히 이래야 해, 이건 알아야 해, 이건 할 수 있어야 해, 이건 들어야 해"라고 말했다. 40대를 겪으면서 나도 여러 시행착오를 하고 1년을 통으로 쉬고, 다시 호원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지내온 시간을 보며 커리큘럼이 중요하고 어떻게 학생을 대했는지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말씀드렸지만, 훨씬 더 잘 보이게 됐다. 30대 때는 아이들이 나를 되게 무서워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교수였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것에 조심하고 달라졌다. 하지만 친구들끼리 교육을 해왔던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해보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이야기를 한다. 어려운 것은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하려고 훨씬 더 강화해놨다. 하지만 내 고집대로가 아닌 훨씬 합리적으로 가르치려 한다. 그래서 예전엔 내 욕심에 가르쳤다면, 지금은 그 사람한테 맡기려고 노력한다.

뮤지션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많으나,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다.
ㄴ 졸업할 때 되면 학생들이 물어본다. 학교 졸업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다. 똑같이 이야기한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진짜 음악을 네가 사랑한다면 먹고살 길은 네가 알아서 해라"다. 그걸 바꿔서 "먹고살 수 있는 세컨드 직업을 꼭 가져라"라고 말한다. "이건 너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미국에 가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만 돈을 벌고 있지, 수많은 거리 악사들과 클럽 악사들은 그것만으로 살 수 없다. 당연히 보험도 안 된다. 이건 일본, 유럽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다. 운이 좋아서 음악 관련 일을 하는 것뿐이지, 음악 자체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고 진짜 음악을 사랑한다면, 생활할 수 있는 다른 일을 구하라"고 한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음악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이건 전체 예술계가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아티스트 정원영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ㄴ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어라. 너희 때보다 제대로 가르쳐라"같다. 음악을 생각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다르다. 그런 것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음악을 하고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된 것이 제대로인가?) 아주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내 욕심이 아니라 개개인의 개성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음악이란?
ㄴ 특별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특별한 것은 골프다. 춰보지를 못했기 때문에다. 직업이 취미이자 일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외국엔 꽤 많다. 양복 입을 일없이 청바지 입으면서 돈을 많이 혹은 조금 벌지만, 음악의 가치관이 있는데 이게 좋다. 조금 더 돈을 많이 벌면 좋겠지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클래식 외에 다른 음악들을 위한 지원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클래식 쪽 친구들은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돈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이쪽은 정말 어렸을 때 음악만 듣고 시작해서 많은 아이가 재능은 있으나 지원이 없는 것이 많다. 나라에서 진흥원 콘텐츠로 조금씩 눈에 띄는 아이들이 지원을 받는 건데, 훨씬 더 많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왜 그러냐면 K팝이 한류라서 분위기가 잡혔다고 하지만, 그걸 끝까지 더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어지려면 여기에 있는 다른 인프라도 중요하다. 연주자, 작곡하는 친구들이 해당한다. 그런 친구들이 튼튼하고 많아져야 한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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