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촌놈에서 데뷔 40주년 앞둔 배우가 되다…"대학 동기중에 남은 사람 나랑 유동근"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즐기면 감동을 하는 것이 뮤지컬이다."

뮤지컬을 자신의 생활이라고 말하는 배우 남경읍. 그는 1958년 문경에서 태어났다. 본인 스스로 '문경 촌놈'이라고 이야기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공연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서울예술전문대 연극과에 들어가 입학했다. 1976년 동랑레파토리의 연극 '햄릿'에 출연해 무대에 섰고, 1978년 지금의 서울시립뮤지컬단인 서울시립가무단에 들어가 '위대한 전진' 작품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다.

그의 주요 뮤지컬 출연작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미제라블', '사랑은 비를 타고' 등 80여 편이 넘는다. 그는 1991년 연극영화의해 최우수 남우조연상('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94년 제18회 대한민국연극제 남우주연상('번데기'), 1996년 제2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사랑은 비를 타고') 등을 받은 바 있는 한국 뮤지컬의 대부다. 지난 2008년 뮤지컬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조승우, 홍광호, 박건형 등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스타면서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배우들과 함께 진행했다. 여기에 내년 모노 뮤지컬을 배우 인생 40주년 기념 작품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남경읍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이유로 2000년에 단국대 연극영화과로 편입했다. 여기에 2002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으로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열정과 노력으로 인생을 살아온 그를 만났다. 배우와 선생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뮤지컬은 어떤 의미인지 들어본다.

   
 

문화뉴스의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 선정된 소감은?

ㄴ 아주 간단하다. 영광이다. 솔직히 내가 이런 곳에 뽑힐 수 있겠나? 100명이란 것은 대단하다. 남경읍이 성공했다.

근황이 궁금하다.

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 뮤지컬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뮤지컬을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안 시켜준다. 씁쓸한데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 KBS '파랑새의 집', JTBC '사랑하는 은동아',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에 출연했거나 출연 예정이다.

내년에 배우 데뷔 40주년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남경읍 뮤지컬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했는데, 배우 데뷔와 뮤지컬 데뷔가 다르다. 1976년에 정식으로 유치진 선생께서 만들고 신구, 정동환, 전무송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 계신 동랑레파토리에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다. '햄릿'을 우리식으로 번안했는데, 거기에서 광대를 했다. 그리고 뮤지컬은 서울시립뮤지컬단에서 1978년에 데뷔했다. 내년에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관심이 많았던 모노뮤지컬을 준비 중이다.

연극과 뮤지컬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ㄴ 고등학교 때까지 성악을 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노천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성악 레슨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3 때,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렇게 돈을 벌며 나의 앞길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산에서 어떤 아저씨가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 것을 봤다. 신기해서 따라다녔다. 졸졸 따라다니니까 아저씨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나를 보게 됐다. 급기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고 말해 미안하다고 답한 후 하산을 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이 다시 나를 불렀다.

그분이 이쪽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엔 관심 없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다시 부른 이유가 얼굴을 보니 배우를 하면 정말 멋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 자기는 "중앙대 연극영화과 영화연출 전공으로 졸업 작품을 찍고 있는데, 자기 친구 중 삼각지에 극단 세대라는 것을 만들어 배우를 뽑고 있다"며 "만약 관심이 있다면 집에 가서 상의를 해보고 흑석동에 있는 다방에 오라"고 했다.

집에 가서 "이런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라고 물으니, 어머니는 "재능이 있고, 끼도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답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75년, 길거리에서 생선가게 하시는 아주머니가 장남이 연기하겠다고 하는데 허락을 하신다는 게 대단하신 것 같다. 생각이 앞서신 것 같다. 또한, 동생 (남)경주도 형에 이어 연극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내가 "경주는 나보다 재능이 있다. 시켜야 한다"라는 말에 두 아들 다 허락을 하시게 됐다.

극단 세대에 가서 먼저 화장실 청소를 진짜 열심히 했다. 청소를 7년 동안 안 한 것 같은 상태여서, 염산을 약국에서 사서 1주일 동안 내내 닦았다. 그랬더니 호텔 화장실이 됐다. 선배님께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재수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고, 서울예대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니 선배 몇 분이 연극과인데 매일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좋아하셔서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 연극과인데 연기 연습은 안 하고, 매일 노래만 하느냐고 생각했다. 뮤지컬이라는 것을 처음 그때 알게 됐다. "그게 뭐예요"하고 물었더니, "연극 속에 춤과 노래가 들어있다"는 말에 쭉 따라다녔다.

마침 1학년 가을에 이화여대에서 서울예대 교수님이 연출한 뮤지컬 '가스펠'을 해서 형들과 보러 갔다. 보러 간 순간 '컬쳐 쇼크'를 제대로 느꼈다. 한 달 이상 잠을 못 잤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의 뮤지컬인 서울시립뮤지컬단의 전신인 국립가무단의 오영진 선생님의 '맹진사댁경사'를 뮤지컬로 한 '시집가는 날'을 단체로 보러 갔다가 "인간의 몸에서 저런 소리가 나는가"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결정했다. "저길 내가 들어가야겠다"라는 생각에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연기는 전공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그리고 다른 분야는 여러 곳에서 배웠다. 무용은 무용과 애들을 꾀어서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을 배웠다. 마침 국가대표 체조선수를 초빙해서 배운 것이 도움됐다. 음악은 따로 교습을 받지 않고, 피아노 잘 치는 애들을 꾀어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뮤지컬을 하게 됐다.

   
▲ 2009년, 창작 뮤지컬 '두 번째 태양'에 남경읍은 '이든' 역으로 출연했다. ⓒ 남경읍

뮤지컬 데뷔작을 이야기해 달라.

ㄴ 뮤지컬 데뷔는 1978년 '위대한 전진'이었다. 국책의 목적으로 만들어져서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진행됐다. 이 작품에서 1인 8역으로 데뷔를 했다. 그나마 안무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나를 만날 군무할 때 가장 가운데 서주시게 했다. 처음 작품을 시작할 땐 몸이 무거웠다.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 보니 여러 겹 옷을 껴입고 "해방이다" 외치고, 무대 밖에서 옷을 벗고 선비가 되어서 등장하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래도 무대에서 춤과 노래를 같이 한다는 것이 정말 신났다.

그 당시 뮤지컬 상황은 어떠했나?

ㄴ 당시 뮤지컬 단체가 두 곳이 있었다. 서울시 소속의 서울시립가무단, 민간단체로 극단 현대가 있었다. 이곳은 처음엔 연극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1970년대부터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 등을 했다. 배우의 숫자는 양 단체 합해 100명도 안 됐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뮤지컬을 꿈꾸는 배우와 단체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엔 배우의 수준과 뮤지컬 메커니즘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적자 운영이 많았다. 서울시립가무단 공연은 거의 초대석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적자 폭이 컸다. 극단 현대는 일반 상업을 표방하는 극단이기 때문에 매출이 있었다. 물론 그 수입구조 때문에 항상 마이너스였다. 제작비가 한 3천에서 5천만 원이면 적자가 3천만 원 정도 됐다. 당시 서울시립가무단은 거의 다 창작을 했다. 시립 단체였기 때문에, '상록수', '춘향전' 등 고전을 각색한 작품이 많았다. 음악적으로 서울시립가무단은 서울시립교향악에서 50인조 풀 오케스트라를 라이브로 연주했다. 음악적 부분은 지금 오히려 퇴보되고 있다.

뮤지컬 전문 배우는 당시 없었을 것 같다.

ㄴ 뮤지컬 전문 배우라고 말이 나온 것이 내 기억으로는 1986년 뮤지컬 '가스펠'을 문예회관대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할 때였다. 어떤 분이 평을 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뮤지컬 전문 배우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을 처음 했다. 당시 출연배우가 남경읍, 남경주, 이정화, 설도윤, 이혜영, 김숙진, 배동성, 한진섭, 그 이전 1980년대 극단 민중, 극단 광장, 극단 뿌리, 극단 대중 등에서 한 뮤지컬이 뮤지컬 전문 배우보단 연극배우 중 춤과 노래 등의 끼가 되는 사람이 했었다. 그 이전엔 노래는 성악 전공이 주로 했고, 춤은 무용단에서 해주고, 연기는 연극배우가 하는 식으로 조합해서 진행했다. 한 사람이 다한 경우도 있었긴 했다.

남경읍의 뮤지컬 인생을 돌아본다면?

ㄴ 대학에 들어가서 서울시립가무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2년 동안 선배님과 교수님께서 "배우를 하려면 최소한 10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정말 목숨을 걸어보자 했다. 서울예대 남산캠퍼스에 가면 극장이 있다. 극장 높이가 6m인데, 아침 5시 30분에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옥상 난간에 올라가 걸어 다녔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조깅을 했다. 잘못 떨어지면 최소 중상이다. 처음엔 겁이 났다. 그걸 왜 했느냐면, 집중력과 배짱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정말 목숨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10년을 배우로 지냈다.

10년 후 다시 돌이켜보니 '과연 내가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라는 물음과 함께 깨달았다. "바보스러운 생각이었구나." 아직 내가 해 놓은 게 없어서 5년을 연장했다. 5년 후 또 돌이켜보니 한없이 부족해서 5년을 연장했다. "20년을 하면 됐겠지"해서 되돌아보니 진짜 깨달은 것이 아직도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구나. 배우라면, 예술가라면, 무언가를 이 세상에서 이루려고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하자고 생각했다.

초반, 중반, 현재의 뮤지컬 인생으로 나눠본다면 초반은 아무 생각 없이 뮤지컬을 사랑하는 시간이었고, 중반은 사랑하지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느냐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고, 지금은 상당히 많은 것을 깨달으면서 자연과 친구를 하면서 나한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며 그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실천하려는 단계가 온 것 같다.

   
 

요즘 뮤지컬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ㄴ 뮤지컬 분야에서 나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나이가 많아서, 실력이 떨어져서, 출연료가 많아서, 잔소리를 많이 해서, 혹시나 인간적으로 싫어해서 (웃음)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뮤지컬이 거품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 거품이 조금씩 없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뮤지컬은 어차피 대중예술이지만, 너무 상업예술이지 않으냐"라고 지적을 한다. 스타들만 쓰니 여러 가지 후폭풍이 생긴다. 스타들의 출연료 쏠림 현상이 생긴다.

그 현상으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의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그리고 배우를 기용할 아무래도 그 나이에 맞는 배역을 해야 작품이 좋아지는데, 노역할 때 스타 배우들이 흰 칠을 해서 맡는다면 작품의 느낌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인 작품의 질이 낮아지게 된다. 관객들도 뮤지컬에 기대하고 왔는데 "이게 뮤지컬이야"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론 스타를 쓰기 때문에 제작비가 건져지기 때문에 제작자의 마음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라이센스 뮤지컬만 하려는 것도 안일한 생각인 것 같다. 수익의 몇 %를 라이센스 판권으로 또 줘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많이 나가는 것인가. 너무 쉽게 제작하려고 한다. 우리 뮤지컬의 역사가 아주 길지는 않다. 태동기는 아니더라도 키워나가고, 우리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10대 중후반 정도인데, 좋은 역량과 생각을 하게 하고 여러 사고를 할 수 있게끔 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라이센스로 편중된 것 같다.

물론 라이센스는 있어야 한다. 자동차를 만들 때,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엔진을 만들고 다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수입하고, 껍데기나 볼트는 우리나라에서 만들다 서서히 기술을 연마해 엔진까지 만들어 완벽한 국산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듯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는 우리 기술이 없어서 처음엔 수입했다. 그러다 껍데기나 볼트를 만들고 서서히 기술을 연마해 엔진까지 만들어 완벽한 우리나라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듯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 견문을 넓히는 차원에서 좋은 뮤지컬은 라이센스를 주더라도 한국에서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목적 이외에 순전히 돈만 벌겠다고 생각하는 제작자들이 너무 많다. 참 슬픈 모습이다.

   
▲ 1995년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큰형'(가운데)을 맡은 남경읍. 이 작품으로 그는 1996년 제2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 남경읍

요즘 젊은 세대의 뮤지컬 층이 두텁다. 그 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ㄴ 뮤지컬은 태동부터 쇼였고, 쇼는 달리 말하면 힐링이다. 뮤지컬을 보며 철학적인 생각을 하기보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같이 즐기면 될 것 같다. 즐기면 힐링되고, 힐링을 받으면 내 마음이 움직인다. 내 마음이 움직이면 감동이 된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즐기면, 감동을 하는 것이 뮤지컬이다.

남경읍에게 뮤지컬이란 무엇인가?

ㄴ 내 생활이다.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항상 생각한다. 뮤지컬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와 아주 딱 맞다. 옛날에 중국 사람들이 동쪽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의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사흘 밤낮을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다고 표현했다. 그게 우리 민족성인 것 같다. 나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내가 잠을 자기가 싫다.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 잠자기 전에 두근거려온다.

"내가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한다면 발전이 있겠지?" 그 발전이 안 보이는데, 원장실 창가에 보면 조그마한 수경재배하는 화분이 있다. 얘가 자라는 속도가 조금씩 빠르다. 하루가 지나면 확 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라는 것이 다른 화분은 안 보여도 그 화분만은 보인다. 나는 내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내가 자란 만큼 식물도 자란 것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하루 일정은 보통 어떻게 되나?

ㄴ 배우는 리듬이 불규칙하다. 가장 큰 세 개로 나누면, 공연할 때, 공연을 위한 연습을 할 때, 공연도 없고 연습을 할 때다. 진짜 리듬이 불규칙해서 건강관리를 본인이 잘해야 한다. 배우는 주어진 상황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그게 물이다. 물은 바로 적응을 한다. 어떤 용기든, 지형이든 적응한다.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고 하는 것이 배우의 강점이다.

일정을 보면 보통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사우나 하면 8시가 된다. 한 시간 정도 신문 읽고, 9시부터 무언가를 한다. 지금은 모노드라마를 위해 연습을 한다. 그리고 보통 11시 잠을 잔다. 현재를 열심히 살면 선물이 되는 것(The present is a present)처럼 나에게 주어진 지금을 정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라 철저하게 지킬 순 없다. 하지만 어릴 땐 철저하게 지켰다. 요즘엔 하다가 피곤하면 일단 쉰다. 나이가 있기 때문에, 피곤이 쌓이면 안 된다. 쉬는 것도 훌륭한 보약이다. 막 버티면 안 된다. 옛날엔 쉬는 것 자체가 게으름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내년 40주년 공연인 모노뮤지컬은 어떤 공연이며, 직접 제작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ㄴ 못할 것 같다. 물론 규모가 작아 혼자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될 것 같다. 사람이 제일 안 좋은 욕심이 늙어서 욕심내는 노욕이라고 한다. 물론 내가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익어가는 과정인데, 모든 것은 전문분야가 있으니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모노뮤지컬은 배우로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일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모노드라마를 봐왔고, 언젠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으로 할까 고민을 했다. 60년을 살아오면서, 나를 나눠보며 남경읍이 누군가 생각해보니 세 개로 나뉘었다. 인간 남경읍, 배우 남경읍, 선생 남경읍이다. 그 느낀점들은 무용가들은 무용으로 표현할 것이고, 작곡가는 오선지로 그릴 것이고, 각자 표현을 할 것인데, 나는 뮤지컬 배우이니 뮤지컬로 이야기하고 싶다.

악기를 참 좋아한다.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면서, 극을 표현하는 것이다. 열정적인 이야기지만 "드럼을 치면서 하면 어떨까? 기타를 연주하면서 하면 어떨까?"라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대신 기타, 드럼, 연주할 때 이 사람이 배우인데 대충 흉내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내 모노뮤지컬을 보면 원래 드러머였는데 연기를 하는구나, 또는 저 사람 피아니스트인데 연기를 배우는구나라고 말할 정도의 기량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사실 30주년 공연 때 제자들인 조승우, 홍광호, 최재웅, 박건형 등 뮤지컬 최고의 배우들이 다 모였다. 사람들이 저 배우를 제대로 돈을 주고 모으려면 제작비만 수십억이라고 했는데, 출연료는 하나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준비기간을 빼고 순수하게 연습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왜냐하면, 피아노를 무대에서 그렇게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95년 '사랑은 비를 타고' 작품을 통해 연주했었다. 하지만 당시는 재즈였고, 클래식을 하고 싶었다. 피아노 전공자도 아니고 과연 될까 했다. 만약 하지 않으면 연습기간은 한 달 반이면 마무리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다고 결정했다. 결정한 이유는 두 곡이었는데, 한 곡당 만 번 연습하면 안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만 번을 계산하면 하루 15시간을 피아노만 연습하면 되는 것이었다. 잘 치지는 못해도 내가 버티는 것은 잘하니 결정하게 됐다. 연습할 때 어쩔 땐 진짜 스물 한두 세 시간씩 할 때도 있었다.

   
 

공연 1주일 전에 웃기는 일이 생겼다. KBS에서 취재를 왔는데, 손도 못 푸는 상태에서 곡이 빠른데 왼손이 삐끗해버린 것이다. 연주를 끝내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연이 1주일 남았는데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할 때 벽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벽에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피아노 앞에 사람 모습 비슷한 무늬가 있어서 신이라 생각하고 연습했다. 그 신과 연습할 때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가 이 나이에 이것을 하는 것이 맞을까? 나가서 우리 딸내미 학비도 벌어야 하고, 집에선 돈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맞나?" 계속 물어봤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신과 이야기한 결론은 "내가 한만큼만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을 다쳐버렸으니 그 신을 원망 많이 했다. 그러다 잠이 들고 일어나서 확인하니 다치기 전처럼 똑같아졌다. 조금은 아파야 할 텐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손목의 핏줄을 보니 모기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모기가 나쁜 피를 다 빨아먹었나, 혈을 뚫어줬느냐는 신기한 생각도 들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것처럼 확대해석인 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았고 피아노 연주를 했다. 이번에도 그것을 만회하고자 연습을 하려 한다.

40주년 모노뮤지컬의 스토리 구성은 어떻게 됐나?

ㄴ 아직은 모르겠다. 새로운 작품, 기존의 작품, 창작해도 내 이야기를 할지는 작가와 만나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내년 하반기 공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제작과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인간 남경읍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보나?

ㄴ 배려와 포용이라 본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건지, 아니면 서로 같이 도와가며 사는 것이 원칙인지에 대한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지방 공연이나 특강을 하러 다닐 때, 일부러 여행할 시가니 없어서 하루 전에 많이 간다. 한 번은 충북 영동에 촬영이 있어서, 내비게이션을 끄고 국도를 쭉 달렸다. 단풍의 절정기에 갔는데 행복했다. 구경하면서 가는데 어떤 구간은 내가 100km로 갈 때도 있고, 어떤 구간은 5~60km로, 창문과 선루프를 다 열고 20~30km로 가는 구간이 있었다.

100km는 별 볼 일 없는 광경이고, 60km는 괜찮고, 20~30km는 황홀하게 산이 쫙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건 무슨 차이인가 생각했다. 가을 산은 늘 푸른 상록수가 많은 산보다 철 따라 자기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활엽수가 많은 산이 정말 아름답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오로지 나만 변치않아"라는 사람이 많은 단체는 아름답지 않다. 활엽수 같은 유연성이 있는 그런 단체일수록 아름다운 단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물과 같은 유연한 사고를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제자들을 교육할 때, 사람을 만날 때, 무언가를 할 때 항상 내가 고정적이지 않고 유연하면 좋겠냐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릴 때의 뼈는 아교질이고, 나이 들 때의 뼈는 석회질이다. 아교는 부러지면, 다시 불로 접착하면 붙는다. 하지만 석고는 부러지면 끝이다. 사람의 뼈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석회질이 되어가면서 생각이 자꾸 굳어버린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반대로 물과 같은 사람은 다 포용한다. 자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 2004년 뮤지컬 '터널'에서 '체육선생님' 역을 맡은 남경읍. ⓒ 남경읍

선생으로의 남경읍은 어떤가?

ㄴ 무서운 선생이다. 얼마 전에도 한 여자 배우가 마흔 가까이 됐는데 심하게 꾸짖었다. 그 여배우는 뮤지컬을 하고 싶어서 사업을 접고 나에게 와서 수업을 받았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생각을 했다. 제자들을 가르친 35년 동안 엄했다. 다행히 아직 112 사건은 안 벌어졌다. (웃음) 

왜 그럴까 생각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구타가 아니었던 것에 이유가 있다. 

몇 가지가 충족이 안 되면 꾸짖지 않는다.

첫 번째, "내가 진짜 얘의 발전을 위해서 꾸짖나?"

두 번째,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애일까?"

세 번째는 "내가 정말 이 아이를 사랑하나?"

이 세 가지가 충족이 안 되면 꾸짖지 않는다. 애들한테 비평하더라도, 사랑이 담긴 비평과 비난은 다르다. 먼저 학생을 만나면, 걔를 사랑하자고 생각한다. 먼저 사랑하고,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강한 비평을 불사하고 있다.

옛날엔 제자들한테 뮤지컬 배우를 하려면 "춤과 노래를 잘 해야 해"라고 교육했는데, 지금은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마다 개념이 다른데,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는 작품이 요구하는 것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다. 작품은 어떤 것이든 다 요구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해달라고 할 때 부드러운 목소리인지, 강력한 목소리인지, 말로만 부족하니 멜랑꼴리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클래식하게 대사와 노래로만 표현하기 부족하니 춤을 춰달라고 하거나 힙합을 하라는 등 다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좋은 배우다. 그 사람이 뮤지컬 배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피곤할 수밖에 없다. 연애할 시간도 없고, 자기만의 시간도 없을 때도 있다. 그런데 40년 배우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배우가 힘든 만큼 관객은 즐겁고, 배우가 흘리는 땀방울의 숫자만큼 관객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서울예대를 딱 들어갔을 때, 나는 문경 촌놈이었다. 애들이 키도 180cm이 넘고, 롱코트에 007 가방을 하고 다녔고, 목소리가 모두 목욕탕에서 나는 톤이었다. 여자들도 미니스커트에 담배도 피우는 등 모든 것에 문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어떻게 따라가지"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둘러보니 저쪽 구석에 나처럼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애가 있어서 친해지게 됐다. 걔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린 결론은 "우리 변하지 말고, 소처럼 하자"였다. 열정과 끈기가 있게 도전했다.

연극과가 당시 40명이었는데, 지금 이쪽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 4명이다. 10% 남았다. 한 명은 CF 쪽에서 일하는 친구고, 한 명은 박계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 그다음이 나와 유동근이다. 유동근이 나와 함께 입 벌리고 있던 친구다.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끝으로 예술가 남경읍이 남기고 싶은 말은?

ㄴ 가장 훌륭한 진리는 가장 평범한 이야기다. 요즘 내가 많이 느끼는 것이 농부의 마음과 똑같은 거다. 뿌리는 만큼 그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도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준비하면, 관객들이 그만큼 정성스럽게 날 느낀다.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뿌리기만 하는 농부가 있고, 가꾸고 정성 들이는 농부가 있다. 그럼 결과가 달라진다.

남경읍이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크게 사기를 당한 때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아직도 메꾸는 과정에 있다. 남이 생각하는 만큼 풍족하지 않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게 올해부터 신기하게도 쫙 풀렸다. 지난해까지 '나 정말 열심히 뿌리고 정성스럽게 살았는데, 이런 시련이 오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자연을 믿어서 뿌린 대로는 언젠간 오리라'는 믿음이 내가 거두지 못하더라도 가족들한테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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