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 같다."

최근 480만 관객이 웃고 울은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과 유진선 화백의 그림들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유진선 화백의 그림들은 조용하고 편안하지만,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러면서 그림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이는 행복의 이면엔 슬픔이 존재하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인사이드 아웃'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자연을 벗으로 삼아 그림을 그에게 "사람들이 왜 유진선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지"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슬픔"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픈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봤을 때 편안해졌고, 내 그림과 공감과 교감을 느낀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아픔, 그리움,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안긴 유진선 화백을 만나 그의 인생과 그림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뉴스의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 선정된 소감은?

ㄴ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외부로 내 작품을 알리게 될 좋은 기회라 기분이 좋다.

최근 근황을 듣고 싶다.

ㄴ 계절마다 작품 구상을 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봄엔 벚꽃이 지기 전에 다니는 장소가 있고, 진달래가 폈을 때 가는 곳이 있다. 가족들과 어려서 다녔던 장소를 다시 답사하는 기분으로 가고 있다. 도시화를 하거나, 인공적으로 바뀌는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 자연스러움이 없어지기 전에 내가 학생 시절에 느낀 감정을 그대로 캐치하기 위해 주로 남도 쪽, 예전에 많이 다닌 장소를 다니고 있다. 다니다 보니 시골의 돌담 같은 곳에 진달래꽃, 과꽃, 채송화 등을 보게 된다. 내 그림의 주제는 그래서 꽃이 있는 풍경이다.

그림을 그린 지 얼마나 됐나?

ㄴ 총합 40년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에 졸업하고 교편을 7년 잡았다. 그때 정작 작품세계에 들어가지 못했고, 바로 결혼하면서 육아 생활 때문에 쉬게 됐다. 애가 어릴 때부터 집에서 작업했는데, 자라올 때 추억으로 남았던 장소를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됐다. 그러다 애가 자라면서 그 장소를 직접 가봤는데, 예전에 갈 때마다 많이 다듬어져 있었다.

   
▲ '들국화', 2007년 ⓒ 유진선

마음이 바빠졌다. 내가 추억하고 있는 장소를 내 그림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절마다 그곳으로 떠났다. 봄엔 벚꽃이 만개한 시골 동네를 갔고, 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한 시골 동네, 가을 갈대밭만 무성한 벌판을 다녀갔다. 지금 가보면 그런 벌판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환경이 훼손되는 것을 굉장히 못 견뎌 한다. 지금도 강원도 인제를 가면 눈이 많이 쌓여서 설피를 신어야 가는, 차가 못 가는 동네가 있다. 일부러 가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예스러움, 내가 청년기에 느낀 친구들과 같이 갔던 추억의 장소들을 꾸준히 추구하면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계절마다 느낌을 화폭에 담았다고 했는데, 계절의 구분이 없는 것 같다.

ㄴ 굉장히 예리하게 봤다. 자연에서 오는 색깔을 내가 봤을 때 순화시키고 싶었다. 예를 들어, 짙은 여름의 녹음을 자연색 그대로가 아니라 편안한 느낌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색을 순화시켰다. 거의 파스텔 색조로 유도를 하게 됐다. 회색, 연보라, 회보라 빛을 주로 많이 쓰는데 안개와 같은 풍경이 나왔을 때다.

색깔을 뽑아내는데 굉장한 강한 열정이 느껴진다.

ㄴ 나만의 이야깃거리가 있는 장소를 그리기 때문이다. 보통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나가서 자연을 보고 스케치를 하는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고 자부하고 있다. 내 모든 그림은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고, 내가 계속 느꼈던 애잔한 그림을 끌어내야 했기 때문에 색의 지표를 굉장히 중요시했다. 조그마한 소품이라고 해도 몇 달을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한 번 색칠해놓고 그것이 자연의 색과 맞지 않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결코, 가볍지 않은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도 부여해주고 싶었다.

   
▲ '배꽃이 필 때', 2008년 ⓒ 유진선

내 그림을 보고 그런 느낌을 같이 느낀다면, 내가 의도하는 것에선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개인전을 주로 하면 몰랐던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육체적으로 많이 아파하는 사람, 암 환자들, 정신적으로 정말 고달픈 사람들, 수녀나 스님 같은 종교인들도 내 작업실을 방문하셔서 온종일 대화를 하는 그런 때가 있었다. 그분들이 오셔서 한결같이 해주시는 말이 "참 마음에 평화를 느꼈다"였을 때 내가 그린 작품에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그래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

여기에 우리가 말하는 '자극적 화려함'이 아닌, '기름기가 없는 절제미학'이 느껴졌다.

ㄴ 작품을 보는데 깊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많이 잃었다. 제일 사랑하는 동생이 막 결혼한 후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그 후 동생과 같이 가본 장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동생을 추억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니까, 애틋한 마음이 그림에 슬픔과 같이 묻어나오게 됐다. 9년 후에 동생 하나를 또 잃었다. 평소 소홀했던 동생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아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아픔이 하나씩 더해갈 때마다 내 그림에서 나도 모르게 슬픔과 그리움이 같이 공존한 것을 느꼈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들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셨는데, 남도 지역을 많이 갔던 것 같다. 지금도 남도라 하면 항상 그리워지는 대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마음의 아픔이 작품에 나오게 됐다. 마음을 둘 수 없어서 갔던 장소를 되새김하면서 매년 간다. 벚나무가 작게 피어있었던 옛 시절에 비해 고목이 되어가는 세월을 느끼면서 점점 내 느낌도 깊이가 더 진해지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 같다.

   
▲ 지난 7월 열린 '신기회 展'에서 전시된 자신의 모란 그림인 '어느날' 앞에서 유진선 화백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작품을 보면 안정감과 균형된 구조를 느낄 수 있다.

ㄴ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감정이 슬픔이지 않았나 싶다. 모란을 대했을 땐, 마음이 편한 그 부분을 찾게 된다. 잎은 다 떨어져 있고 감만 열려있는 돌담에 세워진 감나무를 보면 정겨운데, 이처럼 대중들이 원하는 구도보다 내가 마음이 편한 것을 추구하다 보니 안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자신의 작품을 세 단계로 나눠 초반, 중반, 현재로 본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나?

ㄴ 처음엔 옛 장소를 찾아다니는 분위기였다. 그 후 1990년대엔 일본에서 약 10년간 전시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의외로 일본 사람들의 전체적 분위기가 중간톤을 굉장히 선호했다. 일본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한국 작가들 틈에 끼어서 내 작품이 일본에서 전시되었을 뿐인데 일본 화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버린걸 알게됐다. 매년 일본에서 두 번씩 전시를 했는데, 다음에 올 그림이 뭔지 모르면서도 자기 자랑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예약이 됐다.

일본 일반인이 아닌 화가들이 "다음 작품은 무엇이든지 내가 갖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한국 작가들의 이미지를 크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일본 사회에서 초대됐다. 제가 가지고 간 작품이 일반인에게도 전부 소모가 됐을 때, 깜짝 놀랐다. 일본 사람들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인내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작품 색채의 중간톤에서 찾는 것 같다. 그때가 해외의 초대와 추천을 많이 받은 때였다.

   
▲ '돌담길', 2007년 ⓒ 유진선

하지만 2001년에 사랑하는 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긴자에서 전시가 잡혀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굉장히 상해서, 작업할 수 없는 상황이라 취소가 됐다. 그러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작품 활동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아파하는 사람들의 '치유의 힘'이 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또한, 팬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람 중엔 지역마다 내 작품을 좋아하는 동아리가 있다. 춘천, 용인, 대전팀 이런 식이다. 이런 팀들에게서 응원의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아! 나는 새 작품을 해야겠다'는 열망이 치솟았다. 새로운 작품을 항상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뜻에 맞춰서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통한 두뇌 자극' 책을 같이 작업한 적이 있다.

ㄴ 나이가 드시면서 기억력이 없어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저자인 이은아 박사가 병원 원장님인데 굉장히 섬세하셨다. 자기 병원에서 색칠도 할 수 있는 워크북을 하고 싶은데, 선생님의 그림에서 꽃을 봤을 때 예스러운 꽃들이 많이 있었다. 개나리, 동백, 산수유 등이 있는데,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을 좀 뽑아서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색칠하기 좋은 것으로 간단하게 묘사를 해서 원고를 드린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활용하고 그렇게 미술치료에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림을 통해 잊어버린 기억이 떠오르면서 환자분들이 건강을 되찾고 있는 것 같다.

화가마다 자신의 그림 소재가 있는데, 유 화백은 자연이 우선이다.

ㄴ 자연을 그리되 자연 속에서 같이 숨 쉬고 있는 땅의 뿌리를 둔 꽃들을 그렸다. 그래서 나는 화병에 담아서 꽃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림을 상업적으로 그릴 기회도 매우 많았다. 중국 분이 모란을 그려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돈 계산을 해서 작품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10일 정도 고민을 하다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고,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런 부분들이 작가들에게 많은 유혹으로 작용하는데,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항상 야생화를 그리기 때문에 주로 찾아가는 곳이 자연식물원이다. 이 작품도 용인에 있는 수목원 같은 곳에서 한 작품인데 원래는 모란은 자줏빛이 매우 많다. 종류에 따라 한 겹짜리도 있다. 이건 토속적이고 핑크빛이 내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했다. 이 작품을 만든 당시가 마음이 아주 아팠던 때였다. 가족들의 병환도 있었는데, 그때 제일 편한 마음으로 그리게 됐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아팠을 때, 내가 추구하는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도 그 마음을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은 꾸준하게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이 '내 그림을 저렇게 좋아해 줄까'라는 것을 생각해봤나?

ㄴ 아픔이었을 것 같다. 아픈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봤을 때 공감과 교감을 느낀 것 같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에서 그룹전 전시를 할 때, 오후 3시쯤에 양복을 걸친 남자분이 내 그림 앞에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떠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분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마침 당번을 할 때였는데,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직장 상사한테 굉장히 욕을 먹고 나왔는데, 어디 갈 곳이 없어서 전시장에 왔는데 이 작품이 정말 나를 너무나도 편안하게 해줬다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판잣집이 있는 풍경 옆에 커다란 벚나무가 하나 있는 작품이었다. 그 그림 톤도 거의 회색톤이었는데, 그분은 그것이 굉장히 편안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렸다고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 분은 봄마다 꼭 메시지를 보내주신다. "올봄은 어떤 소재로 그림을 하시나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제가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처럼 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3~40년 넘게 똑같이 가는 장소가 있다. 하동이다. 하동을 갈 때마다 점점 도시화를 하여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또한, 해남 땅끝마을을 갔을 때, 바다만 보이는 고즈넉한 분위기들이 지금은 횟집이 들어선 것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에게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예스러운 정치를 자주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사라져 가는 오지를 좀 더 다니면서, 지금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분위기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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