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그림을 그린 세월을 따져보지 않았다. 지금 64세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꿈 그대로 평생을 살아왔다."

김종수 화백에겐 별명이 있다. '나무 작가'. 그의 작품엔 현대 도시인들을 닮은 도시의 나무들이 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해 1년에 한 번씩 전지하며 상처받는 모습이 현대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런 나무를 그리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을 듣기 위해 본인이 회장으로 있는 '신기회 展'을 방문해, 그가 만든 '도시 나무' 그림 밑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백 김종수는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스페인, 미국 뉴욕 등 다양한 곳에서 자신의 그림을 전시했다. 또한, 2011년 독도 문화 심기 운동 초대전인 '독도를 그리다'에도 참여했으며, 현재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신기회 회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그림 속에 채움도 중요하지만 비움도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그림 철학을 이야기한 김종수 화백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확인한다.

   
 
문화뉴스의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 선정된 소감은?

ㄴ 젊었을 때부터 열심히 그림 그렸고, 화단의 발전을 위해 몸으로 뛰어다녔다. 저한테 이런 영광의 자리를 준다니 매우 반갑고 기쁘다.

최근 근황은 어떠한가?

ㄴ 화가이니 그림을 그려야 하고,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일도 하고 있다. 또한, 신기회 회장이 되어서 올해 첫 전시 준비를 하다 보니 저의 이미지와 신기회의 역사적 연륜 때문에 조심스럽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 엊그제(1일) 오프닝을 했는데 많은 선생님이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회장님이 오시니 발전도 되고 활기가 넘친다고 말씀해주셔서 뿌듯하다.

신기회는 어떤 단체인가?

ㄴ 1957년에 설립됐다. 당시 창립을 하시던 1세대는 다 돌아가셨고, 2세대 원로 선생님들이 생존해 계시고 나머지 분들은 그 이후 들어오셔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신기회가 처음 조직될 땐, 경제 자체가 안정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창작과 생활을 위해 학교에서 미술 선생으로 재직하면서 그 끈을 놓지 않고 활동을 하고자 조직된 것이 신기회였다. 제가 입회할 때만 해도 신기회는 공모전, 학생 실기 대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해 왔다. 그만큼 후배 양성에 많은 공헌을 한 단체다. 지금은 이런 발표회만 하고, 그런 활동을 하진 않지만, 아직 저력이 있다.

자신의 화풍을 말한다면?

ㄴ 먼저 우리 화단엔 아주 훌륭하고 젊음이 넘치는 의욕적인 작가들이 많다. 그 대열 속에 저라는 모습을 찾기 위해 평생 창작 활동을 해왔다. 초기엔 도입기라고 해서 공부하면서 사실적인 그림도 그려보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그려봤다. 이를 통해 '나의 그림을 찾아야겠다', '김종수라는 이름이 붙어있지 않아도 그 그림은 김종수 그림이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제가 추구해 온 부분은 나무라는 소재를 이용한 창작을 해왔다. 초기엔 '무언의 세월'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무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인생의 전반기에 대한 삶을 나무와 접목하면서 창작을 해왔다. 최근의 그림은 우리 것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내 그림에서 만들어가야겠다고 봤다.

   
▲ '무언의 세월' ⓒ 김종수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화가를 찾았을 때, '김종수는 한국의 작가야'라는 인식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창작을 하다 보니 요즘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뒤에 있는 이 작품은 화면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유의 종이인 창호지와 한지에서 느껴지는 맛이 그대로 나온다. 사실 돌가루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전혀 이질적인 재료를 가졌지만, 한국에서 한국사람이 제작했을 때, 느껴지는 한국적인 맛처럼 보였다. 저 나름대로는 그런 생각으로 표현했는데, 여기 전체적인 느낌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있어서 현대적인 느낌도 난다. 어렸을 때 한옥에서 자랐으니까 달밤에 밖을 보면 창을 통해 그림자가 비치는데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를 표현했다.

이처럼 우리 정서에 맞는 어떤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지금 이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저도 이런 여러 가지 유화 같은 수채화나 그림을 많이 그려봤지만, 재료에서 주는 한계성을 느꼈다. 아무리 창작을 해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부분에 고민하다 보니 재료에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해 나름대로 좋은 그림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돌가루를 찾아냈다. 이 돌가루가 굉장히 딱딱하다. 이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려니까 다른 붓 같은 것으론 표현이 안 된다. 그래서 공사장에서 쓰는 여러 가지 기구들을 이용해서 깎아내고 긁어내서 이 작품을 만들어냈다. 다른 그림보다 그리는 공정이 상당히 많이 걸린다.

나무를 소재로 삼는 화백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왜 나무인가?

ㄴ 어릴 때부터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라니까 나무를 보며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문어 다리처럼 휘어가지고 우리를 잡아먹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풍경화를 많이 그리는데 나무가 늘 들어가게 된다. 내가 느끼지 못했는데, 다른 작가들이 칭찬하는 것이 내가 나무를 잘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무를 많이 그릴 것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고 생각해 욕심을 버리게 됐다. 나무 한 그루라도 잘 그리면 되니까, 주변을 모두 없애고 심도 있게 발표하기 시작했다.

자연 속 나무를 그릴 것인가, 도시 속 나무를 그릴 것이냐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라는 동물이 유독 머리가 좋아서 문명을 바꿔가서 살아가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인성 교육을 받아서 틀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간관계라든지, 교육이라든지, 정서가 쌓여가면서 다듬어져 나가는 모습이나 도시 속에 자기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옮겨진다. 나무도 자기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해 1년에 한 번씩 전지하며 상처를 받는다. 세월의 흔적이 만들어져 나가는 모습이 우리 인간과 도시 속 자라나는 인간과 비슷하다고 봤다. 그래서 '도시 나무'라는 명제를 가지고 우리 인간이 느껴지는 마음을 닫혀가는 그런 부분을 나무 속에 같이 접목해서 표현하기 시작했다.

   
▲ '도시 나무' ⓒ 김종수
본인의 인생 철학을 듣고 싶다.

ㄴ 어떤 욕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다. 한국미술협회의 부회장이나 신기회 회장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늘 그림을 그려오고 했는데, 주변 권유로 이런 일을 맡다 보니 문화 발전도 생각하게 된다. 그림이라는 것도 욕심을 가지고 내 그림을 만들어야겠다는 것보다는 포괄적으로 생각이 넓어지게 됐다. 세계를 한 번 보고 내 그림을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주도적으로 되다 보니 우리 것이 중요하고, 나의 모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점 속에서 그림을 찾다 보니 지금의 이런 그림이 나온 것 같다. 제 인생도 뒤를 돌아보면 예술가로의 창작 욕심은 누구나 다 있겠지만, 기본적인 것은 제외하고 나의 모습을 봤을 때 욕심 없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내 그림에 대한 철학이다.

그림을 보면 절제미가 돋보인다. 색감에 대해 큰 욕심도 없고, 견고하며 단단하다.

ㄴ 맞다.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건가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양 쪽엔 흑백논리에 대한 것이 옛날부터 정렬되어 있고, 서양 문명이 들어오면서 색깔이 다양한 그림이 들어오게 됐다. 한국화의 맥을 보면 채색화도 담백하게 그려냈고, 먹선으로 그림을 표현했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이 한국적인 멋이 아니겠느냐고 봤다. 색을 될 수 있으면 비워버렸다. 채움도 중요하지만 비움도 중요하다는 말처럼 많은 색이 있지만 다 버리고 흑백논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설명을 하지 않고, 보여줬을 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안목을 가지고 볼 때 "이거 창호지로 그렸어요?", "이건 동양화 같으냐"고 표현한다. 그 표현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느낌에서 나온 것 같다.

   
▲ '도시 나무' ⓒ 김종수
자신의 작품을 세 단계로 나눠 초반, 중반, 현재로 본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나?

ㄴ 어느 화가던 표현할 때, 그쪽엔 전문적인 지식은 없고 화단의 흐름으로 봤을 때는 학교 다니고 할 땐 도입기라고 해서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다 배운다. 여러 기법의 문제, 색채가 가지고 있는 느낌으로 수채화, 유화, 조각도 만들어보는데 어느 작가든 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 그게 도입기다. 알아가는 시기인데, 그때는 아주 꼼꼼하게 사실적인 것까지 그려본다. 어느 작가든 자기 실력을 인정받을 때까지 그렇게 표현하다가 서서히 '내가 어떤 존재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림이 서서히 변해간다. 나는 이렇게 배워왔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체질에 맞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게 변화의 1단계다. 중견 작가들이 다 여기에 몰입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시기다.

그 단계가 지나면 노년기로 접어든다고 하면 60이 넘고 70~80이 되면 아주 농축된다. 붓 자국 하나를 찍어도 세련미가 넘치고 인생이 함축된 그런 느낌을 준다. 흔히 속된말로 '대충 그리는 그림이 대가의 그림'이라고 표현한다. 그게 맞다. 대충 그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톡톡하고 그려지는 것이니. 여기엔 모든 인생관이나 자신이 살아온 붓질을 수십 번 수천 번 해왔던 흔적이 함축되어 표현된 것이다. 색깔도 농익고, 붓 터치 자체도 세련되어 있다. 이런 작가를 봤을 때 크게 보면 3단계로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개 작가들이 노년기가 오면 그림이 단순하고 담백하게 된다.

그림 그리는 습관이나 징크스가 있나?

ㄴ 특별한 습관은 없고, 외모로 느껴지는 것이 늘 모자를 쓰고 다닌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작업이 잘 안 될 정도다. (그게 징크스다.) 그럼 그렇다. (웃음)

   
 
현대 미술에 대한 관점을 말해 달라.

ㄴ 요즘은 제도권 속에서 일본강점기 때부터의 관습 때문인지 그 습성이 변하지 않았다. 한국미술협회가 현재 17개 분과로 나뉘어있는데, 장르별로 구별해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있다. 섞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강하다. 예술 중심지가 프랑스 파리에서 현재 미국 뉴욕으로 바뀌어 있다. 그렇듯이 시대에 앞서있는 작가들이 뉴욕에 모여있다. 앞서간다는 작가들이 다 모인 곳이니 그런 성향을 분석해보면 지금은 어떤 예술에 대한 한 가지의 전공을 해서 하는 예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종합되어 있는 함축되어 있거나 복합적인 형태의 회화가 많다. 작품 속에 소리가 날 수 있고, 움직일 수도 있고, 조형물이 속에 들어가기도 하는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을 최대한 다 표현하는 형태의 그림들이 많다. 그런 것이 이 시대에 맞는 예술품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화단에선 전통과 진보, 구상과 비구상이 이분화되어 있는데?

ㄴ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견제하고 가는 것 같다. 시대에 따라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것이 더 앞서고 주목받을 수 있고, 어느 시기엔 현대적인 것이 더 강하게 보여 표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순회하듯이 늘 공존하리라 본다. 옷 같은 경우도, 어렸을 때 옷깃이 좁고 촌티스러운 것이 요즘 나와 유행하듯이 그런 범주 내에서 순회하고 공유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미술을 시작하는 학도들도 많다.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ㄴ 능력이나 권력이 된다면, 한 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많이 성장해 세계 몇 위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근대 미술관이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잠깐잠깐 기획을 통해 몇 세대의 그림, 몇 년도 어느 작가의 그림으로 기획전은 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작가들을 한자리에 집합을 시켜놓고 연도별로 정리해서, 우리 젊은 작가들이 방문해 느낌이 들고 뭔가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런 것을 추구해봐야겠다'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 아쉽다. 책을 통해 이 작가, 저 작가를 다 봤겠지만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계획은 어떠한가?

ㄴ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화단을 위해서 희생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후엔 직책이나 일을 벗어놓고 오직 내 작품만을 위해서 지내고 싶다. 나이가 차니까 아침부터 잠잘 때까지 오직 다른 생각 없이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 일까지만 정리하고 조건이 안 된다면 지방 시골이라도 들어가서 여생을 그림을 위해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계획대로 됐으면 좋겠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어릴 때 아버님이 능력이 있어서 돈을 열심히 버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데려다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정작 우리 집은 잘 안 챙기셨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오니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 그 당시에 상당히 우울했다. 그때 생각을 돌이켜보면 그런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고 되레 고마웠다. 그때도 어려웠지만, 장가도 가고,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커왔고, 죽는 날까지 그림을 통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사람을 만날 때 가정이 너무 어려운 시기였는데, 같이 살아와 줘서 고마웠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신이 해줬고, 뒷수발까지 해주니 얼마나 고마웠는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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