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한충완 교수를 안산의 어느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첫 느낌은 그가 입은 청바지 같았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는 청바지처럼. 

실용음악계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 명인 한충완 서울예술대 교수를 만났다. 한충완 교수는 FM 라디오를 들으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음악가를 꿈꾸는 이들의 선망 대학인 버클리 음대에 입학했다. 그는 이른바 '버클리 음대 1세대 뮤지션'의 멤버이기도 하다.

"제가 대중에게 어필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인터뷰 중 웃기도 한 그는 비록 많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음악계에서 인정을 받는 인물이다. 현재 그의 개인 앨범으로는 1집 'Love Song'(1994년), 2집 'Corea Corea'(1995년), 3집 'Off Road'(2003년), 4집 '회색'(2003년)이 있다.

뮤지션 뿐 아니라 한충완은 다양한 이력을 소유하고 있다. 양희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여행스케치, 전인권부터 핑클, 강타 등 '1세대 아이돌'의 앨범 작업에도 참여했다. 영화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와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재즈 피아노 파트를 맡기도 했다. 또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세종문화회관 등 한국 음악가들이라면 꼭 한번 연주해보고 싶은 장소에서 다수의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기에 1993년부터 서울예술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해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제자를 양성해왔다. 그를 만나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와 유학 생활 시절 에피소드, 자신의 음악 활동, 교수 한충완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뉴스의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 선정된 소감은?

ㄴ 얼떨떨하다. 선정됐다는 자체가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ㄴ 초등학교 때 집에서 부모의 권유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고,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일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던 시대인 1970년대~80년대엔 주변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FM 라디오가 유일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FM 라디오를 들으면 그 당시 DJ가 있고 음악을 소개해 줬다. 그때 포크를 비롯해 락, 팝 등이 국내에 소개됐다. 이처럼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게 되었고 좋아하게 됐다. 당시 들었던 음악 대부분이 대중음악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지만, 재즈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음악적인 배경과 조직력, 구성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에 들어선 잘 몰랐다. 그래서 호기심이 컸다. 저게 도대체 뭘 까라는 궁금함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재즈를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클리 대학도 그런 연유로 가게 됐다.

유학 생활이 한충완을 뮤지션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

ㄴ 지금의 세대는 인터넷이 잘 발달하여 있어서, 유학을 가지 않아도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물론 좋은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저희 때는 정보 자체를 얻기도 힘든 '유학 1세대'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정보 때문에 혼란스러웠기도 했다. 당시 제 경험치가 상당히 낮은데, 경험치를 넘어서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그 괴리가 컸다. 괴리를 좁히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학에서 얻은 것은 바로 그 정보 같다.

실용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버클리 대학에 대한 로망이 있다.

ㄴ 지금 세대의 젊은이들이 유학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제가 갔을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지금은 시장 자체가 각박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자기가 무언가를 이뤄야 하고, 남보다 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저 때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었다. 좋아서 했던 것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경쟁심과 스트레스가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쪽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지금의 상황은 그러한 것 같다. 유학 자체가 과거와 다르게 더 이상의 차별화된 것도 없다. 많은 사람이 이미 갔다 왔거나 가기 때문에, 더욱 특별해지는 것은 없어 보인다.

   
ⓒ 이강신 작가

유학을 꿈꾸는 이들에게 팁을 준다면?

ㄴ 졸업생들이 찾아와서 많은 질문을 한다. 유학을 간다는 자체가 매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자기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고, 더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굉장한 경제적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걸 투자 개념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보고 유학을 간다면 힘들 것이라는 말을 꼭 해준다. 투자와 상관없이 좋아서 가고 싶으면 가라는 것이 제 베스트 조언이다. 이 만큼의 시간과 정렬, 돈을 투자했는데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라고 생각하면 답이 없는 것 같고, 좋은 방향도 아닌 것 같다. 자기가 가고 싶은 열망이 있어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꿈이 있어서 가는 것이라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유학 이야기에서 본인의 음악 이야기로 넘어가 보려 한다. 한충완의 음악 세계와 대중의 관계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ㄴ 제가 대중에게 어필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웃음) 역으로 생각하면 대중에게 숨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름대로 든다. 마지막 CD를 낸 것이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10년 동안 학교 일을 하기 위해 개인 일을 소홀히 했는데, 다시 10년 만에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이 앨범은 완전히 대중음악이다. 재즈도 아니고, 연주 음악도 아니고, 팝이나 가요 같은 음악이다. 나도 많은 우회도로를 거쳐 이제 대중음악을 하는 것 같다.

개인 앨범으로 4집까지 나왔다. 각각의 특색을 말한다면?

ㄴ 1집 'Love Song'(1994년) 같은 경우는 나름대로 꿈이 많던 시절에 주관적인 비전을 담고 있었다. 2집 'Corea Corea'(1995년)는 국내에 돌아와서 야심이랄까?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은 욕심 같은 실험이 들어있다. 3집 'Off Road'(2003년)엔 재즈의 영역 내에서 대중성을 찾아보자고 한 취지가 있었다. 4집 '회색'(2003년)은 피아노 솔로 앨범으로 아무나 편안히 들을 수 있도록 생각해봤다. 그 후로 10년이 지나 올해 하는 앨범은 완전히 대중적인 방향이다.

   
ⓒ 임준빈 작가

'실용음악계의 신'이라고 음악계 종사자들이 이야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보는가?

ㄴ 그런 프레임을 지어주신 것이 제가 1세대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실용음악과를 대표하는 서울예술대에서 쭉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을 했을 때 나름대로 실험성도 가지려고 했던 것 같고, 이왕이면 남이 하지 않는 것도 하면서 대중성을 갖는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어떤 시도를 해 왔나?

ㄴ 예를 들어, 1995년 당시 국악을 접목하면서 보편성에서 벗어난 시도를 했다. 어떻게 보면 예술 의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보면 다 부질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웃음)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대중 팝 음악으로 돌아오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세 단계로 나눠 초반, 중반, 현재로 본다면?

ㄴ 가수 양희은 선생님의 앨범에서 편곡하고 연주를 한 인연부터였다. 그 당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대타로 방학 중에 아르바이트하게 됐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사회에 진출하면 일을 해야 할 시점인데, 친구들과 유학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딱 끊겼다. 유학을 갔다 온 후 대중음악계 후배들을 많이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최태완, 김형석 등이 있다. 유학을 가면서 국내 일과는 단절이 됐는데, 다녀오니 서태지가 나와서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공부하고 와서 일반 가수 일도 했지만, 그 일에 뛰어들어 전념하기보단 다들 학교 쪽으로 정착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필드는 2차가 되고 학교의 안정적인 직장이 1차가 된 것 같다. 그 당시 동료들이 피아니스트 김광민, 정원영, 한상원 이런 친구들이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수년 전 학부형 하나가 아들이 버클리를 가니까 추천서를 써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싸이'였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됐느냐면, 음악회에서 추천서를 부탁한 부모님을 다시 만났는데 우리 아이가 판을 냈다고 해서 줬는데 유명해진 싸이였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학교 안정이 되면서 개인적으로 대중적인 교감을 찾아보려는 시점에 온 것 같다.

   
ⓒ 이강신 작가

요즘 연주할 곳이 많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ㄴ 우리나라의 인구나 시장이 작다. 그거와 비교하면 음악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쉽게 이야기하면 고급 인력이 많다. 그 사람들이 오갈 곳이 없고 할 것이 없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변이 넓어지는 것 좋은데, 사회적인 측면에서 답답한 것 같다. 연주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은 장사가 안된다는 것이다. 충분한 할 만큼의 경제적 리턴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연주할 장소에 사람이 많아지면 수요와 공급도 늘어날 것 같지만 역행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ㄴ 인터넷이 발달해서 음악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내려받아서 들을 수 있고, 월정액을 통해 많은 양을 들을 수 있는 인식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가서 돈을 주고 구경하는 공연보다는 무료 공연이 훨씬 편하고 좋은 상황이다. 잘 되는 공연은 기업이나 정부단체에서 지원하고, 관객은 무료로 오고 객석은 차는 형태인데, 입장료를 받아서 공연하려고 하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오나?

ㄴ 영감을 찾지는 않는다. 그 부분에선 담담한 것 같다. 영감을 구하기 보단, 문제 풀 듯이 음악을 연구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실제 경험을 한다고 한다) 나는 없다. 내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였는데 직업이 되고 난 다음부터는 맹숭맹숭해진 것 같다. 자발적으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데드라인이 발생하지 않으면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다. 지금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하게 됐다.

한충완 밴드에 대해 소개해 달라.

ㄴ 학생들과 같이 구성하지만, 그때그때 멤버들이 바뀐다. 바람직한 의미에서 어떤 밴드를 한다는 것은 평생 음악을 같이 만들어서, 리허설도 하고, 앨범도 내는 패밀리 개념이 참 좋은데 음악 시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각자가 경제생활을 하고 식구도 먹여 살려야 한다. 밴드에 매달려서 경제생활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다. 한충완 밴드라는 이름은 있지만, 공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바뀐다. (프로젝트 그룹의 형태 같다) 그렇다. 공연 때 시간이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바뀌지 "우리는 영원한 밴드야", "패밀리야"는 힘들다. 윤도현 밴드 같은 팀이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그 밴드만 해서도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런 밴드는 극소수다. 어려움을 감수해서도, 굶어 죽어도 이걸 해야겠다 하는 게 아니면 어렵다.

   
ⓒ 이영석 작가 제공 

실용음악과 교수를 현재 하고 있다. 언제부터 국내에서 실용음악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나?

ㄴ 실용음악이라는 용어는 클래식에서도 한때 썼었던 것 같다. 잠시 사조라고 해야 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실용음악과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착된 실용음악과는 방향은 다르다. 실용음악 언어 자체는 1980년대 서울예술대에서 처음으로 실용음악과가 생김으로 인해 클래식계가 아니라 이쪽에서 정착된 것 같다. 그때 당시 실용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취지는 서울예술대 유덕형 총장님께서 연극 연출도 하시던 분이기 때문에 영화, 연극, 이미지, 무용과 같이 써먹을 수 있는 음악을 해보자고 해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서양 음악도 있지만, 국악이라는 좋은 음악도 있으니 한국적인 것도 같이 접목하자는 의미였다. 영어로는 'Applied Music'이라고 하셨다. 뭔가 적용이 된 음악을 하자는 뜻이었다. 그렇게 시작이 된 것 같은데, 지금 많은 사람이 실용음악(Practical Music)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니 차라리 대중음악(Popular Music), 혹은 상업음악(Commercial Music)이 바르다고 본다.

홍대 문화 속의 대중음악은 어떻게 보는가?

ㄴ 홍대 문화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홍대 주류의 음악적 색채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을 하든지 한 단체가 전체를 만족하게 할 수 없으므로 있는 것이 좋다.

교수 한충완은 어떤 사람인가?

ㄴ 학생들을 편안하게 대했다. 실용음악이라는 자체가 클래식 쪽은 교수님이 대개 권위적이다. 그렇게 자리가 잡혀 있는데, 실용음악은 학생들이 친구들 같다. 그래서 자유로움이 있고, 어떤 시각이든 형편없다고 할 수 있다. 되게 편안하게 지내려고 했다. 지금 입은 복장이 학교 갈 때의 복장과 똑같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렇다. 물론 학교가 예술학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편인데, 시대가 변했으니 학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점점 희석되어가는 것 같다. 그 현상이 맞는 것 같다. 개인의 열정과 의지가 있으면 꼭 학교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정보와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다. 꼭 학교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시대 흐름에선 학교가 오히려 뒤처지는 경우도 많다.

   
 

교재를 상당히 많이 썼다. 양적으로 많은데 이유가 있다면?

ㄴ 하다가 보니 그렇게 됐다. (웃음) 제가 썼던 교재들이 그렇게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쪽으로 접근을 많이 했다. 스펙트럼으로 광범위한 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책을 낼 때마다 책에 담긴 정신도 있고, 의미가 있을 것 같다.

ㄴ 책마다 다른 것 같다. 예를 들어, 재즈 솔로 같은 책에선 귀를 몸을 유연하게 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요가처럼 확장해주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통론 쪽은 이론적 베이스를 주려고 했다. 악보가 수록된 책은 어떻게 보면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소리의 접근보다 악보를 통해 일차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런 악보를 통해 실용음악이나 재즈를 접하게 한다는 취지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쓴 책은 가사에 대한 책이다. 국내 가요의 가사가 제가 보기엔 엉망으로 되어있는 것이 많아서, 제대로 알고 써보자는 취지에 쓰게 됐다.

   
 

한충완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ㄴ 지금은 별것 아닌 것 같다. 여러 가지 하는 일 중 하는 것 같다. (명사로 표현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타이틀을 부여하게 된다면, 덜 해지고 더 해지고 규정지어지는 것도 있고 죽어버린 것 같다. 음악이 뭔지는 정확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웃음) (몸에 밴 그 자체인 것 같다) 그렇다. (웃음)

음악을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될 것 같다.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후배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것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스트레스를 젊은 세대들이 받았다는 것은 기성세대들이 만든 집안 분위기, 직장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걸 넘어서서 속박에서 자유스러워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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