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을 다룬 뮤지컬 '영웅', 1997년 대한민국 뮤지컬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명성황후', 인기 웹툰을 기반으로 한 창작 뮤지컬 '신과 함께_저승편'까지 다양한 작품들엔 특별한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창의적인 무대 디자인이다.

그 창의적인 무대를 만든 장인은 바로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다. 무대 디자인은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작가와 연출가의 제작의도를 고려해 무대장치나 세트를 설계하는 직업이다. 일반적인 연극의 3대 요소나 4대 요소를 말할 때 무대는 항상 포함된다. 작품의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체계화하는 사람으로 극적 공간으로의 무대를 구성하는 것이 무대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다.

평범한 직장을 다니다 창의적인 무대 디자인을 하겠다는 일념 아래에 직장을 그만둔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 직장을 그만둔 그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못했다. 단순한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무대 디자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 3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변했다. 무대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어느덧 공연을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한국 무대 디자인의 거장,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를 선택했다. 그는 2006년 배우나 연출이 아닌 스태프의 자격으로 제16회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있던 사례였으며, 이 외에도 더 뮤지컬 어워즈, 서울연극제, 동아연극상 등 다양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7월에만 세 작품을 소화하는 바쁜 일정 가운데, 그를 만나 30년의 세월 동안 직접 겪었던 이야기들과 앞으로 이 직업을 택할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했는지 들어봤다.

   
 

이 일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ㄴ 연세극예술연구회에 연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위기가 좋아 보여서 들어가게 됐다.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해서, 그 안에서 주로 무대 예술을 하게 됐다. 졸업하고 일반 회사에 다니다가 다시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 그만뒀다. 일반 회사도 창의적일 순 있지만, 신입사원이 하긴 힘들지 않나. 그래서 홍대산업미술대학원의 무대디자인 전공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외부활동을 바로 시작했다. 1987년 4월, 극단 산울림에서 '숲속의 방'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엔 극단 연우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하게 됐다.

그 당시 일화를 듣고 싶다.
ㄴ 그땐 직업적으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인식조차도 정식 직업으로 인정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무대 미술을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회사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이 "극장 간판을 그리는 일이냐"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업 작가로 직업이 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에도 무대 미술을 하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하지만 대개 방송국에 있으면서, 외부에도 공연 활동을 같이하는 정도였다. 공연 무대만 전업으로 생활이 되기엔 힘든 시절이었다. 전업 작가로 무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다.

당시엔 직업으로 인정되기 쉽지 않았다. 우스개로 들리겠지만, 당시 교통사고가 나서 종로경찰서로 사고조사를 하게 됐다. 직업이 뭐냐고 물어서 무대 미술을 한다고 했더니 인테리어라고 빈칸에 적어놨다. 그다음 해에 같은 곳에서 사고가 나서 갔더니 다른 경찰관이 얼굴을 보고 직업에 무직을 적어놨다. 왜 남의 직업을 무직으로 적었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야, 취미와 직업은 다른 거야"라고 훈계를 했다. 당연히 그때 당시엔 인식도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이걸로 충분히 좋은 직업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20대의 젊음을 바친 것 같다.

당시 무대 미술이라는 인식이 없었을 텐데,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이었나?
ㄴ 어느 나라나 국가 경제 수준이 일정 단계까지 올라가면, 문화 예술이 비례하며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발전할 거라는 것이 워낙 고도성장기였기 때문에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단계에서 무대 미술이라는 인식이 낮아서, 별로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연극 종사자 수도 적었던 시대였었다. 하지만 앞으론 많이 늘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대 미술 분야가 아직 원하는 만큼 전문화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ㄴ 공연에서 무대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중요해지고 커지고 있다. 앞으로 그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중앙대 교수직을 내려놨다. 
ㄴ 예전부터 전업 작가를 지향했었다. 학교에 있었던 것도 보람 있었고, 좋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공부가 많이 됐다. 하지만 스스로 부족한 것이 많다고 보니 전업을 해야 겨우 부족함을 이겨낼 수 있고 일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전업 작가로 다시 하게 됐다. 이제 석 달 정도 됐다. 되돌아보니 전업으로 해도 이렇게 부족한 일을, 내가 어떻게 겸업으로 해왔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 1997년, 뮤지컬 '명성황후'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 박동우

'무대 예술가'로 지낸 약 30년의 세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ㄴ 1995년에 '명성황후'를 했고, 1997년에 미국 공연을 가게 됐다. 미국 공연을 갔을 때가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대부분의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이 브로드웨이 콤플렉스가 있었던 때였다. 항상 브로드웨이는 우리보다 몇 수 위에 있고 우리는 비교하기 어려운 단계로 뒤처져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어서, '캣츠'와 같은 공연의 사진을 보며 "우와"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7년 '명성황후'를 가지고 미국 공연을 하면서, 뉴욕 현지 평가들을 받게 됐다. 여러 매체 평가들이 현지 작품들과 비교해서 다른 평가도 좋은 분야가 많았지만, 무대 미술 쪽은 전혀 손색없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브로드웨이 콤플렉스를 떨치게 됐다. 우리도 잘하면 그들에 못지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때가 큰 도약기였다.

국민 뮤지컬인 '명성황후' 초연 당시 무대에 이야기해달라.
ㄴ 그때 당시 작품의 장면 수가 서른 장면이 있다. 어떻게 역동적으로 끊어짐 없이 표현하느냐가 관심사였다. 이 작품을 경복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기와 한 장 쓰지 않고 표현해 관객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수 없이 많은 안을 만들어봤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무대 폭을 12m 정도인데, 명성황후와 고종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 사람들이 무대 중앙까지 걸어 나오려면, 관객이 안 보이는 곳부터 7~8m까지 항상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왕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올 수는 없다. (웃음) 그래서 걸어 나오는 것을 안 보여주기 위해 불을 끈다. 하지만 반복되는 암전을 사용하면 공연이 너무 재미없어지게 된다. 결국, 왕이 걷지 않고, 항상 무대의 중앙에 갈 수 있도록 회전무대를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왕은 항상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계단 위에 옥좌도 필요했다. 멀쩡한 무대에 갑자기 계단은 어떻게 생길까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경사 이중 회전 무대를 만들게 됐다. 그렇다고 의도 없이 만들진 않았다. 경사 이중 회전무대가 엇갈려 돌아가면 마치 소용돌이처럼 생겨난다.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가서 침몰당했는데, 그것을 표현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에 회전무대를 쓰게 됐다. '명성황후' 20주년 공연을 오는 7월 말에 하는데, 전체적으로 새롭게 바꾸려 하지만 회전무대는 변하지 않는다.

'명성황후'의 20주년 공연 방향은 어떻게 바뀌는가?
ㄴ 전체적으로 무대 미술의 경향은 변화하고 있다. 큰 변화가 물감에서 빛으로라는 점이다. 제가 만든 표현이지만, 그런 표현대로 포괄적인 변화가 진행될 것 같다.

   
▲ 뮤지컬 '영웅'의 기차 장면 ⓒ 박동우

얼마 전 공연한 '영웅'의 기차씬 뒷이야기를 알려 달라.
ㄴ 기차씬은 원래는 하얼빈역에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밖에 없었다. 공연 2년 전쯤에 공연팀에 합류하게 됐다. 공연 팀에게 "갑자기 기차가 나타나면 관객이 갑작스러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드라마에 접근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만주 벌판을 달려오는 기차 장면을 하나 더 만들어 넣자"고 제안해서 '설희'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들어가게 됐다.

어렸을 때 집에 독립투사에 대한 책들이 많아 다 읽게 됐다. 중학교 3학년을 다니던 어느 날, 만주의 독립투사가 된 꿈을 꿨다. 기차에서 군인들에게 쫓겨 마지막 칸까지 도망을 다녔는데, 도망을 갈 길이 없어 강 위에 있는 철교에서 물속으로 뛰어든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직접 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설희'라는 인물을 강 위에 뛰어내리는 설정을 하게 됐다. 워낙 강한 꿈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웃음)

이런 무대예술 영감들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ㄴ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많은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험과 여행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방금 말한 '영웅'의 기차 장면이 독서를 바탕으로 한 꿈에서 나왔다. 하지만 죄인의 심정을 알기 위해 감옥에 갇혀 살아 볼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대신 겪어볼 수 있는 것이 간접 경험을 통해서다. 간접 경험 중엔 영화를 본다거나, 요즘 들어 늘어난 타인의 사진을 보는 것 등이 있다. 그런 방법들은 누군가가 이미 시각적으로 결정한 것을 내가 보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시를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은 보면서 내가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굉장한 시각적 상상의 훈련이 된다. 언제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어렸을 때 독서를 하는 것은 커서 어떤 일을 하든 중요한 것 같다.

창작물 무대를 집중적으로 만든 이유는?
ㄴ 항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오면서 해 온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이 공연을 여기서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공연하라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햄릿'을 한다고 하면, 보통 분장과 말하는 것을 서양 사람들처럼 연습해 보여주려고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코스프레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학생 때 학예회 정도로는 할 수 있다. 직업적으로 한다면 달라진다. 어떤 작품을 하든 간에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관객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이 공연을 통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나는 왜 이 공연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엔 작품을 하지 않았다.

물론 창작품이라고 해도 모든 창작품에 그런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래서 창작 작품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공연을 했던 '사회의 기둥들'이 있다. 그 공연엔 140년 전에 노르웨이 작가인 헨릭 입센이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나는 그 작품의 해석을 2014년의 대한민국으로 잡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기울어지는 선실 속에 갇혀서 기울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점점 침몰해가는 모습이 떠올려졌다. 원작은 노르웨이의 대경제 부호이자 정치가의 거실에서 일어나는데, 선실로 바꾸게 됐다. 이처럼 외국 작품, 이를테면 시대를 초월하는 셰익스피어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관객과 만나게 하는 방법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공연을 해야 한다.

   
▲ 지난해 공연된 연극 '사회의 기둥들'의 한 장면. ⓒ 박동우

무대 세트와 방송 세트의 차이가 있다면?
ㄴ 방송 세트를 직접 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른다. 방송, 영화, 연극이 공통으로 드라마를 한다. 영화가 발명되지 않은 시절에 드라마를 한다고 하면, 스토리텔링을 하는 목적이 강했다. 스토리텔링을 직접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상황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영화가 발명되고 나서 상당수의 사람이 영화라는 매체가 스토리텔링은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예술 분야인 사진과 회화의 역할은 지금 분리가 됐다고 본다. 과거엔 회화를 기록용으로 사용했다. 사진술이 발명되고 나서, 사진이 기록에 더 유리하다고 인식되어 회화의 기능에서 기록은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회화는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게 됐다. 물론 현재도 다양한 회화의 장르를 볼 수 있다.

공연도 이와 마찬가지라 본다. 예를 들어 "달이 있네"라고 할 때, 연극에선 실제로 달이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달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사실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들은 영화와 TV 드라마로 가게 됐다. 물론 회화도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남아있듯이, 연극에도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뻔한 이야기를 연극적으로 표현하는가에 대한 표현 방법을 즐기기 위해 관객들은 극장에 간다. 우리가 '춘향전'을 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연극적 표현의 재미를 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같이 작업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받은 연출가 세 명을 말한다면?
ㄴ 우선 세 분만 꼽자 하니 안타깝다. (웃음) 제일 먼저 제가 만났고, 연극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 선생님이다. 저와는 나이 차이가 30년 정도 나는 분이시다. 첫 연극 작품으로 '숲속의 방'을 했을 때 연출을 맡으셨다. 연극을 하는 태도, 만들어가는 과정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두 번째 분은 다음 해쯤에 같이 만난 윤호진 선생님이다. 현대 무용으로 처음 만나서 같이 시작을 했다. 1989년 서울연극제에 참가한 극단 실험극장의 '실비명'을 하면서 미술상을 받았다. 그래서 뜻깊은 작품이었다. 이후 '명성황후', '영웅' 등 걸출한 작품을 같이하게 됐다. 끝으로 김아라 선생님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분은 그 무렵 만나 평생을 같이 해왔다. 이후에 만난 분으로는 손진책 선생님도 계신다.

연출이 요구하는 대로 작업을 진행하나? 아니면 부딪치더라도 본인의 의견대로 하는가?
ㄴ 방금 말한 네 분은 요구한 적이 없으셨다. 그냥 믿고 맡겼다. 요구한다는 사람이 왜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다. (웃음) 자신의 창의력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왜 전문가를 만나 그 선에서 끝내려 하나. 내가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서 여기가 아프니 여기를 수술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네 연출가는 각각의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창작품을 만들어낼수록 자극을 하는 분들이다.

   
 

계속해서 발굴될 후배들에게 선배로 조언한다면?
ㄴ "우리는 지금 이 공연을 왜 하는가?"를 꼭 생각했으면 좋겠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지칠 수 있는 무대 미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모든 사람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가긴 힘들다. 끝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가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건 모든 분야가 다 그러한 것 같다.

올해 어떤 작품이 기다리고 있나?
ㄴ 7월 1일부터 뮤지컬 '신과 함께_저승편', 7월 11일부터 뮤지컬 '아리랑', 7월 28일부터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될 예정이다. 하반기가 아니라 7월에만 공연 3편을 연달아 하게 됐다. (웃음) 준비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편집자 주 :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의 홈페이지(dongwoopark.com)엔 본인이 직접 작업한 작품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이 일을 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창의적인 일을 내가 좋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좋아서 하다 보니 열심히 하게 됐다. 열심히 하면서 즐기고, 연구를 하다 보니 좋은 작품도 나오는 그런 순환 과정을 거쳐왔다. 이 일을 하며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을 했다. 저 사람과 일하기 싫지만 억지로 일하는 것은 이 분야엔 없다. 내가 안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고 있어서 좋다. 이 직업의 장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셰익스피어도 있고 지금의 예술 작가까지 시대를 초월해 모여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 세상을 향한 예술가들의 메시지가 좋은 작품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 단점이 있다면, 경제적으로 아직 시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는 경제력이 높더라도 바로 따라오지 않는다. 경제가 발전되면 뒤에 조금씩 따라오게 된다. 천천히 익어가는 것이 문화적 성숙도다.

지금 해결은 되지 않더라도,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있는 상태에 온 것 같다. 공연하면서도 큰돈을 버는 친구들도 많다. 앞으로 계속 탄력을 받아 발전할 것으로 본다. 당장 어렵더라도 후배들이 지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작품을 만들면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 본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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