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길 떠나는 가족' 리뷰

   
 

[문화뉴스] 지난 10일부터 25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 의미 있는 공연 한 편이 올라왔다. 화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이다.

연출가 이윤택은 연극을 올리기까지의 과정과 연극이 그려내는 이중섭의 삶의 과정이 많이 닮아있노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이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윤택 연출은 이중섭 역을 맡은 윤정섭 배우에게 "화가가 굶어 죽는 세상에서 예술가가 사는 것은 무엇이냐고 생각하라"며 "울지 말고, 냉철하고 힘들게 연기하라"고 전달했다고 한다. 20세기의 환쟁이를 연기하는 21세기의 연극쟁이들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이중섭의 그림 세계가 반영된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이들의 연극에서 향토적 색채는 은은하게 지속되는 향수의 베이스노트와도 닮아 있었다. 그 위에 포개어진 이미지는 자연으로 가득했다. 이중섭의 그림에 등장했던 자연의 기호들이 무대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이들은 2차원의 세계와 3차원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한다. 극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오브제는 '그림'으로써 표현됐다. 소, 게, 나비, 가방, 주전자, 수레 등 자연물에서부터 일상 소품들이 평면의 그림으로 표현된 가운데, 과거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배우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연극과 회화의 경계에 서 있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화가 이중섭은 "나는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 놈이야"라며 자괴감에 빠진다. 그림을 사랑하고, 모르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반동분자, 모작꾼, 춘화쟁이, 빈자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한 차례 한 차례 이별해야만 했던 이중섭은 발악한다. "내 그림은 엉터리고 가짜"라고 말이다.

 

   
 

예술가의 삶을 '쓸모없는' 삶으로 지칭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산적인 일은 무엇일까. 더구나 그 필연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생산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일은 왜 모든 인간의 생(生)에 당연스레 요구되는 것일까.

 

   
 

"내가 보는 해는 매일 다른 해야."

매일 뜨고 지는 해의 모습을 보며 변화무쌍한 자연이라 감탄하며 그것을 그림으로 담고자 했던 이중섭의 삶을 누가 '가치 없다' 지적할 수 있을까. 자연의 나체,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이중섭의 삶은 가치 없는 것이 되었지만, 이중섭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 그려내던 그림은 오늘날 아주 값진 것이 됐다. 경제적 합리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모두가 그런 가치를 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까지 배제시킬 수 있는 삶.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가 되었고, 그렇게 지배의 주체가 되어 인간 스스로의 존재마저도 객체로 전락시키는 괴물이 됐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도구적 이성의 메커니즘을 '동일성의 원리'라 칭했다.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서로 다른 대상들을 주체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강제하는 지배 원리 말이다. 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동일성의 원리에 대한 대안으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바로 예술의 자율성이다.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율성이 발현된 예술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자연과 맞닿은 예술이 곧 자신의 삶이기를 꿈꿨던 이중섭, 그리고 그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사회. 사회의 자기동일성은 이중섭을 예외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상정하며 소외시켰지만, 이러한 사회의 자기동일성을 거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중섭이 꿈꿨던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중섭의 그림과 삶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무대 또한 우리의 자율성을 체현하기 위한 훌륭한 예술이 되었고 말이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문화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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