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나는 '무대에 미친 여배우'부터 '미쳤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건 어마어마한 찬사다. 미쳤다고 본 사람은 굉장히 잘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장점은 엄청난 몰입도와 집중력이다."

배우 김지숙에게 연극은 '종교'다. "연극을 위해 40대까지만 해도 연극 연습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밝힌 김지숙 배우에게 1984년 백상예술상 신인상, 1985년 올해의 여성상 연출가 그룹상, 1986년과 1987년 관객이 뽑은 최고의 배우상, 1992년 ITI 국제극예술협회가 수여하는 영희연극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김지숙 배우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중견연극인을 위한 '중견연극인창작집단'의 창단 대표가 된 것이다. '현자 나탄'과 지난겨울 올려진 '바냐 아저씨'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올리고 있다. 특히 '바냐 아저씨'는 직접 예술감독부터 제작, 그리고 '엘레나' 역할까지 맡으며 연기를 소화했다. 40여 년간 무대만을 생각해 온 배우 김지숙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내가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진짜 예술가와 숨은 고수들을 찾아서 "이 칼럼을 보면 대한민국 100인의 최고 예술가가 누구다"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코너가 됐으면 좋겠다.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ㄴ 중견연극인창작집단을 작년에 발족했다. '현자 나탄'을 올렸고, 올해는 '바냐 아저씨'를 올렸다. 아트원씨어터에서 대박이 났고, SH아트홀에서도 대박이 났다. 대박이 났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 아니라 중견연극인창작집단에 시선이 모이고, 그 중요성을 알렸고, 중년연극인들에게 함께하길 원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작품도 준비를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중견연극인창작집단을 만들게 된 동기는?

ㄴ 중견연극인이 너무 소외되고 설 자리도 없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중견연극인이 가진 열정과 달란트는 어마어마하다. 몇십 년 해서 얻어진 경험과 노하우의 현장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큰 지원금이 없어서 내가 대출 5천만 원을 받아 시작했다. 중견연극인들의 힘 찾아주고, 참여하는 젊은 친구들에겐 중년연극인의 연기과정을 배우게 하고 스태프도 시켜가며 중년연극인들은 자리를 잡고, 후배도 양성해가며 사라져 가는 소극장 연극을 부활시키고자 만들었다.

이번에 좋은 것이 공연 후 설문지를 받았는데, 10대부터 60대까지 다 좋아했다. 중년층이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없었다. '바냐 아저씨' 당시엔 여태 외국과 우리나라가 제시한 '바냐'의 무거운 삶을 빼고 엄청나게 재밌게 만들었다. 진중함과 재미, 대중성과 예술성 등 모두가 만족했다. 중장년층 모두 누릴 수 있는 연극에 대해 우리 연기자만큼 관객도 좋아해서 기분이 좋았다. 햇수론 3년이고 작품은 두 편 올렸다.

근데 '나의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아까운 주변인이 제자리를 못 찾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 보다 사랑받았고, 관객을 모았고, 누릴 걸 다 누렸고, 내가 돌려줄 게 무엇인지 생각할 때 마지막 삶의 방향은 이쪽이라고 생각했다.

   
▲ 연극 '바냐 아저씨' 포스터

40년간 연극배우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ㄴ 연극은 실수로 시작했다. 워낙 내가 내성적이고, 세상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말도 없고 그런 애인데, 대학 졸업하기 전에 대학 교수님이 에너지가 느껴지셨나 보다. "너 졸업하면 뭐할래?" 하다가 운명처럼 "연극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배우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영화배우는 험난해서 고상한 말을 찾다 보니 연극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극단 현대로 가게 됐다.

들어가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처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며 배웠는데, 돌아가신 연출가인 김상열 선생님 만나서 제대로 된 교육과 연극 정신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연극은 나에게 세속적인 종교가 됐다. 연극이 시키고 원하는 것만 했다. 일상인 먹고, 자고, 사람 만나는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종교가 지켜왔다. 내 안에 쌓아있는 분노가 어린 시절부터 있었고, 나는 왜 잘못 살아가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모든 철학 서적을 읽고, 질문하고, 파헤쳤지만 거기에도 답이 없었다.

그사이 실수로 연극을 시작했는데, 이번엔 실수로 주인공을 맡게 됐다. 주인공 언니가 아파서 공연을 못해, 열심히 구경한 나에게 이 대신 잇몸으로 맡게 해주셨다. 무대에 서면서 내림굿을 받는 기분이었다. 첫날 무대에 서는데 무대 사방에 온갖 것들이 날리고,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무대는 거짓말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을 화답해주는 공간이었다.

세상은 온갖 공해로 가득 차 있는데, 무대만큼은 사람이 살기에 정직한 한만큼의 대가가 있는 무공해였다. 연극이 아니면 나는 미쳤거나, 자살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춘기에 열병을 앓았고, 세상과 소통을 위해 고통받았다. 연극을 위해 40대까지만 해도 연극 연습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15년 만에 자기 얼굴을 쳐다봐 줬다고 펄쩍 뛰고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집-연습실-극장 말곤 삶도 없었다. 연극이라는 종교에 정진하고 살았다.

잠시 분위기를 돌려보려 한다. 60대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외모인데, 어떻게 관리를 하고 있나?

ㄴ 이상하게 역할을 맡으면, 신체적인 리듬이나 생리가 다 바뀌었다. 저번에 30대 역할을 맡으니 젊어졌다. 무대에서 나보고 다 30대라고 할 정도였다. 특이한 체질이었다. 어떤 역할에 몰입하면 몸짓이 달라지고 그랬다. 연극에 충실했고 전력투구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바냐 아저씨' 때문에 한 달 동안 6kg을 뺐다. 1주일에 다섯 번 공연하니까, 마인드컨트롤과 끊임없는 운동이 필요했다. 연극이 그렇다. 끊임없이 반복해가며 정화가 된다고 해야 하나. 무대의 나태함이 정화되며 고결하다거나 영혼이 맑아진다. 그래서 무대를 못 떠난다. 하루하루 겸손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열정을 품게 된다. 무대에선 에너지가 바로 채워진다. 이게 긍정의 힘이 아닐까 싶다.

김지숙 배우를 있게 한 작품을 말해 달라.

ㄴ 첫 번째로 1983년 '아가씨와 건달들'이 있다. 1984년 백상예술상 신인상 등 대중적으로 상을 처음 받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1991년에 한 '넌센스'가 있다. 5명의 수녀가 있는데, 정신나간 수녀 '엠네지아'를 맡아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후배들이 다들 내 흉내를 냈다. 그래서 일부러 녹화한다는 걸 알고 엉뚱한 연기까지 했는데, 그거마저도 따라 했었다.

세 번째는 1985년에 한 '뜨거운 바다'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재일교포 천재연출가인 김봉웅 연출이 한 작품이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내 연기와 만난 후의 연기가 무척 다르다. 그때 최주봉, 강태기, 전무송 배우와 내가 했다. 한국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남녀배우를 구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당시 연극에 틀만 있었고, 대본이 없었다. 그 배우의 표정, 연기, 가진 느낌으로 대사를 만들어서 끼워 맞춘 연극이었다.

세 선배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정해진 대본으로 외워서 올리는 사람인데, 적응 못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몰입해서 거르고 걸러서 엑기스를 보여주는 스타일인데 끊임없이 바뀌니까 연극을 선택한 것에 대해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연극이 무엇이고, 이것이 내 삶이냐는 생각도 했다. 에너지와 몰입에 대해서만 연기했다면, 왜 배우가 뭔가 비우고 채워야 하는가, 일상에서 깨어나,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느냐는 점에 메소드 연기 등 온갖 훈련을 다 했다.

그때 쯤에 서교동에 배우 트레이닝하는 훈련소를 만들었다. 배우도 훈련해야 한다. 최종원 선배부터 온갖 배우들이 연습했다. 이전까지 귀엽고 예쁜 '신데렐라' 같은 사랑스러운 연기를 했는데, 남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폭발적인 연기로 끊임없는 변신을 했다. 마치 무당이 영매가 되어 이신 저신 다 불러모으는 그런 에너지로 올리게 됐다.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 2005년 '로젤' 공연 당시 포스터
네 번째는 1991년부터 공연한 모노드라마 '로젤'이다. 사이코드라마적 요소로 심리해부를 했고, 최강지 연출가가 작품 맡았었다. 내가 번안해서 한국식으로 고쳐서 했는데, 3,300회 공연됐다. 천만 이상의 관객이 봤으니 기록 남겨서 올렸으면,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다. 어느 모노드라마가 그렇게 했겠는가? 몸과 마음을 다 '로젤'에게 빼앗겼다. 그것으로 돈 벌어, 극단도 하고, 집도 샀다. 한 작품을 100번 본 관객도 있었다. 내 주위 사람도 20번을 봤다고 했다.

끝으로 1992년 '당신의 침묵'이다. 박동과 배우, 김광림 연출과 함께한 2인극이다. 첫 장면에 도끼를 들고, 머리를 풀고 나와 이상한 걸음으로 그 도끼를 내려찍는데 졸도한 관객도 있었다. 병원에서 '싸이코'들을 만났는데, 환자 두 명의 이야기를 엮은 것이 '당신의 침묵'이었다. 이런 작품들이 나를 지켜주고, 성숙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배우 김지숙에게 영향을 준 연출가는?

ㄴ 김봉웅 씨다. 이 전과 이후의 연기가 다르다. 자연스럽게 집중하는 에너지로 연기했다면, 그 작품 만나고 나서 내 안의 무한한 잠재력을 느끼게 했다. 그 인물화 되는 과정으로 나는 누구에게 안져라고 했는데 작품 만나고 '나에게 이런 에너지와 성향이 있었나'를 알게 됐다. 그 사람은 배우에게 던진다. 자기 고통은 알아서 느껴라 하면서 안 도와준다. 함께했던 선배들이 다 괴로워했다. 어떻게든 그 방향을 찾아갔다.

배우 김지숙의 연기관과 교육관은 무엇인가?

ㄴ 연기는 되게 쉽다. 누구나 할 수 있다. 글만 읽으면 다 한다. 다만 배우는 아무나 할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연기를 가르쳐본 적이 없다. 탐구와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획일적으로 해 본 적이 없다. 성균관대 교수로 있을 때, 개인의 장단점이 다르니 획일적인 주입을 준 적이 없었다. 공부를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게 어불성설이다. 답이 아닌 걸 찾게 해줘야 한다.

최민식과 송강호가 왜 최고겠는가. 자기식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짱과 철학, 훈련을 가르쳐줘야 한다. 첫 수업에 들어가면, 내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네 내면에 무엇이 있고, 알고 있는가부터 시작해 그 아이들의 배경지식을 알려고 한다. 그다음에 가장 힘들어하는 것부터 풀어준다. 마음의 문을 열고, 연기하기 위한 용기와 가능성을 일깨워준다. 모든 연기는 부수적이다. 자기의 자존감을 찾게 해준다. 잘못되고 왜곡된 인성을 되찾아 주려고 한다. 소리, 습관, 외모 등 어떤 창의력이 있는지 하나하나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그런 놀이를 학교에서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금도 스승의 날에 핸드폰이지만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고, 문제가 있으면 찾아와준다. 내가 달변가가 아닌데, 그들이 느낀 벽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선배 같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가 싶다. 큰 힘이 됐다고 하는데, 그 힘은 별것이 아니다. 획일적인 의미로 수업하지 않았고, 진정을 다 해 그 아이의 문제, 내면, 탐구와 발견을 함께했다. 그게 옳고, 그래야만 한다.

내가 수업하면 애들이 목표를 작게 잡는다. 1학기엔 '소리가 벽의 반까지 가는 목표'를 잡겠다거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해보겠다는 목표를 잡기 시작한다. 스텝 바이 스텝이라고 본다. 보통 배우들이 스스로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고, '성실한 배우'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배우가 어딨는가. 그런 건 관객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송강호 같은 배우가 표정을 클로즈업할 때 관객이 빨려 들어간다. 신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연기의 기본이고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 지난 1월에 열린 연극 '바냐 아저씨' 제작발표회에서 김지숙 배우가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그런데도 힘든 시기가 있었을 것 같다.

ㄴ 안 힘들었던 적이 없다. 내가 불면증이 있었던 큰 이유는 자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인생의 순간에 찾아야 할 게 있고, 해야 할 게 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늘 힘들었다. 하지만 늘 행복했다고 말하면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도 기꺼이 행복하게 받아들여진다.

세속적인 기준의 슬럼프도 있었다. 정점을 찍어봤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자부심도 생겨났다. 그리고 사회활동도 많이 했다. 공연수익을 여기저기 기부도 하고, 어두운 데 가서 손도 내밀고 했다. 받은 것만큼 돌려주려고 했다. 약 10년 전엔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100차례 연극도 했었다. 내가 옳다고 한 것은 머뭇거리거나 굴하지 않고,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주저함이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번에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 경기를 보며, 어차피 '까고 치는 포커'라 생각해 질 것으로 생각해 이세돌을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몸짓, 자세에 하나하나 감정 이입이 되어 때로는 끌어 오르며, 동시에 안타까워하면서 경기를 봤다. 최악의 조건 아래 담담하지만, 뚜벅뚜벅 자기 길을 살아갈 때 느끼는 성취욕은 아는 사람만 안다. 그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나도 저렇게 살았겠느냐고 감히 생각해본다.

최근 '바냐 아저씨'에 출연했는데, 출연 계획은 있었나?

ㄴ 처음엔 출연할 생각이 없었다. 제작과 예술감독만 하려고 했다. 이윤택 연출이 공연 한 달 앞두고 나보고 하라고 했다. 처음부터 날 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제작, 예술감독, 출연까지 해서 아주 힘들었다. 30명 가까운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배우로는 되게 고통스러웠다.

처음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을 했다. 주인공을 맞춰야 하니 한계가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완성도 있어서 매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메시지를 카톡으로 날렸다. 주인공, 조연 사이의 편견을 주인공만 했으니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같이 만들어가는 것인데라는 생각을, 공연 초반엔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나중엔 진짜 연극 정신에 스스로 감동하여 행복한 경험을 했다. 앙코르 공연은 할 거다. 전용극장 만들고 싶을 정도로 좋은 공연이었다.

   
▲ 연극 '바냐 아저씨'의 한 장면. ⓒ SCN

유명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이 있는데, 욕심은 없는가?

ㄴ 그런 거 없어도 배우는 배우로 세상을 울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이자 직업이라고 본다. 부수적인 것에 신경을 쓰면 본질을 놓칠 것이다. 뭘 바라보는 거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후반전인데 무언가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이 있다. 겸손하지 못한 생각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지 않는 길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향후 계획을 말해 달라.

ㄴ 에너지를 주변에 나눠주고 필요할 때 쓰는, 삶과 무대 모두를 지혜롭게 쓸 수 있는 진짜 연륜이 생긴 것 같아 요즘 너무 행복하다. 언제든지 비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서, 스스로 대견하고 행복하다. 다음 작품은 최근에 한 30대 역과는 너무 다른, 좋은 휴먼드라마 할 것이다. 사실 100부작 드라마가 들어와서 고민을 많이 했다. 드라마로 돈 벌 것인가, 연극으로 한 회 출연료만 받고 나머지 드라마 99회 출연료를 포기할 것인가였는데 연극을 했다. 그 점에 대견했다.

TV 드라마를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연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을 받아가면서 연극을 하는 건 두 번 다시 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에 확신이 생겼다. 서두르지 말자. 많은 걸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한 번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5월에 공연 준비 중이고, 그다음에 모노드라마 '로젤'을 다시 해보고 싶다. '로젤'이 여러 배우에게 연습을 시켜봤는데, 다들 포기했다. 그 연극은 여배우가 해 볼 만하다. 드라마틱하면서 관객을 울렸다 웃겼다 하며 세상 하고 싶은 말 다한다. 굉장히 좋은 작품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최고예술가 100인이라는 말에 걸맞은 숨어있는 고수들을 발굴해내는 그러한 포지션을 지켜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갇혀있는 마음을 열고, 한마음으로 일깨워줄 수 있는 장인들을 소개해주는 칼럼이 됐으면 좋겠다. 송구스럽게 추천해줘서 감사하긴 하나,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집 안이 잘되려면 부모가 건강해야 하듯이, 나라의 뿌리가 되는 것은 문화다.

그 문화의 기초예술이자 종합예술인 연극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영화계를 살리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송강호, 최민식 등 연극 무대에서 연기한 배우들이 영화를 살리고 있다. 그 뿌리는 연극이다. 부모 없이 자식이 없는 것처럼, 상업예술이 잘 되려면 기초예술인 종합예술 연극을 살려줘야 한다.

국가적 정책으로 지켜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예술의 중요성을 알고, 이바지하고, 그러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이런 칼럼이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어떠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무엇을 지키고 말하려고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연극을 부활시키고 지켜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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