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제자들에게 '네 마음속에 그리움, 사랑, 아픔이 없다면 연극 오늘로 그만둬라'고 하지. 그것이 연극의 원천이야. 니체의 '고통과 고난이 없다면, 인생은 없다'는 말처럼 연극은 고통과 고뇌를 안고 가, 그것을 인식시켜주는 작업이니까."

인터뷰를 통해 느낀 그의 키워드는 외로움이었다. 1944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연출가 최치림은 어린 시절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로움 속에서 살았고, 그 계기로 고등학교 때 본 연극에 감명을 받아 연극 연출의 길로 빠지게 됐다. 그 후 1968년인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 무렵 극단 자유에 들어가 본격적인 극단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2년 '프로랑스는 어디에'(1971년)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연출상을 받으며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 더 배움이 필요하다고 느낀 최치림 연출은 미국 유학을 결정한다. 뉴욕대학교의 리처드 셰크너 교수의 배움 아래 그는 한 단계 성장한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국립극단 예술감독, 세계연극올림픽한국위원회 회장(국제위원),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는 2014년 자신이 본격적인 연극 무대를 할 수 있게 도와준 극단 자유의 대표를 맡게 됐다. 그리고 2016년 극단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연극들을 준비 또는 공연 중이다. 오는 24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50주년 기념 공연의 시작인 '그 여자 사람잡네'를 연출했고, 앞으로 다양한 작품을 연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이야기와 함께 연극 연출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 연극 연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그의 연극연출 인생 50년 이야기를 들어본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항상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어왔지. 작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끝이 없는 것 같아. 아까 뉴스를 보니 은하계 바깥에 행성 다섯 개가 더 발견됐다고 해서, 낮에 밥 먹으면서 "우주가 무한대인 것 같다. 예술의 세계 같다. 끝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들어가도 끝이 없다"는 말을 했어. 작품을 항상 새 작품을 잡아도 그렇고, 이번처럼 옛날에 했던 작품을 똑같이 잡아도 또 달라.

김동길 선생님이 '나이듦이 고맙다'라는 책도 최근에 썼어. 나이가 드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 무슨 말이냐면, 옛날에 한 작품을 다시 들춰보면 옛날에 안 보이는 것들이 보여. 작품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 보이는 거야. 젊을 때 안 보였던 것들이 인생 경험을 쌓으니 보이는 거야. 내가 옛날에 그 젊을 때, 이걸 알고 연출했느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그래서 이번 작품을 하면서 배우들에게 상당히 편안하게 지도했어. 코미디를 끌어내려면 배우들의 잠재력을 끌어내야 하거든. 일부 배우들이 막 장난을 치면 "왜 못 치게 하지 않느냐"고 몇몇 배우들이 와서 그래. 그러면 "나는 브레이크 걸면 안 돼. 아직 브레이크를 걸 때가 아니야"라고 해. 희극은 특히 그래. 배우가 장난을 안 치고 연출이 장난을 치려고 하면 배가 거꾸로 가는 거야. 그리고 배우가 어느 단계까지 장난을 치면, 공연 날짜를 계산해서 오늘부터는 장난을 못 치게 정리를 해야 하는 때가 와. 그럼 그때부터 내가 조각가가 작품을 마무리하듯이 "그건 좀 가라앉혀라, 그건 좀 빼라"라고 해주면 돼. 자꾸 연기자보고 하지 말라고 하면, 연기자의 창의력이 다 죽어버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게, 애를 키울 때 "옆집 애는 구구단을 외우는데, 너는 왜 못 외우느냐"라고 구박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구구단 그런 것은 언젠가 다 외운다"고 신경을 안 쓰는 부모가 있어. 나는 후자 쪽이야. 구구단 못 외우는 사람이 누가 있어. 누구는 좀 빨리 외우고, 늦게 외우는 것뿐이지. 배우들도 작품에 빨리 들어가는 사람이고, 늦게 가는 사람 다 있는 거야. 연출은 무한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해. 그러니 나이를 먹다 보면 옛날에 안 보이는 것이 보이더라고. 1971년 했을 때보다 인물의 깊이는 더 나올 거야.

아무튼 100인에 선정되면서 나 자신을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줘서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실망 주는 작품을 발표하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도 느끼게 하는 순간인 것 같아.

   
 

연극 연출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ㄴ 아버지가 일본 무사시노 공대 토목과 출신이셨고, 의사들이 많은 집안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건축을 하거나 의사를 할 줄 알았지. 참고로 나는 경남 진주 출신이고, 학교는 양정고를 나왔어. 더 과거 이야기를 하자면,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엔 진주 최고 미녀와 연애를 했지. 결혼해달라고 하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반대를 엄청나게 한 거야. 연애결혼을 당시에 한다고 하니 집안에서 난리가 난 거였지. 그래서 결국 아버지가 집을 뛰쳐나와 어머니와 그냥 결혼식을 한 거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소문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느리는 보기 싫은데 손자는 보고 싶으니 사람을 시켜서 훔쳐오라고 한 거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미쳐 할 거 아니야. 우리 어머니가 사람을 사서 나를 훔쳐갔어. 마치 축구공처럼 왔다 갔다 한 거야. 그러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얘 도저히 안 되겠다. 손자가 예쁘니 받아들이자 해서 받아들인 거야. 아버지는 토목건축을 가니 외국에도 공사하러 가는데, 며느리의 설움이 시작된 거야. 자기가 선택한 며느리가 아니니, 아버지 없을 땐 학대를 가한 거지. 이래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는데, 여동생과 같이 나간 거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 자랐고. 나중에 아버지가 와서 보니 엉망이 되어 있거든. 그래서 찾으려 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외로움 속에서 산 거야. 어머니는 집에 나가고, 아버지는 공사장에 가니. 하숙집, 고모 집 등에서 학교에 다니니 할머니가 죄책감을 느끼신 것 같았어. 며느리를 학대하는 것이 아닌 데라는 생각에 나를 껴안고 키우게 된 거야. 그러다 보니 할머니한테 내가 이중감정이 들게 되더라고. 증오의 대상이자 사랑의 대상인거지. 할머니 때문에 외롭고 불행해졌는데, 나를 제일 사랑해주시니 사랑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내 인생철학과 교육엔 독실한 불교 신자셨던 할머니의 불교 신념이 다 들었더라고.

그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4년이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이었어. 행사 준비 기간으로 한국의 동인제 극단(편집자 주 :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 출자와 공동 운영의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극단)이 6개가 있었는데,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축제를 한 거야. 연극 축제를 보니 드라마가 정말 재밌었어. 나도 저걸 해보면 안 돼나라는 생각에 하숙집 달력에 감독이라는 말을 썼어. 어느 날 아버지 오시니 "감독이 뭐냐"고 물었지. "아버지, 토목건축과 가라고 하시잖아요. 토목건축과 가면 현장감독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답하니 "그럼 너 의과대학은 포기한 거네"라고 말씀하신 거야.

   
▲ 최치림 연출이 '그 여자 사람잡네' 연습실에서 대본을 보고 있다.
중앙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과 입시공고가 났는데, 10등 안에 들으면 등록금이 면제야. "아, 내가 저길 들어가야겠다"했는데, 다행히 거기로 들어갔어. 당시 문리대 10등 안에 든 사람이 KBS 드라마국장, 중앙대 교수했던 최상식, MBC 편성기획부장했던 오명환, KBS 보도국장했던 이성영, 그리고 나까지 연극영화과 출신이었지. 10명 중 4명이나 나온 거야. 결국, 아버지 속이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는데 대학교 3학년 때 들통이 나버린 거야.

그때까진 속였는데, 나중에 아버지에게 혼이 잔뜩 났지. "저 놈은 집 안에 없는 놈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누가 내 등록금을 대줬느냐고 물었지. 사촌 누님이랑 작은아버지가 비밀도 지켜주면서 지원도 해주신 덕에 가능했었지. 세월이 흘러서 1971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에서 '프로랑스는 어디에'로 내가 신인연출상을 받은 거야. 세종문화회관에서 했고 TV로 한 거야. 아버지가 그걸 보시고 "저 놈은 집 안에 없는 놈이다"라고 해서 TV를 끈 거 아니야. (웃음) 그래도 그 뒤에 자꾸 신문에도 내 이름이 나오니, 아버지가 "저 새끼가 내 아들"이라고 어딜 가더라도 자랑을 하신 거야. 그러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날 용서해주셨어.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드라마(연극)를 내가 하게 된 것은 외로움 때문에 한 거야. 복싱도 외로움 때문에 했고.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내가 복싱을 했거든. 아버지가 무술을 좋아해서, 6살 때부터 권투를 가르쳐주셨지. 대학교 올라가서 작품을 선배들과 만들게 되니 복싱을 안 한 거야. 복싱했던 정열을 드라마 쪽으로 옮겨 온 거야. 1년에 8편도 하고 그랬어.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대, 연세대 등 다양했지.

연출상을 받을 때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PD로 오라는 프러포즈가 많았어. MBC에서 한 3년 동안 제안이 왔는데, 세 번째 제안이 올 때는 갈까 말까 많이 흔들렸어. 그런데 내 앞서 간 사람들이 전부 다 연극연출을 못하고 안 돌아오더라고. 다들 갈 때는 돌아온다고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거야. 그래서 고민을 엄청나게 하고 안가겠다고 했어. 그게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어. (후회는 안 되나?) 후회는 안 해. 그래서 지금 뉴욕까지 가서 공부도 했고, 대학교수 생활도 하는 외통수를 걸어온 거지.

   
 
극단 자유의 50주년 기념 작품으로 '그 여자 사람잡네'를 연출했다.

ㄴ 1968년인 대학교 3학년일 때 극단 자유에 들어갔어. 그전까지는 극단 민중에 있었어. 중앙대 교수님들이었던 김정옥 선생님과 양광남 선생님들이 같이 운영하셨지. 김정옥 교수님이 교수회관에서 나를 잠깐 오라고 그러시더니, 연출을 맡으셨던 양광남 교수님이 계신데도 극단 자유의 조연출 좀 하라고 하셨던 거야. 이게 기회가 돼서 대학교 3학년 후반 때 조연출을 맡은 거야. 나이도 어릴 때인데 운이 좋은 거지.

그러다 졸업반 되던 해에 영화사 쪽에서 나한테 계속 유혹이 왔어. 배우 강신성일 씨가 청춘물로 엄앵란 씨 출연 작품의 영화감독을 맡게 된 거야. 본인이 메가폰을 잡는데, 감독 경험이 없으니까 나한테 옆에서 조언을 조금 해달래. 그래서 내가 엄앵란 씨, 강신성일 씨 이태원 집에 몇 차례 갔어. 이게 소문이 새어나간 거야. 그래서 김정옥 선생님은 "저놈이 영화판으로 튀려 하나" 생각을 했대. 그때는 극단 자유가 아니고, 극단 자유극장이야. 그래서 간선회의를 열었는데, 최치림한테 빨리 연출 작품을 안 주면 영화판에 갈지도 모르니까 빨리 데뷔를 시키자고 했대.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1971년 국립극장에서 박량원 작 '그물안의 여인들'을 연출했는데, 동아일보 장편 공모 당선작이야. 그때 데뷔를 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 전역 후 돌아온 전무송 씨가 자유극장 단원이 아닌데도 내가 주인공을 맡기기도 했지.

두 번째로 작업한 작품이 바로 로벨 토마의 '그 여자 사람잡네'(1971년)야. 그때는 김정옥 선생님이 제목을 바꿨어. 주인공 이름이 '프로랑스'인데, '프로랑스'가 실종되는 이야기거든. 그래서 '프로랑스는 어디에'로 제목을 바꿨어. 당시 자유 대표였던 이병복 선생님께서 번역하셨어. 돌아가신 추송웅 씨, 지금 살아계시는 권성덕 씨가 젊은 '다니엘' 남편 역을 했고, 이번에 '벨턴' 역을 맡은 채진희 씨가 '프로랑스' 역을 맡았어. 박정자 씨가 정신과 의사 '벨턴' 역을 맡았지. 드라마센터에서 그 당시 5일만 하면 끝인데, 그 추운 날 2주간을 연장 공연했지. 당시로는 오래 한 거야.

작품이 끝나고, 다음 해 1월 한국연극영화예술상에서 내가 신인연출상을 받은 거야. 끝나고 리셉션을 할 때, 같이 작업을 못 했던 강신성일 씨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로 신인감독상을 받아서 만났어. 이 작품이 나한테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코미디를 잘하는 추송웅 씨와 작업하면서 상도 받게 됐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이 작품 관련해서 이야기하면 1978년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김영일 씨를 초청해서 다시 연출했어. 그때는 '프로랑스' 역을 박정자 씨가 맡았어. 박정자 씨가 좀 쎄잖아. 그래서 제목을 '프로랑스는 어디에'에서 '그 여자 사람잡네'로 바꿨어. 다들 좋다고 하더라고. 장건일 씨가 형사를 맡았고, 1971년 내가 연출했을 때 '신부'를 맡았던 오영수 씨가 젊은 '다니엘' 남편 역을 했어. 소문을 들어보니 한 35일간 공연을 했는데, 하루에 두번 씩하니까 배우들이 쓰러지니 박정자 씨도 죽는 줄 알았다는 거야. 배우들이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더라고. 한 번만 해도 힘든걸, 하루에 두 번씩 하니까 배우들이 무대에서 뻗는 거야. 장건일 씨가 일찍 죽은 것도 이 작품 때문이라는 설도 있어. 박정자 씨는 간혹가다 이 작품 이야기하면 자기 그때 너무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래도 관객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대.

이제 세월이 흘렀잖아. 내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도 하고 국립극단 예술감독 하고,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도 했는데, 그 기간에 이병복 선생님과 김정옥 선생님이 나보고 극단 자유 대표를 맡으라고 하셨어. 우리는 더 늙어서 못 맡는다고 하셨지. 그러다 2013년 6월 임기를 마치고 나니 이제는 맡을 수 있지 않으냐고 두 선생님이 계속 말해주시니, 이제는 운명인 것 같다고 생각해 수락했지.

극단이 이제 50년 다 되어가는데, 대한민국 극단이 다들 그러하듯이 제대로 된 연습실, 사무실, 극장이 없었어. 그래서 여의도에 사무실을 하나 차렸어.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 '세계연극올림픽(Theatre Olympics)'이 열렸지. 우리나라에선 2010년에 서울에서 열렸고, 내가 예술감독을 했잖아. 내가 국제극예술협회 위원이라 작품을 출품해야 해서, 김정옥 선생님이 쓰신 '노을을 날아가는 새들'을 완전히 개작한 거야.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서 다시 썼지. 이름을 바꿔서 김정옥 작의 '꽃, 물 그리고 바람의 노래'라는 작품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공연하고 11월에 올림픽에 나간 거지.

그렇게 올려놓고 보니 올해가 극단 자유의 50주년인 거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의논을 하니, 요즘에 신나게 웃어가며 볼만한 연극이 없는데, 내가 연출했던 '프로랑스는 어디에'가 재밌으니 다시 하자고 한 거야. 이 작품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수락했지. 제목도 '그 여자 사람잡네'로 바꿨었어. 친숙해서 꼭 바꿀 필요가 없겠더라고. 그리고 로벨 토마의 원제도 '한 외톨이, 사내를 잡는 함정'이야. 총 제목이 세 번 바뀐 거지. 이어서 김정옥 선생님과 이야기해서 로벨 토마의 시리즈로 50주년을 채우는 것으로 했지. 우리 극단이 총 3번을 했는데, 그걸 엮어서 1탄이 '그 여자 사람잡네'고 2탄이 1968년에 했던 '살인환상곡', 3탄이 1987년에 했던 '제2의 침대'야.

   
▲ 최치림 연출이 '그 여자 사람잡네'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유학 전, 유학 후, 그리고 현재까지 작품의 연출 방향이나 성격을 들려 달라.

ㄴ 1971년 '프로랑스는 어디에' 끝나고 세 번째 연출한 작품이 '세빌리아의 이발사'(1972년)였어. 이게 제9회 동아연극상 대상을 받았어. 나는 연출상을 받지 못했어.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나이가 너무 어린놈이라서 쟤를 주면 간덩이가 커진다. 더 얼마든지 받을 기회가 있으니, 어릴 때부터 주지 말자"라는 발언을 누가 해서 대상만 주고 연출상을 뺐더라는 거야. 그게 '세빌리아의 이발사' 한국 초연 작품이었지.

그러다 10년 연출을 하다 보니 내가 만든 작품도 내 눈에는 재미가 없고, 남이 만든 건 더 재미가 없어 보이는 거야. 연극을 제작하는 방식이 똑같잖아. 책 읽기, 작가 연구하는 모든 과정이 어떤 극단에서 뭘 만들든 비슷했거든. '세빌리아의 이발사'라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작품도 있는데, 왜 이렇게 한국연극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는가? 이걸 계속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어느 날 카페에서 하고 있는데, 무대미술가이신 이병복 선생님의 남편이신 권옥연 화가가 오시길래 하나를 여쭤봤지.

"평생 화가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회의에 사로잡혀본 적이 없으십니까?"라고 물어봤지. 그러다 권옥연 선생님이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아, 최치림 씨가 이제는 여기까지 왔나?" 그러시는 거야. 선생님은 평생 화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회의의 연속이라는 거야.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아무리 살아있는 것을 그려도 죽어있잖아. 화폭 안에 갇혀있고. 그러면서 최치림 씨가 연출하면, 평생 주기적으로 그런 것이 올 테니 각오를 하라는 거야.

그랬던 찰나에 뉴욕대학교의 리처드 셰크너 교수가 한국에 와서 드라마센터에서 그분의 '환경연극(Environmental Theater, 셰크너가 창안한 연극이론. 배우와 관객이 같은 환경 속에서 상호교류하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문제로 삼는다)' 강연을 했다고. 코뮤니타스(Communitas, 집단에서 경계적 상황을 체험한 자들이 공유하는 친밀한 일체감) 등을 강의하면서 16mm 찍어준 걸 보니까 우리가 하는 연극과 완전히 다른 거야. '디오니소스 69'는 연극 끝나면 뒷문을 때려 부수고, 맨해튼 거리를 행진하는 거야.

   
 
그러면서 "안 되겠다.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다른 연극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한 거야. 결심하면서, 유학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집에 있을 때, 영어단어, 구문 등을 외우려고 조그마한 수첩에다가 적어놨어. 항상 지갑 안엔 수첩이 들어 있어서 밖에서 연출하거나 다방에서 사람 만날 때, 시간만 나면 그걸 꺼내서 보는 거야. 남들은 수첩 보고 있는 거로 알겠지만, 나는 영어 공부하고 있는 거야. 그런 수첩이 여러 권 쌓였지. 지금도 뉴욕 집에 가면 그 수첩이 있어. 버리기가 뭐하더라고.

그러다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예술인 해외연수 프로그램 3기생으로 선발된 거야. 돌아가신 김상렬 극작가, 조병진 조명감독, 그리고 내가 있었지. 만오천 불을 받아서 미국 갔지. 나는 공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가자마자 셰크너 교수를 찾아간 거야. 셰크너 교수가 연출한 포트폴리오를 다 들고 갔어. 보시더니 연출을 이렇게 많이 했는데, 여기서 강의를 하지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묻기에 "아니다. 내가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셰크너 교수가 영어 시험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가자마자 뉴욕대학교 어학원에서 시험을 봤거든. 다행히 운이 좋게 성적이 잘 나왔지. 교수가 다음 학기 들어와서 공부해도 된다고 허락을 해줬지. 입학하고 보니, 커리큘럼의 60%가 문화인류학 과목이야. 셰크너 교수 수업에 들어오니, 문화인류학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하더라고. 학생이 30명 중 앉아있는데 내가 손을 드니까 교수가 "초이(Choi), 너는 손 내려라. 너는 우리 학교 정식학생으로 입학했으니 내가 쫓아낼 자격이 없다. 그냥 수업 들어라. 그 대신 고생 많이 할 것이다"라고 했어. 그러더니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들은 문화인류학 공부를 하고 오라고 내보냈지.

   
▲ 최치림 연출이 연기 디렉션을 하고 있다.

그때부터 내 연극연출 인생의 1기를 마무리한 거지. 1기는 10년 동안 한국에서 동인제 극단 시대였고. 그때 연출 개념은 다 똑같았어. 연출 선생님 밑의 조연출로 들어가서 몇 년간 고생해서 똑똑한 것을 인정받으면 데뷔작 주고, 데뷔작 잘하면 그 이후 두세 번째 작품 받는 거지. 나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 쪽으로 도망간다는 소문이 나서 동년배보다 4년 정도 앞서 데뷔를 한 거야. 그런데 제작 과정이 다 비슷하니까. '햄릿'을 한다고 하면 이 극단, 저 극단 비슷한 거야.

뉴욕은 실험연극의 메카잖아. 연극학보다 공연학이 더 세니까. 여기서 새로운 연극관에 눈이 뜬 거야. 석사 끝내고, 박사과정을 했지. 유학생이 10여 명이 넘는데 박사과정 수락받은 게 나밖에 없어. 운 좋게 박사과정 들어가서 코스 다 끝내고 박사 논문 쓰다가 중앙대 교수 발령받아서 넘어왔지. 한국에 오자마자 실험극 과목을 최초로 만들었어. 연극사 대신 공연사 과목을 집어넣고, 실험극 이론 과목을 집어넣고, 일상생활의 공연학을 집어넣은 데 이건 아직도 다른 대학에 없더라고.

연출도 기초연출실습이 있고 상급연출실습이 있어. 그다음에 실험극 연출실습이 있어. 상급연출실습에선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해체하는 걸 가르쳤지. 극작가의 작품을 동시대 작품으로 바꾸는 방법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그다음 실험극 연출을 시켰지. 그렇게 10년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실험극 축제를 하나 한국에서 하자고 해서 나온 것이 1999년 '서울변방연극제'야. 내가 10년 예술감독 해주고,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나왔거든. 임인자, 이경성 연출이 뒤를 이었지.

중앙대학교 교수 생활을 하면서 매년 내가 연출을 했어. 연출 연보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평균 아무리 못해도 내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 두 편은 넘어. 발표할 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실습작품이라고는 안 했어. 뉴욕대학교에서 메소드를 가져온 거야. 셰크너 교수의 '디오니소스 69', '리어', '맥베스', '코뮤니타스' 작품들이 뉴욕대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했지만, 뉴욕대학교 학생 작품이 아닌 퍼포먼스 그룹 작품으로 발표했다고. 지도교사 셰크너가 아닌 연출가 셰크너로, 학생 배우여도 배우라는 이름으로 나가니, 미국의 저명한 오비상을 받는 거지.

   
 

교수가 아닌 최치림 연출, 박동우 무대감독, 출연 아무개 이렇게 해서 발표를 했지. 교수생활을 20년 넘게 했으니 얼마나 내가 작품을 많이 했겠어. 그중 나온 것이 함세덕 작가의 '동승'이었어. 그걸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극 공연했었지. 그게 일종의 연극연출 인생 2기였지. 대학 교수생활을 하다 보니 극단활동을 못 하잖아. 그러나 내가 연출작업을 하는데, 유학 가기 전과 다르게 텍스트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해체했지. 함세덕 작가의 '동승'만 하더라도 다른 연출가가 했지만, 아무리 봐도 재미가 없던 거야. 저게 왜 저렇게 재미가 없는가 분석했더니, 함세덕 선생님의 무대 지시한 것을 그대로 하니까 재미가 없던 거야.

무대 지시를 보면 절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이고, 절간 기와처마나 댕기가 주렁주렁 달린 것이 있는 등 사실적 묘사를 하니 환상이 다 죽어버리는 거야. '도념'의 꿈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각색했지. 연극과 동시에 영상으로 꾸며봤어. 내가 어머니를 어릴 때 항상 그리워 했기 때문에, '도념'이 어머니 때문에 눈이 오는 날 절을 나가잖아. 그런데 연극에 나오는 눈은 너무나 낭만적인 눈이야. 그게 아니거든. 그 눈보라가 몰아쳐서 '도념'이 죽을지도 모르는 혹한의 눈을 뚫고 나가야 하니, 박동우 무대 감독에게 "딱 나무 한 그루만 갖다 놓자. 돌계단도 환상이 깨지니 사실적이 아니면서도, 비사실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

'동승'의 중국 공연 당시 중앙희극학원 총장님이 보시고 "나한테 고백할 것이 있다"며, 통역관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연극을 보고 울어본 적이 없는데, 그 연극을 보고 자기가 처음 울었다. 교환교수로 1년만 와 있어라"했는데 아직 못 가주고 있어. 작년까지도 연락 왔는데, 대답을 못 하고 있지. 그 성과는 뉴욕에서 텍스트를 성경처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을 범하는 방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가능했지.

   
▲ '둥둥 낙랑둥' 포스터
그래서 연극연출 2기 때는 정말 내가 별것 다 연출해봤다. '삼총사', '돈키호테' 같은 대작들도 했고, 극단 중앙연극을 만들어서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2008년)를 했지. 우리 와이프가 2007년에 세상을 떠났거든. 2008년에 와이프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작품을 만들었지. 박동우 무대감독에 12인조 라이브 연주를 집어넣고, 영상을 한 30커트 쓰고, 코러스 멤버 12명 집어넣고 했는데 언젠가 한 번 더 할 거야. 그런 모든 일련의 작품은 2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여기에 2009년 대학교수 정년이 다 되었을 때,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내가 들어갔잖아. 그때 했던 것이 최인훈 선생의 '둥둥 낙랑둥'도 내 이름으로 발표했었던 작품이야. 교수 시절에 했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서 연출했지.

현재 극단 자유를 맡은 것을 3기로 할 수 있겠지. 3기의 첫 번째 작품이 '꽃, 물 그리고 바람의 노래'잖아. 김정옥 선생님이 쓰셨지만, 내 눈엔 너무 샤머니즘만 늘어놓고, 작품에 대한 포커스가 없던 것이었어. 그래서 "선생님,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다른 것은 다 때려고쳐도 좋다고 하면 하겠습니다"하니 이병복 선생님과 앉아있는 자리에서 김정옥 선생님이 "그거 네 맘대로 해.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는 사람이야"라고 답하셨어.

극단 자유 대표직을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계속 한국적 정서를 외국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올해 가을에 폴란드에서 세계연극올림픽이 있어. 거기 갈 작품이 3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의 계획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ㄴ 내가 국제적으로 연결이 많이 되어 있잖아. ITI 한국본부 회장도 하고, 세계연극올림픽 국제위원이기도 하니 내 컴퓨터에 들어가면 세계 연극 축제 초청이 굉장히 많이 와. 다 응해주지 못하고 있는데, 조건이 누구보다 좋은 것이거든. 작품도 주고, 웬만하면 다 지원을 해주더라고. 극단 자유가 우리나라에서 해외공연을 가장 많이 한 단체야. 내가 뽑아보니, 25개국 수십 개 도시를 극단 자유가 공연했더라고. 외국 사람들이 한국인 최치림이 연출했다고 하면 한국적 감성과 정서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거든. 한국적 테크닉도 그렇고. 그래서 3기는 그런 쪽으로 계속 움직이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지 않을까 싶어.

거기에 플러스를 더 하자면, 뮤지엄 씨어터(박물관극장)를 만들고 싶어. 김정옥 선생님은 '박물관 얼굴'이 있거든. 거기서 연극을 꽤 해. 이병복 선생님도 남양주에 '무의자박물관'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기와집 7채 있고, 초가집도 있고, 호수도 있고, 새로 생긴 극단 연습실도 있어. 이런 뮤지엄 씨어터를 통해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면 강의식 연기야. 항상 꿈을 꿨어.

   
 
이스라엘에 가서 감동한 게 하나 있어. 세계 각국에서 온 바이어들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이스라엘 어느 대학 강의실로 간 거야. 가서 보니까 칠판과 교탁이 있고, 노파가 한 명 앉아 계시고, 풍금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있고, 교실에 4명이 있는데 학생 역할인 배우들이야. 연극 제목이 '그날 광장에 의자는 어떤 쪽으로 향해 놓여있었나'였어. 풍금을 불으면서 할머니가 일어나 칠판에 글도 쓰고 슬라이드도 비추면서 강의를 하더라고. 그게 뭐냐면 홀로코스트였어. 나치들에게 유태인들이 대량 학살당한 아픔을 극화한 거야. 장치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그렇게 그 강의식 연극이 감동적인 거야. 숨겨놓은 배우들이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해. 넋을 잃을 정도로 끝날 때 좋았어. 나중에 어떤 배우들이냐고 물었더니 이스라엘 최고의 배우들이라는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 아픔을 너무 쉽게 잊어먹어. 또 우리나라 작품은 너무 돈만 많이 들여 하려고 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뮤지컬도 돈 많이 들이지 말고 하라고 이야기하지. 미국 가서 보니 소극장에서 100명도 안 보는 곳에서 아기자기하게 하더라고. 뮤지엄 씨어터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그냥 지나가는 들불 같은 이야기와 아픔, 잊지 말아야 하는데 잊고 있는 것을 연극 채널을 통해 만들고 국내 공연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공연해야겠다는 것이 목표야. 실험적일 수밖에 없지만 해야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연출전공으로 있으면서 제자들을 많이 기르려고 했어. 오경택, 김동현, 김성옥, 최중민, 김종우, 이경성, 배재훈 등 많아. 이들이 나와 함께 만든 것이 '서울공연예술가들의 모임'이라는 집단이었어. 내가 바깥 활동을 많이 하더니 그게 유지가 어려웠어. 걔들을 다시 모으고, 그 뒤에 나오는 연출가 학생들을 모아 연출에 있어서 새로운 한국 연극을 바꿔놓을 수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하고 있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50년이 훨씬 넘었는데, 연극 쪽 연출가를 뽑으라고 하면 10명이 제대로 안 돼. 연출가 1명이 탄생하는데 그렇게 어렵다고. 연출자 하나 만드는 게 쉬운 것이 아니야. 내가 힘이 좀 더 남아있을 때, 이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연극을 하려고 하면, 연극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 김연아가 축구선수나 연예인 만나고 다니면 훌륭한 선수가 나왔을까? 손흥민이 축구선수인데 다른 분야에 대한 친구들 만나서 돌아다니면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없었어. 그러니까 연극을 하려는 사람은 죽어도 연극 동네에서 살아야 하지. 그리고 네 마음속에 그리움, 사랑, 아픔이 없다면 연극 오늘로 그만두라고 하지. 그것이 연극의 원천이야. 니체의 '고통과 고난이 없다면 인생은 없다'는 말처럼 연극은 고통과 고뇌를 안고 가, 그것을 인식시켜주는 작업이니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연극이 너무 상업성만 추구하고 또 연극이 너무 한쪽으로 편승한 것 같아. 내가 이번에 하는 '그 여자 사람잡네' 이유도 로벨 토마라는 극작가는 연극 공부도 별로 안 한 작가야. 교육도 별로 안 받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연극을 좋아해서 옛날에 배우 출신이라 연출도 했지. 근데 이 사람은 희곡이라는 희곡은 그리스 희곡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 젊을 때 읽은 사람이야. 그래서 연극적인 재미를 알고 또 관객이 뭘 바라는지 알고 그렇단 말이야.

오늘날 셰익스피어도 유명한 것도, 셰익스피어는 관객을 알아. 관객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 관객이 뭐로 감동하는지를 안다고. 내가 '겨울이야기'를 내 아내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만들 때, 왕의 질투와 과오로 왕비를 죽이잖아. 죽은 줄 알았잖아. 10여 년 동안 자기 과오로 왕비를 죽은 줄 알고, 왕비가 보고 싶어서 참회하는 드라마란 말이야. 고행하는데, 자기 과오로 사랑하는 아내를 죽여 놓고. 나중에 집사가 보다 보지 못해 딱해 "그렇게 보고 싶으시냐"고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다른 데에 최고의 조각상이 만든 왕비의 조각상이 있는데 조각상이라도 보고 싶으냐"고 "조각상이라도 보고 싶다"라고 답하니 자기 집으로 모셔 가잖아.

모셔가는데 왕비가 딱 있는데, 사실은 조각이 아니라 진짜 인물이잖아. 가까이 가려니까 가까이 못 간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잖아. 나중에 가려니까 왕이 다가가는 게 아니라, 왕비가 오게 하겠다고 그러면서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까 "가능하다"고 그러니까 "딱!" 하니까 음악이 울리잖아. 왕비가 가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네" 하고 무릎을 꿇잖아. 그러니까 왕비가 왕은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는 사람을 보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면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지.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아는 거라고. 오늘날 한국연극이 너무나 상업성에 빠져있어.

   
▲ 연극 '겨울이야기'의 한 장면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정책을 좀 더 세련화시켜야 돼. 돈을 잘못 주면 독이 되는 거야. 잘 쓰면 약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돈을 연극인들한테 잘 도와줘야 해. 2천만원, 3천만원 지원해주면 망해 먹는 거야. 그거 받았다가,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다시 돌려주는 단체가 많잖아. 연극을 하면 돈이 더 드는데, 적자가 몇천만원 더 생기는데. 정말 엄선해서 뽑고, 도와주려면 제대로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닭 먹이 갈라주듯이 적은 돈 받아서 다 망하는 거야. 좋은 작품 안 나오는 거야. 좋은 연극인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런 국가정책도 지원도 중요한 거지. 이제는 모든 것이 세련화 되어가는 그런 시점에 우리가 와 있어.

여기에 인문학이 발전해야 돼. 드라마는 인문학이라고. 그리움과 아픔과 고통과 고뇌는 전부 인문학과 상관있다고. 한국에서는 그게 실종돼버리니까 내 둘째 아들이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영화감독 전공을 옛날에 했는데, 걔는 졸업작품 만들 때 파트너가 폴란드 사람이었어. 근데 그 사람은 대학원생이야. 그래서 "왜 너희는 학부생을 안 받느냐고 물으니까, 폴란드에서는 연극영화과가 학부에 없어서 대학원을 가야 한다는 거야. 학부생으로 인문학을 하고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래서 정부, 교육부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드라마를 부흥 안 시키면 인문학도 발전 안 돼.

▲ 최치림 연출이 본지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김진영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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