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음악은 마음의 거울이다. 스스로 마음의 수양을 잘해서,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야 깨끗한 음악이 나온다. 사람들이 나쁜 음악을 좋아하겠는가?"

평소 '음악은 사랑'이라는 신념을 살아가고 있는 아티스트가 있다. 누군가에겐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누군가에겐 '버클리 음대 유학 1세대'로, 누군가에겐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게스트로, 또 누군가에겐 "이 사람을 빼놓고 실용음악을 말할 수 없다"라는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5집의 앨범을 만들어 온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대표 재즈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피아니스트 김광민을 만나면서 '피터팬'과 같은 동심을 느꼈다. 그가 초등학교 1~2학년 때 혹은 고등학교 때 쓴 곡들이 우리가 잘 아는 그의 명곡들이었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프라모델 제작, RC카, 드론, 헬리콥터 이야기를 쏟아내며 사진과 실물을 보여줄 때도 그러했다. 여기에 질문 하나하나에 순수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하지만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만큼은 그보다 더 눈빛이 반짝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재즈의 대중화를 이끈 장본인인 김광민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광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지금부터 풀어본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내가 아직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나 같은 경우는 대중적으로 방송 활동도 했지만, 우리나라에 숨은 인재들이 많고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엄청나게 많다.(편집자 주 : 김광민은 MBC '수요예술무대' 진행을 맡았었다.) 예술에 1등, 2등이 어딨겠는가?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잘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하다. (웃음)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

ㄴ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일을 그동안 많이 했다. 그래도 공연 활동을 조금씩 했지만, 음반을 몇 년 동안 내지 못하고 있다. 여름에 하려다 바빠서 못했고, 계속 미뤘는데 앞으로 음악에 신경을 많이 쓰려 한다. 음반도 내고, 공연도 많이 하려고 한다.

3살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였나?

ㄴ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었는데,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치셨다. 세 살 때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괜찮은 선생님께 갔다. 어린 시절 기억이 잘 나는데, 피아노 선생님이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일단 하루 해보시고, 힘들면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셔서 "한 번만 가르치겠다"고 답했다. 당시 내가 예쁘장하게 생겼었는데, 선생님이 나 예뻐하셨을 것이다. (웃음)

그러다 잠깐 피아노 연주를 하지 않게 됐다.

ㄴ 어머니가 어렸을 때 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런데 음악이 공부가 되니 하기가 싫어졌다. 학교 숙제하기도 힘든데, 피아노 숙제를 하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몸도 어렸을 때 약했다. 항상 감기 걸리고, 만날 아팠다. 병원을 들락날락했고, 녹용도 엄청나게 마셨다. (웃음) 초등학교 2학년 때쯤에, 무서운 의사가 있었다. 의사가 "애한테 뭐 시키는 것 있느냐"고 물어서, 피아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뭐 피아노? 아니 지금 애가 이렇게 약해서 학교 다니기도 힘든 애가 무슨 피아노야? 당장 집어치워!"라고 말했다. 그 당시엔 할아버지가 아주 고마웠다.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이 나간 할아버지였지만, 그때 관뒀다. 어머니는 나를 끝까지 시키려고 했다. 그때 계속했었어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 진짜 '100인' 안에 들 자격이 있었을 것 같다. (웃음)

   
 

우리 집안이 형제가 넷인데, 내가 막내다. 형들이 음악을 좋아했다. 특히 큰 형이 팝송을 많이 들었다. 비틀즈, 몽키스 등을 들었고, 엔니오 모리꼬네의 영화음악도 들었다. 여기에 사이먼 앤 가펑클 앨범을 크리스마스 때 사 와서 같이 들었다. 나보다 6살 많은 큰 형이 "야 이거 들어봐. 미국에서 유명한 음악이래"라고 했다. 그 당시에 그런 음악을 듣는 이들이 없었다. 당시 큰 형이 중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즈음엔, 둘째 형이 클래식에 빠졌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막 틀어주니 나도 빠지게 됐다. 음악이 아주 아름다웠다. 어머니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운명 교향곡', 슈베르트 음악을 많이 틀어줬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4학년 때, '운명 교향곡' 다 외우고 다녔다. 학교 다닐 때 부르면서 돌아다녔다. 수업 시간에도 그 생각하면서 보냈다. 이상하게 모차르트는 동요 같아서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김광민을 모차르트에 비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ㄴ '학교 가는 길'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 곡을 중학교 때 썼었다. 그러니까 들어보면 동요 같다. 지금 다시 쓰라면 창피해서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쇼팽하고 비교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좀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연습도 잘 안 하고 공부도 잘 안 했는데, 잘 나가고 재능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웃음)

그럼 작곡을 언제부터 했나?

ㄴ 초등학교 때부터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괜찮았는데, 너무 한심해 보여서 다 버렸다. 그걸 가지고 있을 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 가는 길' 같은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뒤져보면 생각나는 곡도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엔 프라모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ㄴ 중학교 때는 음악보단 '타미야' 같은 프라모델을 만들었다. 중학교 때 프라모델 대회 1등 하기도 했다. 일본 '타미야'보다 더 완벽하게 칠했다고 칭찬도 받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붓 하나 가지고 한 것이었다. 이쪽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저 자식 장난감 만지고 공부 안 한다"라고 이야기 들었다. 이게 아쉬운 점이긴 하다. 고등학교 유명한 후배 중에 서도호 설치미술가가 있다. 그 친구도 프라모델 하다가 예술가가 됐다. 아이들을 키우면 꼭 꿈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 (웃음) 아무튼 지금은 헬리콥터나 드론을 날리는 것, 그리고 RC카도 취미로 삼고 있다.

   
▲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직접 채색한 프라모델들 ⓒ 김광민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대학은 왜 무역학 전공으로 갔나?

ㄴ 음악을 많이 들었다. 딥 퍼플, 산타나, 비틀즈, 블랙 사바스 등 음악을 판 사가지고 들었다. 여기에 프로그래시브 록(Progressive Rock, 1960년대 등장해 기존 대중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진보(Progressive)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을 좋아했다. 킹 크림슨,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예스, 제니시스 등 살 수 없는 LP판을 간신히 구해서 들었다. 여기에 중학교 때 시나브로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애들을 데리고 음악을 했다가, 1981년 대학가요제 나가서 동상을 받기도 했다. '안개'라는 노래의 편곡을 해줬다.

고등학교 들어가선 음악을 정말 하고 싶었다. 집안이 워낙 무서웠다. 우리 아버지는 대학교 때들도 형들이 저녁 해지기 전에 다 들어왔다. 저녁 6시 식사 시간에 아들 넷이 없으면 큰일 났었다. 아버지는 "세 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하고 계속 음악했으면, 중학교 때 유럽을 보냈을 것이다. 하기 싫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관두고 펑펑 놀고, 좋다고 팝이나 록이나 들은 애가 갑자기 딴따라를 하겠다니, 우리 집안에서 웬 말이냐. 헛소리하지 말고, 대학교 들어가서 회사 다니고, 결혼해서 아버지가 집 사줄 테니까 잘 살아라"라고 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셨다.

그래서 결국 명지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런데 사람이 나이 들면 착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대학교 때 지금 돈으로 2~3천만 원을 세션 활동하면서 벌었다. 형들이 나 예쁘다 할 정도였다. 결국,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셨다. 그러다 정원영과 한상원의 꼬임에 빠져 미국 버클리에 갔다. (웃음) 미국에서 7년 동안 돈만 날렸다. 그동안 일했으면, 돈 엄청나게 벌었을 것이다. (웃음) 특히 한상원이 가자고 매일 전화했다. 걔 때문에 내 인생이 그렇게 됐다. (웃음)

또한, 결정적인 이유로 클럽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럼, 베이스 열심히 치면서 동시에 도를 닦는 것처럼 재즈를 연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 책을 구해서 공부하는 선생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이 "(정)원영아, (김)광민아, (한)상원아. 너희는 우리처럼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아직 20대 초반인데, 빨리 미국에 버클리란 학교가 있으니 너희는 꼭 공부해서 우리나라 음악을 바꿔라"라고 신신당부했고 가게 됐다.

   
 

록, 클래식 장르를 어린 시절부터 들었는데 왜 재즈를 공부하게 됐나?

ㄴ 다른 것은 혼자 공부할 수 있는데, 재즈는 혼자 공부할 수 없었다. 책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학 미적분을 풀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과학으로 말하면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알아내고, 다윈이 '종의 기원'을 써서 진화론을 증명해냈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의 책을 읽거나 이론을 배워서 지금 우리가 이해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이론을 토대로 만든 다른 것들을 처음 보고 이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고등학교 때도 재즈를 배우는 경우가 있지만, 혼자 클래식 공부한 친구가 재즈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재즈가 그러므로 공부를 해야 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버클리 음대 유학 1세대로 지냈고, 1996년 버클리 음대 공로상을 받았다.

ㄴ 부총장이 직접 한국에 왔다. 시상식을 남산 힐튼 호텔에서 진행했는데, 언론 매체들 불렀어야 했다. 내가 아무도 부르지 않다 보니, 우리끼리 상 받는 행사가 됐다. 친구들도 오지 않았다. (웃음) 그 상이 전 세계 적으로 3년에 한 명씩 주는 상이었다. (왜 받았다고 생각하나?) 한국에 와서 방송도 많이 하고, 내가 재즈 붐을 일으켰다. 그 당시만 해도 클래식 쪽에서 재즈 판을 많이 무시했다. 재즈 들으면 "귀 버린다. 저걸 들으면 인생 끝난다. 저질이니 듣지 마라"라고 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편견을 깨려고 많이 노력했다. 방송에서도 엄청나게 보여줬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버클리에 갑자기 애들이 1년에 2~300명씩 가게 됐다. 당연히 버클리에서 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일본 애들이 300명씩 있었는데, 한국에서 갑자기 300명씩 오니 상을 안 주면 이상했을 것이다.

   
 

명실공히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전문 직업군을 인식시킨 사람이다.

ㄴ 재즈는 현대 음악의 한 부분이었다. 버클리 음대 이후 다닌 뉴 잉글랜드 컨서바토리도 클래식 학교였다. 클래식으로 줄리아드보다 더 유명한 학교였다. 여기서도 재즈를 하는 애들을 좋아했다. 한국에 왔더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이렇게 되면 큰일 나겠다 해서 바꾸려고 노력했다. 이미지가 좋아진 것 같다. 재즈 붐이 일어난 90년대,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오렌지족이 재즈를 듣는다고 해서 인터뷰가 오기도 했다. 기자들이 "재즈는 어떤 음악입니까? 우리나라 큰일 난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래서 "아니 달면 먹고, 쓰면 뱉으면 되는 것이지. 음악 가지고 우리나라가 망합니까?"라고 답했다.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옛날 서양 사람들이 범선 타고 올 때, "파란 눈이 왔다. 큰일 났다"라고 했다.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한 것이 지금 보면 웃기는 이야기다. 당시 자기 나름대로 사상과 뜻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막고 두려워한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앨범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91년 버클리 음대 재학 시절에 1집 앨범 '지구에서 온 편지(Letter From The Earth)'를 냈다. 故 유재하와의 인연이 있는 앨범이라고 들었다.

ㄴ 재하와 내가 많이 친했다. 후배 중 한 명으로 날 많이 따랐다. 재하가 고민 상담을 했다. "형 애들 다 재즈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다른 음악이 좋은데 어떡할까요?"라고 묻기에 "뭘 어떻게 인마, 네가 좋아하는 걸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랬던 재하가 내가 버클리 음대 유학 시절 중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죽은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곡을 하나 쳤다. 그게 '지구에서 온 편지' 곡이었다. 재하를 생각하면서 써진 것이었다. 나중에 판을 낼 때, 같이 섞어서 내게 됐다. 앨범 제목을 버클리 음대 재학 당시엔 '지구에서 보내는 편지'로 했는데, 한국에선 '지구에서 온 편지'로 제목이 더 좋다고 바꿨다. 그게 그 말인 것 같았다. 앨범 전체가 재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25살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었는데,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생각하는 앨범이기도 했다.

1집은 미국에서 데모 테이프를 녹음해서 여름방학 때 사람들 나눠주다가, 회사에서 작업하자고 해서 만들게 됐다. 데모 테이프 음악이 너무 어려워 다른 음악을 넣어달라고 해서, 어렸을 때 음악했을 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넣게 됐다.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 했던 음악을 낸 것이다. 유학 시절엔 퓨전과 같은 강렬한 음악을 많이 해서 그런지 1집 음악을 낼 땐 미국에서 깜짝 놀랐다. "쟤가 어떻게 저런 음악을 할 수 있는가?"였다. 수준 높은 현대 음악을 하는 애가 갑자기 동요 같은 음악을 하니 다들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것도 어렵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연주 음반이 잘 안 팔리는데 10만 장 넘게 팔려 이슈가 되기도 했다.

▲ 김광민 '지구에서 온 편지' 中 ⓒ 워너 뮤직 코리아 공식 유튜브

1994년 발매한 2집 'Shadow Of The Moon'(달 그림자) 이야기도 해 달라.

ㄴ 미국에서 유학 생활 7년 이후 한국에서 낸 앨범이다. 뉴욕에 더 있으려고 했는데, 외로워서 매우 힘들었다.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뉴욕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있었지만 힘들었다. 보스턴을 떠나면서 나온 이야기를 담았다. 거기에서 같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다시 만날때까지'라는 노래가 있는데, 보스턴 사람들을 다시 만날 기약을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제목 때문에 외롭고 우울해진다는 이야기도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내 음악을 듣고 조울증 걸리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꼭 그런 것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땐, 음악 하는 선배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광민이는 왜 이렇게 빠른 음악을 해도 슬프냐?" 내 천성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웃음)

1999년 나온 3집 '보내지 못한 편지'는 어땠나?

ㄴ 한국에서 있으면서, 방송 생활도 하다가 5년 만에 만들게 됐다. 3집은 피아노 한 가지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꼭 피아노 솔로 앨범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음반을 자주 냈어야 했는데, 3집 낼 때까지 텀이 많았다. 그동안 쓴 곡을 해서 만들게 됐는데 그것도 10만 장이 넘게 팔렸었다. 3집이 잘 되어서 밀어주신 분들도 많았다. 3집은 서정적인 피아노 음반을 내려고 했고, 깨끗하게 만든 것 같다.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가 좀 떴다. (웃음) '학교 가는 길'과 더불어 어디를 가도 제일 먼저 들려왔다.

3년 후, 2002년엔 4집 '혼자 걷는 길'을 냈다.

ㄴ 그거는 좀 외국 사람들과 같이하고 싶었다. 1집은 버클리 음대 선생님과 같이했고, 2집도 유명한 사람들(기타 팻 매스니, 드럼 밥 모세스)이랑 했다. 3집은 한국에서 했다. 유일하게 한국에 있는 사람들끼리 한 것이었다. 4집은 제작 쪽에서도 그런 것이 있어서 외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했다.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하루에 다했다. 뉴욕에서 섭외했는데 유명한 사람들이 했다. 대니 코트립이라고 메인 드러머가 있었고, 마크 이건으로 베이시스트가 있었다. 둘이 상당히 친했는데, 베이스는 별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은 잘했는데, 내 스타일엔 맞지 않았다.

여기에 폴 맥캔들리스라고 색소폰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많은 곡을 뉴욕에서 하루 밖에 녹음 못 해서 아쉬웠다. 유명한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해야 했는데, 리허설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녹음도 잘못됐었다. 또한, 오케스트라를 위해 뉴욕으로 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반대했다. 회사가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 음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음량도 줄였다. 이런 이유로 4집을 제일 싫어한다. 유일한 실패로 남은 것 같다. (웃음)

▲ 윤도현 & 자두 & 김광민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 Mnet 공식 유튜브

그래도 4집엔 '이혼'이라는 곡이 있다. 반대가 많았다. 결혼도 안 해봤지만, 대한민국에서 이혼이라는 곡을 쓴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이혼이라는 주제의 노래를 쓴 사람이 있을까 해서 우기고 썼다. 또한, 유재하의 노래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라는 곡을 넣었는데 그것도 좋았다. 또 내가 대학교 때 쓰고 노래 부른 'Song For You'가 있다. 'Summer Rain'도 대학교 때 썼는데, 노래를 가수를 시키려고 했는데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내가 했다. 녹음할 때 정신없이 했는데, 들어보니까 창피해서 못 듣겠다. (웃음)

본인이 직접 노래도 했다.

ㄴ 기념으로 한 것이다. 가수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판에 내가 부른 노래 하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2007년에 '시간여행'으로 5집을 냈다.

ㄴ 게을러서 늦게 냈다. 생각은 있는데, 학교 교수하면 바빠서 정신도 없어서 못 한다. 5집이야말로 진정한 피아노 솔로 앨범이었다. 편집도 안 하고 한 방에 다쳤다. 집에서 치는 피아노처럼 하려고, 에코 없이 드라이하게 녹음했다. 5집은 CD 2장짜리 앨범이다. 옛날 팝송을 소재로 했다. 'Sealed with a kiss', 'The end of the world', 'Time in a bottle', 'What a wonderful world' 같은 젊은이들은 잘 모르고 아저씨들만 아는 노래들을 쭉 했다. 5집은 사람들이 혹평을 많이 했다. 나한테 다른 것을 많이 기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취지가 주로 어린이들도 칠 수 있는 심플한 음악을 하고 싶었다. 재즈곡도 심플하게 다 바꿨다. 화성도 가장 간단하게 했다. '도솔미솔도솔'처럼 했다. 일부러 콘셉트를 그렇게 가져갔다.

그 후로 6집 앨범이 나오지 않고 있다.

ㄴ 그동안 교수 업무, 방송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녹음실도 보고 왔다. 무조건 이번엔 다시 시작하려 한다. 매니저는 벌써 12월에 판이 나온다고 말을 하고 다닌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뭔 소리냐?"라고 하고 있다. (웃음)

그동안 작품을 만들면서 아쉬운 점이 있을 것 같다.

ㄴ 쉽지 않다. 항상 돈이 문제다. 내가 바란 것은 마음대로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스튜디오였다. 이건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다. 스튜디오 대관에 돈이 들어가고 시간 약속도 필요하다. 언제든지 내가 쓸 수 있으면, 좋은 작품도 많이 만들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나?

ㄴ 회사에선 잘 되길 바라지만, 이제는 내가 히트를 하긴 힘들 것이다. 예전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 강렬한 퓨전 재즈 등을 생각한 것이 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환경이 나름 조성된 것 같다. 영화 음악도 해보고 싶었는데, 몇 개 작업해보니 감독과 의견도 맞아야 해서 하기 힘들었다. 음반을 항상 많이 내고 싶고, 공연도 제대로 멋지게 신경 쓰면서 하고 싶다. 잘 되면 외국으로도 나가서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팬들이 김광민의 음악을 기다리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ㄴ 팬들에게 그동안 많이 보여드리지 못했지만, 마음의 위안을 전달해준 것 같다. 편지들 사연 중에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했는데, 음악을 듣고 극복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내용이 많이 왔다. 마음의 안식처라고 해야 하는 치유의 기능이 그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 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학생들에겐 어떤 선생인가?

ㄴ 그건 애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웃음) 애들이 친구처럼 생각한다. 교수로 생각하는 것보다 같이 잘 노는 편이다. (강의할 땐 어떤가?) 애들이 재밌어한다. 자는 애들도 많다. (웃음) 나는 그냥 자라고 한다. 진짜 피곤할 때는 자야 하지 않겠는가? (웃음)

재즈를 하려는 제자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먼저 걸어온 선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요즘은 다른 생각들이 없고,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살고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맨날 라면만 먹고, 화가 이중섭처럼 불쌍하게 살다가 일찍 죽는 것보다 풍족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라가 잘살게 되어야 문화에도 관심이 가는 것이니, 풍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음악은 사랑'이라는 말을 매일 한다. 예술은 자신을 통해야 나와지는 것인데, 나 자신의 능력이 있다고 실력이 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은 마음의 거울이다. 스스로 마음의 수양을 잘해서,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야 깨끗한 음악이 나온다. 사람들이 나쁜 음악을 좋아하겠는가?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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