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감독이 전하는 영화 뒷이야기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일 년 열두 달 매일 된장찌개만 먹으면 얼마나 지겹겠나?"

그의 대답에 진심이 느껴졌다. 김유진 감독의 작품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의 첫 데뷔 작품인 1986년 블랙코미디 '영웅연가'부터 2008년 사극 액션인 '신기전'까지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보였다.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최고의 흥행작에 등극한 박신양, 전도연 주연의 '약속'은 멜로영화였다. 또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는 별칭이 붙은 해인 2003년엔 정진영, 양동근이 형사 콤비로 출연한 '와일드 카드'로 한국 형사 스릴러물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처럼 코미디, 액션, 스릴러, 멜로, 심지어 아동물과 성인물까지 장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해 왔지만, 항상 그의 작품은 관객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1991년 제2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비롯해 6관왕을 석권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당시의 페미니즘 운동을 더욱더 불러일으킨 화제작이었고,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안긴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가족영화였다. 또한, 1996년 제34회 대종상영화제 3관왕을 받은 '금홍아 금홍아'는 당시 파격적인 노출로 화제를 모았다.

이쯤 되면 그의 30년 영화 연출 이야기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유진 감독을 지난 12일 인사동에서 만났다. 2008년 '신기전'이후 큰 연출작이 없는 그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인 김유진 감독의 유쾌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근황이 궁금하다.
ㄴ 그날이 그날처럼 지냈다. (웃음) 감독이 무슨 영화를 할 것인가 소재를 잡는다. 그 소재를 잡으면 나 같은 경우는 작가한테 일정 부분의 자료를 줘서 의뢰하고, 작가가 작품을 쓴 후 내가 피드백을 주는 과정이 1년이 기본으로 걸린다. 그런데 소재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소재 찾기가 다른 감독은 쉽게 찾는데, 나만 어려운 것 같다. 한두 개 소재를 찾아서 진행해서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하면 1년 반을 기본으로 흘려보낸다. 2008년 '신기전' 이후 두 번 정도 그렇게 보내서 3년이 흘렀다.

그다음엔 중국 친구들이 영화를 하자고 했다. 그게 붐인 것 같다. 잘됐다 해서 그 친구들 원하는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기다리니 1년이 더 흘렀다.  그런데 자기네들이 준비가 안 됐다고 소식이 없었다. 운 좋게 계약금은 받았다. (웃음) 책도 다 썼는데 준비가 안 되어서 기다려 달라고 하니 세월이 갔다. 책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각색이 실패하니 한 해가 더 흘렀다. 일반적으로 감독들이 굉장히 부지런히 하는 친구들이 3년에 한 편 정도 만든다. 내가 조금 늦은 거지 그렇게 늦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웃음)

요즘 중국 영화 시장에 한국 영화인들이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기술을 그냥 준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ㄴ 한국에 작가가 간다고 그 나라의 문화나 기술이 당장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 기술, 조명 기술 같은 순수 기술이 80% 이상 차지하는 것이라면 그런 염려가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다른 부분이다. 어느 때 되면 그쪽에선 우리 인력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 같다.

한국 영화가 중국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전반적인 흐름은 어떻게 생각하나?
ㄴ 산업적 측면에서 중국 시장의 막대한 자본을 가져올 좋은 기회다. 잘 이용하면 자동차 팔아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훨씬 낫다. (웃음)

30여 년의 연출작 필모그래피를 보면 드라마부터 사극 판타지까지 상당히 다양하다.
ㄴ 예를 들어 멜로를 하면 그다음에 멜로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영화 한 편에 대해 집착하는 시간이 워낙 길다. 준비할 때부터 개봉할 때까지 최하 2년이 걸린다. 그 지겨운 것을 다음에 하겠는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웃음) 그래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은 내 성격상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영화 장르가 다양하다 보니 다양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대범하다는 것을 나쁘게 말하면 줏대가 없는 것이다. (웃음) 일맥상통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바로 장르가 액션이던, 성인물이던 다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다. 큰 맥에서 보면 다 같지 않을까 싶다.

   
▲ 영화 '신기전' 촬영 지시를 내리고 있는 김유진 감독. ⓒ 김유진 감독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편인지?
ㄴ 많은 감독이 글을 직접 쓴다. 나는 각색을 하는 편이다. 후배 감독들이나 연출부들에 웬만하면 작가한테 맡기고 직접 쓰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다. 객관적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바라볼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작가적 차원에서 깊숙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두 번째로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문자화된 시나리오를 통해 영상화하는 것도 힘든데,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힘들다. 각색하는 것과 원작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일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어떠한가?
ㄴ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오랜 기간 고민을 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영화보다는 상업영화를 추구하는 감독 중 하나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그 자본이 회수돼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사람이 봐야 하는 소위 흥행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사람들한테 무슨 이야깃거리가 먹히느냐는 고민을 하는데, 그러한 것을 기본적으로 호소력 있게 하려다 보니 사회성이 있던 작품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순수하게 장르별로 찾는 경우도 있긴 하다. 소재를 찾는 것이 나한테 보통 일이 아니다.

사회성이 시사성을 이야기하는지?
ㄴ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년) 같은 시사성 있는 작품부터 어린이 영화도 있었다. 굉장히 소외된 영화였는데, 그 작품이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받았다.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1993년)였는데, 신현준과 김혜선이 당시 초등학교 선생으로 나왔다. 임권택 감독님이 '서편제'를 할 때여서 그 옆구리에서 했다. 어린이를 위한 가족 영화가 없어서 하고 싶었다. 왜 우리는 애들을 위한 영화가 없었겠느냐는 시기였다. 아르바이트 둘을 둬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기준으로 취재했다. 이들의 갈등은 무엇이고,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성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본적인 것을 취재했다. 학교, 학원에 대한 하고 싶은 것들을 취재해서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걸 크게 보면 시사성이 있다고 볼 것이다.

   
▲ 영화 '약속' 포스터

김유진 감독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약속'(1998년)일 것이다.
ㄴ '약속'은 원작이 희곡이다. 이만희 작가의 '돌아서서 떠나라'라는 2인극이 있다. 요즈음도 작품을 했다. 2009년엔 유오성과 송선미가 출연했다. 2인극이라 남녀 두 사람이 하기엔 딱 좋았다. 1996년 한명구와 정경순이 공연한다길래 희곡 좀 보자 해서 읽어봤더니 장르 영화여서 영화가 가진 오락성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 작가와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하자고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만희 작가가 그때는 희곡 작가여서 시나리오를 써 본 적이 없어서 애를 많이 썼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소설처럼 쭉 써라, 그러면 시나리오화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전까진 흥행의 경험이 없는 감독이었는데, 스태프들을 모아 놓고 "요거 나 흥행 안 되면 은퇴작되니 열심히 합시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박이 났다. (웃음)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나?
ㄴ 중앙대 연극영화 전공에 연출 공부를 했다. 4학년 되니까 공부가 어려웠다. 외젠 이오네스코, 사무엘 베케트 같은 희곡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무대에 모르는데도 무슨 말인지도 잘 몰라서 그러면서 연출을 억지로 했을 것이다.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과연 순수예술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있을까 했다. 밥도 먹고 살아야 하고 해서 결국 이쪽 분야가 아니라 일반 회사에 다니게 됐다. 군대 전역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7년 동안 일반 회사에 다녔다.

그러다 졸업한 동기들이 연극 쪽에서 일하고 있다 보니까 자꾸만 연출 의뢰가 들어오게 됐다. 자연스레 연극 연출을 다시 하게 됐고, 이대 같은 대학교 축제에서 연극을 크게 하다 보니 가끔 하게 됐다. 또한, 동기 쪽에서도 영화를 하는 애들이 있다 보니 접하게 됐다. 영화는 그래도 밥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 영화 줄거리가 논문도 아니었고, 상황을 이해 못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고도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웃음) 관심을 두고 경제적 여력도 되다 보니 영화를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다. 영화 제작 비용도 친구들끼리 모여서 내고 직접 제작(대진엔터프라이즈)을 하다 보니 이왕 하는 김에 감독도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온 첫 작품은 1986년 영화 '영웅연가'였다.
ㄴ 김지일 작가의 뮤지컬 '영웅만들기' 극본이 원작이었다. 전두환 정권 때였는데 '영웅만들기'가 불경스럽다 해서 제목을 바꾸라고 했다. (웃음)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우리가 영웅으로 만든 줄 아느냐? '영웅만들기'라니?"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제목도 '영웅연가'로 바꾸고, 내용도 일부 삭제됐다. 그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그때가 30대 중반이었으니, 열정이 상당했다. 내용도 좋았다. 이 땅에 사는 배우지 못한 젊은 남녀들을 교육을 해 엘리트를 만들어 결혼시키는 블랙 코미디다.

재벌이 결혼식장을 만들었는데, 자신의 근본이라 생각해 이 예식장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결혼식장에서 결혼만 하면 신혼부부가 1주일을 못 가서 연탄가스, 교통사고 등 사고가 나서 죽게 된다. 재수 없는 예식장이라는 소문이 나서, 한 명도 오지 않게 된다. 그래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 모집하고 엘리트를 만들어 결혼식장에 결혼해서 24시간을 살도록 한다.  이러쿵저러쿵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젊은 두 남녀가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좋은영화'제도라고 1년에 몇 편 안 뽑는데 국가에서 선정해 상을 줬다. 제목 바꾸고 상을 받은 케이스다. (웃음)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통해 원미경 배우는 제29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첫 작품에서 눈도장을 찍고 난 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년)를 통해 1991년 제15회 황금촬영상 감독상을 받았다.
ㄴ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실화다. 그 당시 신문에 크게 났었다. 가해자가 대학생인데,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고 피해 여성이 청년의 혀를 깨물었다. 그 학생 집안에서 여자를 고발한 것이다. 이 여자가 유죄 판결을 받아, 여성 단체에서 들고 일어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던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였다.

기획을 맡은 친구 신철이 신문 스크랩과 재판 자료들을 어디서 이만큼 얻어와서 "이런 내용이다", "재밌겠다", "시나리오를 써 보자"해서 만든 영화다. (편집자 주 : 배우 원미경이 피해 주부 '임정희' 역으로, 이영하가 '남편' 역으로, 김민종이 '강간 청년' 역할로, 손숙이 '변호사' 역으로, 이경영이 '상대측 변호사'로 출연했다) 세상에 이러한 영화들이 나오면서, 영화계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동용 영화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다음 작품으로 성인용 영화 '금홍아 금홍아'(1995년)를 만들었다.
ㄴ 당시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한참 돈이 필요할 때라 먹고 살라고 했을 것이다. (웃음) 그 당시 김주영 씨의 소설 '아들의 겨울'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원작 판권을 사서 제작을 하려다 실패를 했다. 제작자 입장에선 암담했을 것이다. 오락적 재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부터 50년 사이의 시대극이고 애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돈이 투자되어야 했는데, 뒤로 미뤄지게 됐다.

그 와중에 '금홍아 금홍아'를 만들게 됐다. 이 작품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단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러 작가를 거쳤다. 그중에 하나가 '방가? 방가!' 감독인 육상효였다. 서울대 국문과 나와서 그런지 글 잘 썼다. (웃음) 시나리오 쓰는데 애를 많이 썼었다. 일본 강점기 때, 지식인들의 허와 실을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 (편집자 주 : 김갑수가 시인인 '이상'을, 김수철이 화가 '구본웅'을 연기했다) 그 시대의 애국, 나라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거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 영화 '금홍아 금홍아'를 통해 배우 이지은(위)은 제34회 대종상영화제, 제6회 춘사영화상, 제16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석권했다.

'약속'의 성공 후, 50대가 됐다. 보통 안정적인 학교로 가는데 그러지 않았다.
ㄴ 제 아버지가 대학교수셨다. 1899년생이니 옛날 분이셨다. (웃음) 50대에 절 낳으셨다. 그래서 형제와도 나이 차이가 크다. 아무튼 교수라는 직업이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탐탁지 않았다. 고리타분해 보였다. (웃음) 우리 때는 교생 실습을 나가면 국어 선생 자격증을 줬었다. 할 거 없으면 선생 될까 봐 일부러 교생 실습 학점을 따지 않았다. 그때 학점 딴 친구들 다 국어 선생하고 있다. 그런 적이 근본적으로 깔렸었다. 그런데 나이 드니 사고가 조금 변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해왔던 공부를 다시 정리한다는 것이 귀찮고 힘들었다. (웃음) 남이 써준 책을 가지고 이야기할 순 없고, 그거를 정리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었다.

'약속' 이후 만든 영화는 2003년 작 액션 스릴러 '와일드 카드'였다.
ㄴ 그 작품 같은 경우는 강력반 형사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사회에서 공적으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굴 까라는 생각에 처음엔 소방관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내고 사람이 널브러져 있으면 나 혼자도 외면하고 달려나가지 못하는 데 소방관은 돕는다. 소방관 소재는 앞으로도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팀이 험한 일을 하느냐는 생각에 감식반도 있는데 좀 더 재미있으려면 강력반밖에 없었다. 많은 시신을 볼 수밖에 없고, 억울한 사연을 다룰 수밖에 없는 이들이 강력반 형사들이다. 여태껏 많은 영화가 경찰을 부정적으로 그려왔는데, 긍정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경찰들과 미팅하고 취재했다. 쉬운 이야기부터 물어봤다. 봉급에 대한 불만, 진급에 대한 불만,  주 갈등은 무엇인지, 연애는 어떻게 하고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시시콜콜 정보들을 물어봐 밑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면서 사건을 툭툭 던져 넣는데, 내 친구가 한 번 압구정동 공중전화 박스에서 퍽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의 사건은 아주 특수한 것을 다룰 필요가 없어 보였다.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건 너무 특수하니까 그러지 말고 그거보다 약한 것을 잡자고 했다. 강력반 형사들을 많이 만나 취재한 결과물이 '와일드 카드'였다.

   
▲ 영화 '와일드 카드'로 김유진 감독은 그해 열린 제11회 춘사영화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다음 작품인 '신기전'(2008년)은 판타지 액션 사극이었다.
ㄴ 다들 경제난으로 쪼들려있는데, 영화가 가진 덕목 중에 우리 스스로 우리를 칭찬할 것이 없겠느냐는 것에서 출발했다. 처음엔 중국, 일본 검술이 모두 한국에서 출발하였다는 이야기를 언뜻 듣고 그걸 만들어보자 했다가 실패해서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기획팀과 신기전을 알게 되어, 항공 우주학 박사를 만나 설명을 들었다. 세종 당시 로켓 문화가 모든 과학 문명의 총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의 총집합이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훌륭한 과학적 업적이 세계 최초라는 것이고 200년 후에나 비슷한 것을 발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이 됐다. 이런 독보적인 것을 흥미롭게 만들려고 했다. 누군가는 알량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돈 번다고 하지만, 그거야 뭐라고 하든 말든 긍정적인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다. 나이가 60대가 되어가니, 비관하거나 비판하는 것보단 그런 소재가 좋았다.

대중들이 감독에게 어떤 점을 원하는 것 같나?
ㄴ 울고 싶을 때 뺨친다는 말이 있듯이, 영화가 가진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정서가 있다. 예를 들어, 웃긴다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다. 많은 관객을 2시간 동안 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굉장히 훌륭한 것이다. 또한, 울리는 것도 삶이 팍팍해서 울고 싶은데 영화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실컷 울고나오는 것도 다 힐링인 것 같다. 그러한 영화가 가진 대중적 역할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영화는 잘 해야 하고, 잘하려면 '웰메이드'가 되어야 한다. 그런 하나하나에 충실하면 될 것 같다. 어느 시대건 웃음이 필요한 사람이나, 눈물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을 찾아서 같이 즐겼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싶은지?
ㄴ 젊었을 때는 사회성이 있는 데서 출발하려 하고, 그런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런 면에선 자유로워진 것 같다.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행위를 하다 보니, 자본가가 요구하는 흥행이나 만족을 시킨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결론은 돈을 벌어야 하는데, 미래지향적인 것보다 그런 것에 대해 갑갑함이 많다. 어떤 면에선 좀 더 지금까지 그런 곳에서 허우적거리는가 해서 많지 않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영화를 만들 생각도 반이 있다. 그렇지 않은 생각도 반이 있다. 갈팡질팡하고 있다.



김유진 감독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감독이라 말할 수 있나?

ㄴ 내 후배들이나 연출부 애들한테 항상 이야기한다. "네가 만드는 것이 코미디, 액션, 섹스 영화든 관계없이 웰메이드 영화를 잘 만들어라. 잘 만들어진 영화가 무엇이냐? 열 명이 봐서 한 명이 화장실 가게 만들어라. 아홉 명은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라. 열 명을 다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장르 구분 없이 웰메이드에 충실하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 같다. 그런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상을 가지고 하는 '영상 이야기꾼'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영상 미학적인 것보다 드라마적인 순수한 이야기가 더 강렬한 그런 것을 추구하는 감독인 것 같다.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말 한마디 편하게 못하겠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 인터뷰를 해보니 굉장히 편안하고 인간적이다.
ㄴ 현장이나 지금 인터뷰나 똑같다. 그런데 괜히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웃음) 영화감독이 현장에서 어떠한 권위를 앞세워서 만들면 그 영화는 절대 될 수 없다. 바라보고, 배려하고, 뭔가 잘못되었을 때 어떻게 잘 되게끔 연기를 잘 뽑아낼 수 있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학생도 아니니 꾸짖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일부러 화를 낼 때가 있긴 하다. 극히 드문 경우로, 이 부분만 잘하면 통속적이지만 "상이란 상은 다 휩쓸 수 있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다 안타까워서였다.

끝으로 영화 팬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ㄴ 옛날엔 영화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1980년대나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재미가 없는 한국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한국 영화 다시는 내가 보나 봐라"라는 이야기를 했다. 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없었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미국 사람들은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말한다. "내가 다시는 미국 영화를 안 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는 선택해서 보는 것이다. 잘못된 영화가 있을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라고 100% 다 좋은 것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작품이 안 나오면 영화처럼 망치로 깨뜨린다. 하지만 영화는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망치로 깰 순 없다. 영화도 대중예술 작품인데, 항상 잘 나올 순 없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요즘엔 관객분들이 한국 영화를 봐서 뭐해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옛날엔 그런 부탁을 자주 했다. 오히려 지금은 고맙기만 하다. 요즘은 한국 영화 점유율이 보통이 아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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