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연기 인생 60주년에 대한 것은 크게 기념할 필요는 없어. 그 이상으로 한 양반도 많고. 60주년으로 끝난다면 기념이 되겠지만, 능력 있으면 61주년, 62주년 앞으로 쭉 계속해야지."

그의 CF 대사인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OK"처럼 배우 이순재(81)가 '한국의 대배우'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TV, 영화, 연극 무대 모두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배우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 배우다. 그리고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하는 배우다.

10대들은 그를 보고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2013년)의 '직진순재'를, 20대들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7년)의 '야동순재'를, 30대들은 드라마 '허준'(1999년)의 '유의태'를, 40대들은 MBC 주말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년)의 '대발이 아빠'를, 50대들은 KBS 사극 '풍운'(1982년)의 '흥선 대원군'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커리어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영화, 드라마, 연극, 예능과 CF까지 무궁무진한 활약을 거침없이 이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새로이 등장한 별명인 '직진순재'와 비슷하다.

최근 그는 첫 공연이 열리기 전에 모든 상영회차의 매진이 이뤄진 국립극단의 연극, '시련'에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원칙과 주장을 바꾸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형을 선고하며 권력의 광기를 보여주는 '댄포스'를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공연 장소인 명동예술극장에서 배우 이순재를 만났다. 그의 60년 연기 철학과 인생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본다. 최대한 그가 이야기한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풀어봤다.


▲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 선정 소감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내년 되면 어떻든 간에 연기 시작한 지 60년이 되네. 1956년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지평선 너머'라는 연극에 처음 출연해 연기를 시작했지. 나도 모르게 벌써 연기 인생이 60년이 다 됐다고. 작업이라는 것이 연극 행위도 마찬가지고,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루하루가 끝나는 작업이 아니야. 한 번 연극을 하면 서너 달 정도 연습하고, 드라마는 한 편 하면 6개월 정도 하고, 영화는 여기에 2~3개월 이상 더 시간이 들지. 이러한 장기 작업을 하다 보면,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시즌이 바뀌는데 언제 세월이 가는지 모르지. 일에 집중하다 보니, 외부적 요인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생활했다. 해가 빨리 넘어가는 것을 미처 의식도 하지 하기 전에 나이가 80이 넘었네. 그렇게 됐네. (웃음)

서울대 철학과를 전공했다. 어떤 계기로 배우가 됐는가?
ㄴ 1950년대 중반 대학 시절 생활 땐 여가선용할 수 있는 조건이 거의 없었지. 경제적으로 주머니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어떻게 용돈을 모아서 한 달에 한두 번 기회가 되면 영화 보는 것이 전부였어. 왜 영화를 보게 됐냐 하면, 우리 땐 대학생이나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많이 있었어. 여기에 요즘 신세대 문화와 마찬가지로 당시엔 전후 문화가 있었지. 예를 들어, 영국의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en)', 프랑스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 미국의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일본의 '태양족(太陽族)' 등 문화 사조가 나라별로 특색있게 존재했지. 과거 전통과 접목하며 새로운 창조가 나온 것이 전후 우리 세대에게 나왔고.

영화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Neo Realism)'처럼 폐허 가운데서 노동의 힘으로 찍은 영화들이 세계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어. 비토리에 데 시카 감독을 비롯해 페데리코 펠리니, 루치오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 대가들의 작품들이 상영됐지. 이것들은 모두 영화 예술이야. 또한, 프랑스의 1930~40년대 거장 마르셀 카르네, 르네 클레르, 줄리앙 뒤비비에르 같은 역사에 남는 명장들의 명작이 '누벨바그' 세대 신진 감독들과 함께 전후에 국내에서 상영됐어. 장 뤽 고다르, 루이 말 같은 소위 신예들의 창작, 예술관들이 같이 한국에 왔지. 그래서 문외한이지만 이건 뭔가 흑백 영화이지만, 영화 예술적으로 탁월한 작품이라고 느꼈고.

   
 

여기에 주목할 수 있던 것은 영국 영화였어. 물론 데이빗 린, 캐럴 리드 감독의 작품 같은 대작 중심이 컸지. 데이빗 린 같은 경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 '닥터 지바고'(1965년)의 감독을 맡았어. 그 작품 외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무대를 옮겨 놓은 영화들이 있었지. 여기엔 영화배우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연극 전문 배우들이 등장했어. 그 대표적 배우가 로렌스 올리비에야.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스칼라 극장에서 흑백영화 '햄릿'(1948년)을 봤어. 와서 봤더니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목을 어떻게 할지 궁금했어. 들어보니 '마음의 소리'로 연기하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좋은 거야.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국에선 예술가로 특별 대우를 받는 사람이었어. 나중에 그가 만든 '리차드 3세'(1956년)엔 '경(Sir)'이 5명 나오지.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구드, 랠프 리처드슨, 세드릭 하드윅 등 대가들이 나와. 런던 필 상임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도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배우들의 기사 작위와 동격이지. 우린 배우가 '딴따라' 시절이었는데, 대단히 존경을 받은 것이었어. 여기에 프랑스로 넘어가면 장 루이 바로가 있지. 두말없는 예술 종주국 최고의 배우이자 연출가야. 마임의 20세기 창시자이고 권위자고. 바로는 한 때 연극연출가이고 연극의 대가인데, 왜 영화를 해야 했는가? 연극 밑천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일설도 있지. 하지만 영화에서 바로의 연기는 대단한 연기였어. 그런 명배우를 통해 이건 예술이라고 막연하게 느꼈지.

미국 영화도 소위 예술적 장르와 상업적 장르가 공존하고 있었어. 그 당시부터 조금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영화를 보면 감독을 먼저 살피게 되는데, 그 중 윌리엄 와일러의 모든 작품을 다 봤어.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년), '로마의 휴일'(1953년), '필사의 도망자'(1955년), '빅 컨츄리'(1958년), '벤허'(1959년), '편집광'(1965년) 등이 있는데 사극부터 서부극, 멜로 드라마, 스릴러까지 장르가 다양했지. 그래서 영화가 예술적 측면에서 이런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지.

여기에 영화를 통해서 명배우가 나오기 시작했지. 미국이나 영국을 보면 명배우들이 매일 나왔어. 지금보다 영화 장르가 다양했는데, 그 중심엔 주로 사람을 다룬 영화였지. 인물 위인전, 명작 영화를 보면 자연히 원작 소설 못지않은 감동을 주는 연기력이 필요하고, 그 연기력이 나오면 저건 예술이라고 우리는 막연히 느꼈지.

   
▲ 배우 이순재가 연극 '시련'의 '댄포스'를 맡아 연습을 하고 있다. ⓒ 국립극단

사실 나는 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어. 그냥 보는 데만 관심 있었고. 1학년 다닐 때, 여기에서 신영균 선배, 故 이낙훈 군이 참여한 좋은 연극 '키 라르고'를 보고 "서울대학교 연극 괜찮구나"라고 생각했어. 당시엔 연극영화과를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정통적으로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후에 양광남 씨, 양동군 씨, 이근삼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면서 학문으로 정립되어서야 중앙대와 동국대 연극영화과가 만들어졌지.

아무튼, 2학년 2학기 때, 독일희곡론이라는 강의가 있었어. 내가 독문학과는 아니었지만, 독일희곡론이라길래 청강을 했어. 듣고 나오는데 "인사드립니다. 새로 들어온 1년 후배 아무개입니다"라고 누가 인사를 한 거야. 그게 현대극장 설립자 김의경 씨였지. 그 친구가 "연기에 관심 있어요?" 하니까 "보는데 관심 있다"고 답했어. 김의경이 "그러면 한 번 우리 생각해 봅시다"해서 처음 출연한 곳이 '떼아뜨르 리브르' 시스템이었고,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 작품을 했지. 김의경은 스태프로 들어가고, 나는 연기로 데뷔했어. '떼아뜨르 리브르'는 동명의 프랑스 시스템에서 따온 것으로 서울대, 연대 중심이었는데, 연대엔 명 아나운서였던 임택근 씨가 있었고, 서울대엔 정하룡 연출이 있었지. 나는 '지평선 너머'에서 '스코트 선장'을 맡았고.

당시엔 매해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가 벌어졌어. 각 대학에서 연극에 관심 있는 멤버들이 모여서 자체적으로 연습해서 참여하는 것이라 학교의 지원을 받는 곳도 있었고, 아닌 곳도 있었지. 그런가 보다 하고 구경을 했는데, 그때 이낙훈이 연기상을 탔어. 이것을 보고 3학년 때 서울대 연극을 재건하자는 생각에 사범대, 미술대, 수의과대 기존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참가 단체와 통합을 하게 되어 연극을 시작하게 됐어.

처음엔 스태프로 해서 '조국'이라는 단막극으로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게 됐지. 그때 대학 측에 인정을 받기 위해, 각서를 써서 "절대 예산을 오버하지 않겠다"고 남겼고. 오사량 선생님이 와주셔서 연출을 해주셨어. 그 작품이 서울대 연극이 재건하는 계기가 됐지. 3학년 2학기 때, '플레이보이 오브 더 웨스턴 월드' 정규 공연을 올리면서 이해랑 선생님을 내가 모시고 왔어. 선생님이 젊은이들 연극을 연출한 거야. 공연 1주일을 남겨놓고, '올드 마혼'을 맡은 친구가 제대로 안 되어서 선생님이 "이거 큰일 났다. 전혀 안 되고, 이해를 못 한다. 그래서 자네가 하게"라고 해서 두 번째 무대에 서게 된 동기가 됐지.

   
 

4학년 올라가면서 국내 초연한 작품이 있었어. 테렌스 래티건의 '윈슬로우 보이'라고. 이 사람은 유명한 희곡 작가인데, 우리나라에선 처음 소개가 된 거야. 원본을 구해와서 번역을 우리 영문학 교수에게 부탁하는데, 라이센스를 내라고 하더라고. 저작권료를 내라는 건데, 당시엔 "무슨 소리야"했지. 그래서 저작권 대행 출판사에 이야기했더니 우리는 학생이니까 11달러만 내라고 해서, 냈더니 자료가 쫙 오더라고. 워낙 유명한 작가인데 '더 딥 블루 씨'(1952년), '세퍼레이트 테이블'(1954년) 등을 썼지. '세퍼레이트 테이블'은 데보라 카 나오는 영화(1958년)로도 만들어졌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개 부문 수상도 했고, 영화관 가서 봤었지. 그런 작가가 우리에게 소개가 안 됐는데, 워낙 작품이 좋아서 서울대 본부에서 돈 더줄테니 이틀 더 하라고 했을 정도였어.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거야. 감정을 느낀 것은 외화였지. 물론 그 당시 한국 영화가 195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해서, 1960년대 중반엔 신성일이라는 걸출한 청춘스타가 나오고, 신영균 선배, 최무룡 선배, 김진규 선배 등 이런 양반들이 나와서 붐업을 일으켰지. 각자가 다 연기력이 있었고, 연출도 유현목 감독('오발탄' 등), 김수용 감독('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 김영효 감독('반역' 등), 신상옥 감독('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이만희 감독('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등 이런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통해 영화를 만드니, 다양성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안목이 달라졌단 말이야.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은데, 배우의 출발점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 무대였다.

ㄴ 대학생 신분으로 영화배우는 조금 내 조건엔 맞지 않는 것 같았나 봐. 키도 작고, 걸출하게 생기지도 않아서 하고 싶어도 안 붙여줬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연극은 해 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었지. 연극은 수익성이 전혀 없어. 한 번도 돈 받아본 적이 없었어. 1958년 대학교 졸업을 하는데, 이왕 시작하는 거 전문 극단에 들어가고 싶었어. 국내 극단 당시엔 자체 견습생들이 있었어. 고인이 됐지만, 이진수, 김순철 등 이 친구들이 여기 국립극단 견습생들이었어. 거기 끼어들어 갈 순 없었어. 자체 시스템이 있으니까.

그래서 극단 신협의 대선배들이 계시는데, 거기 좀 끼어들어 가려고 했지. 그때만 해도 장민호 선생님이 40대 왕성한 시기였으니,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거야. 훨씬 더 연기하실 나이니까. 50대~60대가 되었으면 우리를 눈여겨봤을 텐데. 결국, 기회가 없으니까, "그래. 우리끼리 하자"한 것이 지금의 소극장 운동의 시작이야. 그래서 종로 입구의 아세아 빵집이라는 데서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것이 실험극장이야. 실험극장 창단 멤버로 나, 김의경, 오현경, 연출로 황운진, 허규, 이기하 등 당대 젊은 엘리트가 다 껴 온 거야. 그러면서 시작을 하게 된 거야.

   
▲ 배우 이순재가 연극 '시련' 제작발표회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국립극단

1950~60년대 당시엔 '연기 훈련'이라는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메소드 연기'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ㄴ 한국의 근대 연극은 신파극에서 시작하는데, 일본에서 임성구 같은 분이 일본 극단에 참여하면서 일본식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지. 일본어의 연극적 인토네이션(음조)이 그래. 그걸 우리말로 했으면 좋겠는데, 일본어를 가져왔어. 일본의 신파극도 가부키나 노의 전통적 기법에서 현대화시켰기 때문에 무대 연기 형태가 과장된 거지. 그대로 답습했어. '이수일과 심순애'도 일본이 원작이거든. 일본말로는 '곤지키야사(금색야차, 金色夜叉)'야. 이걸 각색해서 '이수일과 심순애'로 만들었고, 한국 신파의 시작이 된 거지. 신파는 표현의 과장이란 말이지. 그 후 6.25 전쟁 지나고 1960년대까지 신파극이 있었지.

일본에서 제대로 공부한 양반들인 이해랑 선생이나, 김동원 선생이 볼 땐 신파극이 순수한 우리 언어가 아니고 일본의 아류라고 본 것이지. 그래서 신극(新劇, 서구의 사조와 방법에 영향받아 생겨난 연극으로 연극의 문학성을 강조한다) 운동을 시작한 것이 '토월회', 극예술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 등이 있어. 본바닥에서 정통 연극을 공부한 사람들이 와서 반기를 들고 신극 운동을 한 것이 우리나라의 연극이지. 이들은 스타니슬랍스키(편집자 주: 실제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리얼리즘 연극을 지향한 러시아 연극인)의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배우들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실제와 같이 연기하는 기법)를 통독한 사람들이야.

일본에선 100년 전에 안톤 체홉과 스타니슬랍스키가 다 들어왔어. 그런데 우리 대학교 땐 스타니슬랍스키의 한국어책도 없었지. 나중에 일본어 원판을 받아보고 배웠다고. 러시아는 당시 소련 때였으니 통행하면 안 되는 시기였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까, 원전과 사전을 놓고 같이 토론했어. 여기에 리 스트라스버그, 엘리아 카잔의 메소드 책 원전도 가져다 놓고 공론했어. 정보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좋은 대가들의 외화를 보며, 저런 표현법이구나고 보고 읽으면서 서로 터득하기 시작한 거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정립한 것이 오늘날 우리 연기의 기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선배들과 같이 실습을 하면서, 이해랑 선생님의 지도력을 느끼고, 현업에서의 우리 느낌이 조화되어 연극이 형성됐어. 그래서 당시 소극장 운동의 장르를 따라서 메소드가 달라졌다. 실험극장은 표준어 중심의 연기를 우리가 강조했다고. 사전 펴 놓고 발음부터 시작했어. 이건 중음이다, 장음이다, 단음이다 부터 시작해 언어의 정확성을 기르려고 했지. 실험극장 출신 배우들이 비교적 발음이 정확해. 그 부분을 강조했고, 역점을 뒀기 때문이야. 외형 중심의 시스템을 중점으로 한 곳도 있지. 외국에서 공부한 양반들이 배우들의 언어보다 블락킹(동작선)을 중심으로 연출했지. 어느 부분 자생적으로 자기 능력을 통해 훌륭한 대사를 갖출 순 있지만, 출발점은 다른 거지. 그래서 대사의 취약점이 나오는 배우들이 나오기도 했지.

   
▲ 이순재(왼쪽) 배우가 연극 '시련' 연습실에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다. ⓒ 국립극단

텍스트 중심에서 신체 중심으로 메소드 연기 사조가 이동 중이다. 이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말한다면?
ㄴ 외국과 우리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단 말이야. 우리가 한문이라는 것을 초등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가르쳤다면 우리 언어가 달라졌을 거야. 한자는 발음 체계가 다 있다고. 발음 때문에 구분이 된단 말이야. 우리가 정 씨를 이야기할 때, 나라 정(鄭)과 고무래 정(丁)씨가 있어. 이건 한문으로는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발음으로는 구분하기가 힘들어. 고무래 정 씨는 짧게 "정", 나라 정은 중장음으로 "정"으로 읽지. 이게 표준어라고. 한문을 배웠으면, 한문 선생님이 이걸 구분해서 가르쳐 주셨을 거야. "'丁'은 짧게 발음하는 거다. '鄭'은 길게 발음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조상을 바꾸는 거야." 이렇게 가르쳤을 것이지.

우리 언어의 발음은 90%가 한자에서 나온다. 한자 주장론은 아니지만, 발음체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 한글로 다 쓰되, 발음은 그 원류에서 정확하게 해야 할 것 아니야. 국어사전에 그 발음이 다 나와 있어. 거기에 따르면 될 거 아니야. 이건 교육과정에서 다 생략해버리니 언어 교육이 잘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고등학교 과정에서부터 토론 문화를 통해 언어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외국은 다 되어 있잖아. 외국은 스피칭 트레이닝을 통해 그 나라의 표준말을 다 쓰게 되어 있다고. 미국 같은데는 농부가 아닌 이상 아칸소 출신이나, 텍사스 출신이나, 와이오밍 출신이나 나오면 다 똑같은 말을 쓴단 말이야. 그게 언어 훈련이 기본으로 되어 있는 거야.

우리는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이북 말 다 섞이잖아. 근데 고쳐지지 않아. 언어 훈련이 안되어 있는 거야. 다행히 요즘은 그런 언어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 이젠 젊은 친구들이 표준말인 서울말 다 비슷하게 하더라고. 교육과정이 되어 있는데, 우리 세대는 그게 안 되어있기 때문에 언어 훈련이 배우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선 블락킹부터 하는 건 언어가 다 구축되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지. 우린 기본이 안 되어 있는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어. 착각하더라고.

   
▲ 배우 이순재(왼쪽)가 연극 '시련' 제작발표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립극단

경상도 사람이 미국 가서 공부해 왔는데, 영어는 잘하지만, 경상도 말이 고쳐지나. '햄릿'을 하는데 사투리로 말을 하니 다들 '킥킥'거리고 웃고 말았단 말이야. 그건 뭐냐? '햄릿'도 하려면 서울 표준말을 써야지. 그럼 언어 훈련을 하고 와야지. 그동안에 한국 배우 열전을 보게 되면, 연극, 영화, TV를 넘나드는 배우는 적어도 표준말을 구사할 수 있는 배우지. 그걸 못하는 배우는 한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일정이 바쁘다 보니까, 무관심해서, 그걸 아니고도 현상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니 지나쳐 버린 것이란 말이야. 그 이상 발전이 안 되는 거라고.

영화배우도 마찬가지야. 과거엔 후시 녹음이니까 나중에 성우들이 대본을 표준말로 했기 때문에 됐지만, 본인은 언어 극복이 안 되어 있단 말이야. 그러니 동시 녹음하니까 일을 못 하는 거야. 그래서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언어 훈련이 다 안 되는 조건에서 말로 먹고사는 직종을 선택한 입장이라면, 아나운서랑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특수한 전제가 없는 한 당연히 표준어를 구사해야 해. 왜? 언어는 지방과 나이와 시대를 초월해서 다 알아들어야 한다 이거야. 요즘 아이는 알아듣는데, 어른은 못 알아듣고.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말을 모른다는 것은 안된다는 이야기야.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매체를 넘나드는 배우들에게 "왜 연극배우가 TV 드라마로 가는가?"라는 시선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자유롭게 매체를 넘나드는 가치관이 분명하게 있을 것 같다.
ㄴ 그 원칙이 분명해. 내가 TV를 선택한 동기는, TV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거보다 우선한 것이 연극에선 돈 한 푼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있든 없든 현상 유지도 어려운 조건이라 돈을 받을 수도 없다고. 나이는 30대가 넘어서는데, 생계조건을 마련해야 하는 거 아니야. KBS TV가 개국했는데, 관영이니 출연료는 줄 것 아니냐 이거야. 먹고 살기 위한 절대적 조건 하나였었다고. 연극을 한다고 굶어 죽을 순 없었잖아. 그 당시 연극을 하면서 돈을 줬으면 우리도 했지. 고집할 수 있었지.

   
 

배우는 모든 기능을 다 활용할 수 있어야 해. 로렌스 올리비에, 장 루이 바로도 영화랑 TV 다 했다고. 우리나라가 한때 어떤 폐쇄적인 발상이 있었느냐면, 1964~65년도에 연극배우들이 다 TV로 진출했다고. 연기력이 탄탄했거든. 언어 구사도 확실하고. 시간 잘 지키고. 그러다 보니 영화 조연급 배우들이 질투하기 시작한 거야. 자기도 TV 와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서. 그러니까 1970년대엔 영화배우는 영화만 하고, TV 배우는 TV만 하자고 가르자는 이야기가 나왔지. 내가 영화배우협회 이사를 했을 때 표결을 했어. 숫자도 기억해. 11대 3으로 우리가 졌어. 그런데도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 돌아가신 허장강 선생, 윤일봉 선생 이 셋이었다고. 나머진 다 반대했어. 나중엔 그 극렬히 반대한 사람도 TV 출연해서 용돈 얻어 썼다고.

일종의 편견을 고집하던 시대가 있었어. 그게 영화 발전의 하나의 과정이었는데, 어리숙한 시절이었지. 연극도 마찬가지라고. 연극만 해도 먹고 살면 상관없지. 좋다 이거야. 연극적 순수함을 위해 연극을 고집하는 것, 숭고한 거야. 하지만 TV라고 해서 꼭 상업성은 아니다 이거야. 물론 막장드라마 나오니까 상업성이지. TV는 어쩔 수 없이 시청률로 경쟁하니까. 한국 영화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엔 예술을 특히 강조했다고. 임권택 감독 같은 경우 젊을 때 같이 했을 땐 상업 영화감독이었어.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자세를 변화해서 예술 거장으로 등극한 게 임권택 감독이라고. 자세 변화가 가능한 이야기라고. 본인의 행위에 대한 정신이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 이거야.

지금도 그런 이야기를 듣지. 쉽게 이야기하면 우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안 돼. 심사가 있으니 신청하라고 하는데, 신청하고 거기 들어갈 생각이 없어.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배우를 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하는 거고, 내가 생각하는 건 관객이지, 특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를 분명히 해. 그리고 내가 광고를 많이 하니까 상업적이라는데, 그건 어쩔 수 없어. 내가 예술의 순수성을 지킨다고 가족을 다 굶겨 죽일 순 없잖아. 우리가 양면이 있어. 생활이란 조건 아래 현실적 타협, 예술이라는 정신의 유지가 있다고.

요즘 보면, 연극에서 고생하던 분이 대거 TV, 영화 진출하고 있다고. 왜? 당연히 해야지. 연극 하느라고 한 달에 간신히 백만 원 받던 사람이 TV 나와서 이백만 원 넘게 받아 가족 먹여 살릴 수 있으면 당연히 해야지. 안 할 게 뭐 있느냐 이거야. 거기서 명성도 올리는데, 이걸 연극에 와서 더 이바지할 수 있지 않느냐 이거야. 관객 동원도 이바지할 수 있고. 그게 왜 나빠? 그걸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한번 재평가 해 봐라. 이거야. 왜 나는 TV를 못하는지 반성하란 말이야. 일부는 부러워했고, 몇 번 TV 와서 출연했는데 별 효과가 없었어. 그러니까 슬슬 비평하고 딴소리하고 앉아있는 거 아니야. 아픈 소리지만 이건 당당히 이야기해야지. 젊은 시절에 항거할 때, 너 한 달 동안 만든 연기 우리는 열흘이면 만들 수 있어라고 말했어.

   
▲ 연극 '시련'의 한 장면 ⓒ 국립극단

'꽃보다 할배' 방송 당시 '직진순재'라는 별명이 있었다. 본인의 별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ㄴ 우리가 상업적인 다른 기능이 별로 없어. 이것저것 걸쳐선 아무것도 안 됐기 때문이었지. 음식점도 해보고, 사업하는데 관계 쌓고도 하는데 안 된다. 좀 어려웠던 시절에 만둣집을 했다. 만둣집 프렌차이즈 사업을 당시에 크게 했으면, 오늘날 각종 프렌차이즈로 돈 좀 많이 벌었을 거야. 그걸 내가 못하게 했다고. 그것 때문에 마누라가 구청 위생과도 만나고 그러더라고. 내가 제일 만나기 싫어한 사람이었어. 내가 하는 활동에 시장이 있으면 안 된다 이거야. 결국, 마누라한테 죽으나 사나 내가 벌어 먹인다고 했어.

그래서 연기의 길로 쭉 직진하는 것밖에 없어. 요즘은 뭐 사회적 연륜이 있으니 그런 기능에 이바지할 수 있으면 마다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우리 때는 우리 직종 가지고 정부나 구호 단체에서 홍보대사를 시켜준 적이 없었지. 이젠 우리 직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그만큼 세상의 보는 눈이 열리다 보니 홍보대사도 해 달라고 하지.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어. 그래서 옛날에 사업하던 친구들은 다 연극에서 멀어졌어. 돈은 많이 벌더라고. 후배 탤런트 보면 여의도에서 음식점 해서 유명한데 통장이 30개 되더라고. 그 정도면 재벌이지. 가면 연기하는 사진이 쫙 붙어 있어. 그래도 여기에 관심 있고 미련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연기 가지곤 높은 위치에 못 올라가니, 포기하고 돈 벌었다고. 그런 경우도 있는 거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었나?
ㄴ 신군부 들어서 민주정의당이라는 당이 생겼는데, 신군부에서 당시 탤런트협회 회장인 故 이낙훈 씨한테 비례대표 제의가 왔어. 당시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직종에서 집권층에서 비례대표 제의가 온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이해랑 선생이 유신정우회 때 제8대, 제9대 국회의원이 됐었어. 예총 회장이라는 신분이라는 명분 때문에 국회의원이 한 것이 연극인으로는 처음이었어. 유신정우회 때니까 임명직 비슷한 것이었고. 그 이후로 현실적으로 공화당 시절에 정치에 관심 있는 몇 분이 참여했고, 결국 안 됐고.

제11대 때 이낙훈 군이 비례대표로 들어가서, 문화예술진흥대표로 들어가니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그때만 해도 문화 정책은 국회의 흥정거리도 안 돼. 관심 밖의 영역이라고. 내가 1992년 국회의원 할 땐, 문체부 예산이 국가 예산의 1%도 안 되더라고. 그 정도로 열악했으니, 구체적인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도와줄 테니 열심히 해라고 했더니, 당에 들어가자고 했어. 그래서 들어가 보자 했는데, 각 분야 최고 예술가들이 다 들어가 있었더라고. 이런 분들이 모여서 정책을 만드는구나 해서 참여했지.

   
▲ 연극 '시련'에서 '댄포스'를 맡아 열연 중인 배우 이순재. ⓒ 국립극단

그러다 제13대부터 중선거구가 소선거구로 개편됐어. 중앙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이 있었던 모양인가 봐. 그래서 제의가 오더라고. 난 안 했고, 정치할 생각이 있으면 그 이전에 했을 것이지. 대학 동기들이 제10대 때 대거 국회에 진출했었지. 하려면 같이 들어가서 했지. 지금 내가 다 늙어서 뭐하겠는가. 이렇게 완강하게 거절했어.

나중에 제주도 가서 촬영하다가, 서귀포에서 저녁밥 먹을 때 공천 발표가 나오는데 나보고 나가라는 지역이 건너뛰더라고. 잘 됐다 했지. 왜냐하면, 그땐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무슨 돈이 있어. 아파트 하나 가지고 먹고 살고, 애들 공부시키는데 그건 안 되겠더라고. 그러더니 중랑 갑에 공천됐어. 생소한 지역이야. 알아보니 동대문구가 분구되어 신설된 동네였어. 면목동에 지역이 된 거야. 서울에 올라가니 이젠 결제가 끝났으니 해 보라고 이야기가 나왔지.

그곳은 역대 선거에서 우리 쪽이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곳이었어. 동네를 표가 안 나오니 내버리고 갔어. 사람들이 떨어질 줄 알고 보낸 거야. 동네가 서울의 동쪽 끝이지만, 당시엔 시골이었다. 1동에서 8동까지 하루아침에 다 전파가 되는 완전한 시골 동네였어. 그만큼 어떤 면에선 정이 깊은 동네였고, 사람이 순수했어. 절대 열세 지역에서 내가 후보가 되니 백중지세라고 하더니, 표를 까보니 750표라는최근소차로 졌다고. 그러니 동네에서 난리가 난 거야. 지역 유지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가 열심히 뛰었으면 됐을 텐데"라고 말했다. 행정적 뒷받침이 하나 없이 됐기 때문이야.

그때 행정적 뒷받침이 되고, 중랑구가 제 기능을 발휘했다면 내가 됐을 것이야. 당에서도 불만이 많았었나 봐. "왜 탤런트를 내보냈느냐"였지. 우리 구 다른 쪽만 해도 전직 장관에 국회의원 두 번 세 번 한 양반이 왔었지. 물론 그 양반이 두세 배 이상으로 떨어졌었고. 그래서 다시 한 번 해보자고 하니 동네 사람들이 매달리더라고. 내가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겠다고 했어. 그 후 3당 합당이 되고, 지원자가 많을 것인데 그때 되면 내가 편안하게 옷을 버리고 나가면 되겠다 생각하고 당에 "가난한 동네이니까, 돈 많은 사람 보내라. 여기서 돈 얻어 쓸 데가 없다. 그리고 힘 있는 사람 보내라. 지역 개발할 곳이 많다"했는데 안 오더라고.

그래서 50일 남겨두고 다시 당에서 연락이 왔고, 한 번 더 해보라고 했어. 4년 동안 또 열심히 다졌지. 당원과 일체화되어서. 그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가 된 거야. 선거를 치러서 750표가 3,800표 차이로 바뀌었지. 그렇게 당선이 됐지.

   
 

4년 동안 문공(현 문체부)에만 쭉 있었어. 다른 데 가봤자 허수아비일 테니. 내 분야에서 이바지할 방법이 없을까 해서, 문화 정책에 대한 본회의 기조연설도 했지. 대정부 질문도 장관 앉혀놓고 본회의에서 이야기했지. 우리 직종 가운데, 대정부 질문을 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야. 나이 60이 되고 제15대 출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가 돈이 없어서 못 하겠다 했어. 당에선 대주겠다고 했는데, 얼마를 대줄지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돈 없다고 하는 사람이 내가 돈을 셀 수는 없지 않겠어. 사무국에 맡겨두고 일 뛰는 것에만 열심히 했지. 제15대 되니까 공짜로도 못하겠고.

여론이 상당히 좋았어. 오히려 문공위 야당 위원들이 한 번 더 해보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아니라고 했지. 내 직업은 이게 아니고, 60이 이제 될 것인데 내 직업은 연기였지. 문화예술 정책에 이바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것이었지.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했지. 돌아가는 것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갈 곳 없어서 연기 일에 들어가면, 밥벌이나 하려고 들어가는 추한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아 딱 그만뒀지.

정치 생활 이후 연기에 복귀하면서 동시에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계기가 있을 것 같다.

ㄴ 처음 학교 강단에 서게 된 건 1998년 세종대 영화예술학과가 생길 때부터였어. 그때도 전임을 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전임의 조건이 아니다. 내가 이걸 학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 내 본업은 행위지 교육이 아니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여러 번 거절했어. 여러 군데서 요청한 걸 내가 다 거절했다고. 근데 세종대는 "지역구였던 면목동하고 가까운 데니, 특강 좀 해주시면 될 거 아니냐"라고 했어. 정확히 지역구는 아니지마는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너무 간곡하길래 그래 한번 가보자고 갔지.

강론 식의 내가 아는 식견 가지고 얘기했는데, 이게 뻔한 그 얘기가 그 얘기였던 거지. 요즘 같으면 서점가면 연극 관련 서적이 백여 권 나와 있잖아. 국내 작가 것이든, 외국 작가 것이든 이제 자료가 풍부하단 말이야. 또 일반 학생들 수업을 하다 보니까 출강하는 참여도가 아주 불확실해. 2시간 만에 나타나는 놈, 도망가는 놈, 별놈 다 있더라고. 가만 보니 별 의미가 없더라고. "괜히 시간 뺏겨가면서 이 짓 할 필요도 없고, 그만둬야겠다. 내가 사퇴한다"고 얘기했더니, 정이 든 젊은 교수들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애원하더라고.

   
▲ 이순재(가운데) 배우가 연극 '시련' 연습실에서 후배 배우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 국립극단

그러고 보니 진짜 애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제삼자는 어떻게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양심으로 봐서는 제대로 가르칠 수 없던 거야. 그래서 1, 2학년보다 3학년 이상의 학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말했어. 한 10년 가까이 맡아서 워크숍도 하고 그랬지. 재밌는 거는 일반 강의 때는 불성실했던 녀석들이 딱 배역이 정해지니까 이거는 뭐 한 명도 안 빠지고 참여하는 거야. 내 수업시간이 하루 4시간이나 마찬가지인데, 매일 연습을 하다 보니까 매일 저녁 애들이 나오는 거야.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다음에 발표하고. 발표하면서 수업이 끝나는 거야. 그걸 연속해 왔는데 그 효과가 난 있다고 본다고. 우선 물론 아이들이 현업에서 참여한다는 것. 연기를 직접 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나 봐. 그다음에 잘하는 아이들 뽑아서 하는 발표회가 아니라, 대학 발표이고 수업이기 때문에 내 수업엔 배역을 전부 제비뽑기로 했어. 각자가 자기 배역을 뽑는 거야. 그럼 배역이 왔다 갔다 하는 거지.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왜 단역인가 하는 친구가 있고, 나는 도저히 못 하는데 왜 주연인가 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상관없다는 얘기야. 이건 교육이니까. 똑같은 기회균등이었지. 그렇게 훈련하면서, 거기서 눈을 뜨고, 터득하는 쪽이 생기는 거고. 거기서 자기 조건을 재발견하는 그런 경우들이 생겨. 이 교육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해. 그다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는 역시 언어 훈련이야. 지금 일부 대학에서도 언어를 강조해서 구체적으로 거기서 시작하는 교수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 부분을 그냥 건너뛰더라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 현업인 TV나 영화, 연극에 나가면 말부터 시작하는 거지. 무슨 팬토마임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퍼포먼스부터 시작하는 거 아니란 말이야. 그건 연극의 어떤 연출 행위지 기본적인 연기 행위는 아니란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냐에 요점을 둬서 지금 연기하는 '시련' 작품을 한 거야. 한 달 동안 말 훈련이라고 하면서, 젊었을 때 해보고 싶은 작품들, 못했던 작품들. 이런 작품들을 다시 접하고 보니 너무 작품들이 좋은 거야.

   
 

앞으로 연기 계획을 듣고 싶다.
ㄴ '시련'이 끝나면 내년 2월 중순부터 방영 예정인 김수현 작가의 '그래, 그런거야' 드라마 촬영이 1월부터 시작할 것 같아. 재미난 홈 드라마일 것 같고. 또 내년에도 연극을 한두 편 할 것 같아. 작년에 했던 구태환 연출의 '사랑별곡' 리바이벌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 타이밍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몰라. 국립극단에서도 어떤 작품을 할지. 내년 라인업 발표 나오면 살짝 보고 한 자리 끼어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웃음) 연기 인생 60주년에 대한 것은 크게 기념할 필요는 없어. 그 이상으로 한 양반도 많고. 60주년으로 끝난다면 기념이 되겠지만, 능력 있으면 61주년, 62주년 앞으로 쭉 계속해야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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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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