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50여 년 동안 사실주의 계열의 산극 등 한국의 대표적 연극연출가로 극단 뿌리 창단을 통해 다수의 작품 연출 및 아비뇽세계연극제에 참가하는 등 연극발전에 이바지함."

지난 12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5 문화예술발전유공자 시상식'에서 김도훈 연출(73)이 국가에서 주는 보관 문화훈장을 받을 때 나온 멘트였다. "나 혼자 '독고다이'로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연극을 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한 김도훈 연출.

그는 194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원산철수' 당시 피난을 해 부산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피난을 통해 느낀 그는 자연스레 연극에 빠져들었고, 서라벌예술대를 나와 1976년 극단 뿌리를 만들었다. 이후 '유리동물원', '이성계의 부동산', '조용한 식탁' 등 100여 작품을 연출했다.

또한, 1987년 한국 연극예술상, 1992년 서울연극제 대상 및 연출상, 1997년 서울연극제 대상 및 연출상, 2001년 예총 예술 문화상 대상, 2012년 한국연극협회 자랑스러운 연극인상을 받았다. '소극장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인물, 김도훈 연출을 시상식 후에 만나 그의 연극 인생과 철학을 들어봤다.

오늘(12일) 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소감을 듣고 싶다.
ㄴ 모든 문화예술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길, 고뇌의 길, 외로움까지 어떻게 보면 폐허 속에서 창조력 하나만으로 사막에 유리성을 쌓는 것 같은 길을 걷는다. 연극이 무조건 좋았다. 무대에 대한 동경에서 더 나아가 신기루 같은 환상 때문에 연극에 뛰어든 지가 50년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 고난의 길을 헤치고 왔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런 면을 흔히 열정이라기도 하고, 광기라고 할 수도 있다. 돈키호테처럼 "나의 길을 가련다" 방식으로 지금까지 온 것으로, 외형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재산으로, 이 상을 받게 됐다는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할 뿐이다.

공부를 잘했음에도 서울대에 연극영화과가 없어서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로 간 것이 사실인가?
ㄴ 그건 사실인 것 같다. (웃음) 부산에서 다들 명문이라고 하는 경남고를 다녔는데, 그때 공부 잘하는 졸업생은 서울대, 못해도 연·고대를 갔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나온 것 같다. 지금은 인터넷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겠지만 그 당시엔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연극이나 영화를 하려면 대학교가 하나가 있는데, 바로 서라벌예술대였다. 그래서 그곳만 가면 무조건 연극을 할 수 있고, 더 잘하면 할리우드 같은 곳에 진출해 영화감독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중·고등학교 때 서라벌예술대에 진학하겠다고 하니 주변에선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장까지도 "왜 하도 많은 직업 중에 광대의 길로 가느냐?"라고 했다. 195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원시시대나 다름이 없었다. 산업화나 도시화를 한 것도 아니었으니, 무대 예술을 한다고 그랬을 때 주변의 충격은 대단했다. 내가 꼬마 시절 "이 아이는 잘하면 법관도 되고, 은행에 가면 먹고 사는데 지장 없고 좋은 집안에서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나? 내가 생각하더라도 이상할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연극을 시작했다. (웃음)

   
▲ 지난 12일, 김도훈 연출(오른쪽)이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으로부터 보관 문화훈장을 받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이야기를 듣고 싶다.
ㄴ 나 혼자 '독고다이'로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연극을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혼자 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1960년대 주변의 많은 나 같은 젊은 극작가들이 많이 있어서, 이분들의 협조로 좋은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연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보면, 사교성이 없었다. 연극이 종합예술이다 보니 극적 협력이 필요했고, 많은 자금이 들어간다. 그런 것에 대해 능력 부족으로 인해 가난의 길로 많이 들어선 것 같다. 다행히 고등학교 동기들이 극단 만드는 것과 제작비까지 돈을 모아줘서 극단 뿌리를 만들고 있다. 고마운 동기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동기들에 의해 하나씩 하나씩 올라갔다. 내가 소극장 운동을 그러고 보니 가장 열심히 한 것 같다.

최근에 올린 '조용한 식탁'도 따지고 보면 등장인물이 3명이고, 세트도 간단하다. 왜 그러한 작품에 섭렵하게 되었다면, 1960년대부터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립극단 최연소 연출, 경기도립극단 연출, 서울시극단 연출을 할 때 보면 나한테 제의가 온 것이 소극장 연출이었다. "김도훈이 연출하면 소극장의 내밀하고,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 그리고 정서 등에서 상당한 자극점을 가질 수 있고, 분석과 해석이 차분하다"는 소문이 나게 됐다. 그게 다 가난에서 온 것이었다. (웃음)

민중, 실험극장, 자유, 여인, 민예, 현대극장 등 극단이 몇 개 없었던 1976년 당시에 태어난 극단 뿌리는 한국 연극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ㄴ 그 당시엔 '동인제 시스템'(편집자 주 :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 출자와 공동 운영의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극단)이 중심이었다. 극단 뿌리는 여기에 반발했다. '동인제 시스템'의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었다. 배우들이 다 주인공을 하려고 해서 내분도 일어나기도 했다. 공연의 추진력도 약화하고 했다. 그래서 '프로듀싱 시어터'(편집자 주 : 극장이 연극의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드는 것을 의미) 개념으로 만든 것이 뿌리다. 당시 삼일로창고극장의 운영을 맡으신 이원경 선생님이 '동인제 시스템'에 반발하고 좀 더 진취적인 젊은 연극인들이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이원경 선생님이 '프로듀싱 시어터' 시스템을 1970년대 중반에 들고 왔다. 내가 산울림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감독도 하고, 국립극단의 무대감독 등 여러 일을 한 시기였는데, 선생님이 30대 젊은 연출가 중 나와 오태석 연출, '에쿠우스' 초연으로 인기가 올라간 김영렬 연출을 불러왔다. 그리고 무대를 무료로 내주고, 제작비도 줄 테니 작품을 마음대로 해보라고 제안했다. 당시엔 어느 극단에 소속하지 않으면 데뷔도 하지 못할 때였다. 아무리 똑똑해도 선배가 "다음엔 난데"라고 말하면 꼼짝 못 할 때였다. 이 배역에 적당해도 "넌 엑스트라나 해"가 되는 것이었다. 이원경 선생님의 제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입장 수익의 7할은 너희가 갖고, 3할은 극장 운영비로 달라"고 했는데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이 시스템이 대박이 났고, 극단 뿌리가 생겨났다.

   
 

당시 어떤 작품을 했나?
ㄴ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추송웅, 이성웅이 나온 1977년 작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동물원 시리즈'를 많이 한 것 같다. (웃음) 또 여기에 1976년엔 추송웅, 차혜영이 나오는 '바다 풍경'을 연달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했다. 당시 얼마나 관객이 많았는지, '동물원 이야기'를 할 땐 남자 둘만 나오는데도 초대권 없이 예매 형태로 하루 세 번씩 공연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연극이 1시간 10분짜리였다. 4시, 7시 공연을 해도 관객들이 가질 않아서 9시에도 공연했다. 연기자들이 파 죽음이었는데, 너무나 관객이 많이 와서 다들 신이 났다.

김도훈 연출을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유리 동물원'이다. 어떤 연출을 했기에 평가가 좋았는가?
ㄴ 사람들은 "김도훈의 최고 장점은 시적 분위기가 충만하고, 캐릭터가 각 배우에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분석이 탁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내 별명이 '분석 김'이 됐다. 분석을 다들 지치게 할 정도로, 대학교수처럼 했다. 연출에 들어갈 땐, 섬세한 것이 연기자들에게 크게 다가온 것 같았다. 작품도 잘 고른다.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가 만족스러워했다.

김도훈 연출을 일컬어 '소극장 대가'라고 한다. 본인 생각엔 어떤 이유라고 보는가?
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잘 모르겠다. (웃음) 나는 항상 이야기하지만 '대가'가 아니라 '소가'다. 소극장 연출만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첫 번째 이유는 "참 오래 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중도에 대학교수도 되고, 사업도 하고 돈을 많이 번 후에 다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죽으나 사나 한 길로 50여 년 간 쭉 갔으니 그래서 대가라는 말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치열한 예술 정신을 가지고, 중간에 다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의 희곡을 가지고 할 때 인문학적으로 치밀한 분석을 선보였고, 그러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따른 해석이 상업적이나 놀이성을 표출한 공연이나 연극보다 더 깊이가 있으므로 '대가'라는 말을 쓴 것 같다.

   
 

특히 섬세한 연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ㄴ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출산의 고통이라고 표현을 많이 한다. 그 과정이 조심스럽고 섣부르게 할 수 없다.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르메트르가 "결단을 내릴 땐 50년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너무나 큰 기간이다. 외국 같은 경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워크숍, 훈련 과정 등 본격적 준비 과정이 많은 기간이 걸린다. 우리는 연습에서 그 준비 과정이 이뤄지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연습하면서 배우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게 된다. 연출이 왜 캐스팅이 중요하냐면, 협력 예술가를 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내밀하게 쌓여, "이게 됐다"고 하나의 총체적인 효과가 딱 떨어지면, 자신 있게 밀고 나가게 된다.

무슨 힘으로 50년을 버티면서 연극을 하게 됐나?
ㄴ 나는 피난민의 아들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피난을 하기 위해, 당시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 LST(상륙정)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LST가 요즘 말로 하면 '아파트 10층' 높이처럼 보였다. 수만 명이 서로 배를 타려고 하는데, 보트가 막 뒤집히기도 했다. 군인들이 그쪽으로 총을 쏘기도 했다. 원산 부두에 가면 명태가 상당히 많이 널려 있는데, 사람 사체가 그렇게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시절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배에 올라타는데, 절대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다. 어릴 때의 호기심으로 밑을 내려다보니 올라가다 힘이 없어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봤다. 떨어지면 다 죽는 것이었다. 안 본 사람들은 그 처참함을 모른다. (이번에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흥남철수' 장면이 나왔었다.) 그걸 일부러 안 봤다. 그 정도로 사실적일 것 같지 않았다.

아무튼, 다행스럽게 부산에 왔다. 삶과 죽음의 체험을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 '살아야 한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 앞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라는 생각이 체질화된 것 같다. 여기에 할머니가 왜 원산 앞바다에서 잘 살고, 땅도 있는 사람이 왜 우리를 데리고 부산에 갔겠는가? 자유와 평등, 인권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연극을 하게 됐는데, 딱 하나 후회하는 것이 있다. 내가 이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너 결혼하지 마라"고 했다. 왜냐고 묻자 "그 길이 십자가의 길처럼 험난할 텐데 색시 데리고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이냐?"고 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을 안 했어야 했다. (웃음) 어쩔 수 없었다. 결혼하고 애도 낳으니,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다.

   
 

지금까지 연출을 해오면서, "이 작품은 내가 봐도 정말 잘 만들었다"할 연극이 있다면?
ㄴ 1976년에 폴 진델 작가의 '감마선은 달무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가 있다. 퓰리처상 수상 작품이기도 한데, 이 작품을 다 읽으니 과학에 근거한 합리적인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1970년대에 감마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과학성을 가지고 인간의 영혼까지 치유, 회복할 수 있구나. 난치병을 앓으며, 빈곤과 모든 절망의 벽에 처한 주인공이 감마선이라는 현대 과학을 통해 희망을 전한다는 이야기에 이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눈여겨본 배우들을 막 꼬셔서 했다. 작품 하면서 내 마음도 치유됐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난다. (웃음)

두 번째 작품은 비평가들에겐 찬사를 받지 못했는데, 1994년 작품 '이성계의 부동산'이 있다.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했고, 정도전 이야기다. 이근삼 선생님이 말년에 쓰신 걸작이었다. 또한, 원로배우인 김동원 선생님이 마침 80이 되셨고, 국립극단에서 은퇴할 때인데 이 작품을 통해 하겠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자체만으로 개인적으로 영광이었다. 이근삼 선생님은 이 연극은 "새로운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다"고 선언하셨고, 그분의 묘비에도 이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글귀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시작인데 정도전에 비유했고, '이성계' 역을 맡은 김동원 선생님은 사라지는 것에 비유했다. 새로움이 있으면, 해 질 무렵이 있다는 대비를 가진 작품이었다. 김동원 선생님은 이 작품을 통해 영원히 무대에 떠나셨다. 백성희, 장민호 선생님 전부 다 조연급으로 출연하셨고, 당시 신인이었던 주진모가 '정도전'을 연기했다. 여러모로 내 기억에 찬란하게 남는다.

그리고 세 번째로 1997년 작품 '남에서 오신 손님'이 있다. 원래 무대에서 영상을 쓰는 것을 참 싫어했다. 이 작품은 무용의 여러 기법을 서사적으로 융복합으로 구성했다. 당시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제21회 서울연극제에서 대상, 연출상, 신인연기상(강지은), 연기상(정동환)을 다 휩쓸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이건 놀라운 연출력이다. '유리동물원'으로 서울연극제 상을 다 휩쓴 적이 있어서, 신인에게 상을 주려고 했는데 결정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족들도 와서 봤지만, 주변 동료와 친구들도 한결같이 "역시 김도훈은 대가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웃음)

   
▲ 지난해 서울국제연극제(SPAF) 국내초청작으로 공연된 '조용한 식탁' 연습 후 김도훈 연출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문화뉴스 DB

김도훈 연출에게 연극이란?
ㄴ 연극을 삶과 죽음의 질곡 속에서 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종교라고 말하고 싶다. 연극의 기원 자체가 물론 종교적인 것에서 출발했다. 종교적인 삶 그 자체가 연극인 것 같다. 종교적인 면에서 인간의 존엄성, 전 지구적 가치가 내가 생각하는 연극이다.

이제 겨우 74살이다. 앞으로 10년 후엔 뭘 할 것인가?
ㄴ 통계도 내가 상당히 관심 있게 본다. 연극인 중에 80살 넘어서 산 사람이 별로 없다. 근래에 제일 오래 살았던 사람이 차범석 선생님이다.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또 앞서 언급한 김동원 선생님도 딱 90세에 돌아가셨다. 자타가 인정하는 연극인이라고 하는 분 중엔 이 두 분이 가장 오래 사셨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때 나는 무덤에 있을 것이다. (웃음)

10년 후에도 연극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ㄴ 나이를 속일 수는 없다. 젊은 시절과 같은 한 작품에 대한 집중력, 창조적 에너지는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작년부터 생각한 것으로 내가 소리를 좋아하니까 우리 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동편제, 서편제와 같은 우리 소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인 종합 예술에 도전해보고 싶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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