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지는 소통의 시간만큼 짧아진 마음을 바라보며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조형근 kareljay@mhns.co.kr Temporary title : My dreams.

[문화뉴스] 탄생(Birth)와 죽음(Death) 사이에는 과거부터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단어가 놓여 있곤 했다.

왕정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왕관(Crown)이 있어 왕이 되기 위해서, 또는 왕을 위해 살았다. 그러다 산업 혁명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자본주의(Capitalism)에 놓여 살아가게 되었고, 조금 더 지난 후에는 공산주의(Communism)가 등장해 두 개의 C를 갖고 살게 된다.

그렇게 냉전의 시대가 지나 21세기를 맞은 지금, 우리의 탄생과 죽음 사이엔 이것이 있다. 바로 '소통(Communication)',

일상 생활에서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나, 심지어 업무에서마저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 현재 우리의 삶은 소통으로 시작해 소통으로 끝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통, 추상적 의미로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영어의 어원은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ommunicare'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국어의 추상적 의미에 '오해가 없음'이라는 표현이 있긴 하지만, 넓게 보면 국어든 영어든 다시 말해 나의 말과 상대방의 말이 서로 오가며 입장을 받아들임을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소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쉬운 예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소통'의 의미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TV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보면 손쉽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시청자의 즉각적인 의견을 무시하는 출연자에겐 '불통왕'이라는 칭호가, 시청자 의견을 읽어내리며 중간마다 진행을 변경하는 출연자에겐 '소통왕'이라는 칭호를 내리는 것처럼.

   
 

사실 소통이 우리네 삶에 중요한 키워드가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선, 소통하기에 걸리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오래 걸렸고, 물리적인 방법 또한 다양하지 않았다. 서신이라도 보낼라치면 일단 펜으로 종이에 써야만 했고, 그 후 우체국을 통해 며칠 간의 시간이 걸려야만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전할 수 있었다(-굳이 파발마 시절까지 올라가진 않기로 하자-).

그러다 조금 더 빠른 수단으로 전보가 등장하고, 전화가 등장해 사람들의 소통방식은 좀 더 다양해지고, 시간적 단축이 상당 부분 이뤄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전화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지만 결국 통화를 끝낸 시간 외에는 말을 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물론 요금을 무시하고 24시간을 통화에만 쏟는다면 불가능할 건 없겠지만 하루종일 통화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이 한계점은 휴대전화의 등장과, 무선인터넷의 발전을 지나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하며 해결돼버린다.

무선인터넷과 결합한 스마트폰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고, 아울러 소통의 의미를 대번에 바꿔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통화보다는 메신저나 메일을 선호하게 되었고, 통화 중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여기에 SNS의 등장으로 마침내 과거의 소통방식이 가진 문제점인 시간적인 문제도 없애버리고 만다. 더 이상 일일이 메신저를 통해 개별적으로 나의 감정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 한 장과 내 감정을 드러내는 혼잣말 몇 구절을 SNS에 올리면, 그를 본 사람들은 제각각이 반응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내가 자고 있건, 깨어 있건, 지구 반대편에 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되어 시간별로 무차별적인 소통이 이뤄진다.

핵심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소통의 방식은 다양해지고, 소통에 걸리는 시간 또한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척 긍정적인 일이라 해야 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해 외로움을 느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걸리지 않는 시간을 투자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하루의 24시간을 소통하는 데만 사용해도 모자라 소통을 대행해주는 직업까지 등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안타깝게도,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렇지 않다. 외려 소통을 위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이 등장하고,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점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짧아진 시간만큼 소통에 진정성이 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편지를 쓰던 옛 시절처럼, 한 줄 한 줄을 써내려가며 표현을 고민하고, 이 말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며 몇 번이고 고쳐 쓰던 그때처럼 메신저 한 마디에 고민하는 존재일까?

왜 한 장의 사진 밑에 수많은 좋아요를 위해 내 감정이 어떻든 간에 조작을 통해서라도 소통하는 '척'하는 사람이 되려 할까?

왜 진실한 한 마디보다 뭔가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만한 '드립'을 생각해내려 애쓰며 살아가려 할까?

이렇게 짧아진 소통이 되려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이든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소통마저 빠르게 소비하려 드는 경계선에 놓여 있다.

소통이란 서두에 말했듯이 뜻이 서로 오해 없이 통함으로, 서로 생각을 나눔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소통만큼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이어나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려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통을 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소통하며 삶의 이유를 찾아갈 수도 있다는 것인데 빠르게 소비해 나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불과 이렇게 되기 십여 년 전을 생각해보자, 우리 모두는 마음을 나누기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오늘만큼은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해 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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