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 권위와 존경 그 사이.

[문화뉴스] 드라마를 보지 않은 이들도 '연민정'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 그 주말 드라마의 악녀?' 라고 반응할 정도로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왔다 장보리'. 제목에도 이름이 들어가 있는 주인공 '보리'보다 더 주인공 같은 연민정은 웬만한 악녀는 울고 갈 캐릭터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홀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새 부모를 찾아 입양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아끼고 의지하게 해 주었던 남자를 버린 것도 모자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마저 저버렸다. 애초에 가진 것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답시고 독해질 것도 없으니 나는 억울하고 이럴 만하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이고, 간혹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그 악행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부정한 그녀는 비난받지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외면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 없는 주인공 '장보리'는 이해받는다는 점이다. 시청자도, 극에 등장하는 누구도 그녀를 불효녀라 욕하지는 않는다. 왜일까?

   
 

이러한 차이는 그녀들이 각각 자신의 어머니를 어머니라 여기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 기인한다.

연민정은 '가난하고 자신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어머니를 버렸다. 대학에 보내줄 형편이 안 되는 그녀의 자식이기보다, 자신을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 줄 부모를 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과도할 만큼 그녀를 위하고 사랑해, 그녀의 악행까지도 돕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버림받은 이유는 단 하나, '가난'이었다. 반면 장보리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돌아선 것은 그녀의 '인성'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죄 없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도 반성하지 않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거나 어머니로서 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이유였던 것이다.

이처럼 연민정은 비난 받지만, 장보리의 행동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렇다면 '나쁜 부모', 즉 부모답지 못한 인성을 지닌 부모는 자녀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마땅한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이다. '나쁜 부모라면 자식에게 외면당해도 싸다'는 것과, '나쁜 부모라 하더라도 부모를 자식이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유교적인 혹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또 윗세대일수록 후자에 한 표를 더할 가능성이 크다.

'부모-자녀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긴밀하고 유일한 관계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그 어렵고 고된 과정을 아무 대가나 보상 없이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마음으로 도맡는다. 그렇기에 그런 부모의 노고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효도하려는 자녀의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고, 좋은 부모-자녀 관계라면 위와 같은 의문을 품을 것조차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정말 '부모답지 못한 부모'에 대해서는 어때야 할까. 여기에서 '부모답지 못한 것'이란 단지 경제적으로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말할 것 없지만, 자녀의 인생을 본인이 관리하고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부모 또한 자녀를 그들의 소유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좋은 부모라 할 수 없다. 그런 부모가 '내가 너의 부모이기 때문에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하고, 나를 부모로 존경해야 한다'고 권위를 내세울 때, 그 부모로서의 입지라는 것은 의미가 퇴색되고 폭력적인 것이 된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아내와 자식에 대한 폭력을 일삼던 주인공 장재열의 양부를 과연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 한 에피소드에서 다루어졌던 경우처럼, 트랜스젠더가 되었다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부모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를 반복하던 '세라'는, 가족이고 부모라는 이유로 언제까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맞는 선택인 걸까?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어진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부모 세대는 안쓰럽다. 자신들은 부모들에게 조건 없는 자녀로의 역할을 해 왔지만, 그 아래 세대인 본인의 자녀는 이를 당연시 여기지 않는다. 경제적인 서포트 뿐 아니라, 정서적인 영역에서도 이러한 괴리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본인은 시어머니에게 평생을 구박당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며느리와 자식에게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해 억울하다는 사연은 울화통이 터질 만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풀어내고자 앞으로도 세대를 이어 잘못된 고리를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더없이 위험하다.

'관계'는 두 사람이 반씩 기여해 형성한다. 그리고 어떤 관계이든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소통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게 되었을 때, 그 관계는 고인 물 마냥 썩어 들어가기 마련이다. '내가 너에게 이런 위치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위하고 존경해야 해.'라는 명제는 이미 '나는 굳이 너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좋은 사람이고자, 부모이고자 노력할 마음이 있는 이라면 굳이 저런 말이나 상대의 조건 없는 복종이 필요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무서운 부모, 거역할 수 없는 부모에게 우리는 마치 독불장군 같은 상사에게 하듯, 내 의견은 없는 듯 존경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존경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그 자녀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마도 수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후 어디에서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위축된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해온 자녀가 진심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꺼이 언제든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이 더욱 병든 위험한 관계임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부모 역시 사람이고, 부모라는 역할을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역할만큼이나,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갖는 기대 역시 과도한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렇기에 계속적인 소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강압과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부모이자 어른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평가나 처벌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의 '태도'에 대한 교육이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거나 뉘우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다. 이러한 개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히려 망가진 아이(spoiled child)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한다고-가령 성적이 떨어졌다고, 좋은 대학에 가거나 취직하지 못했다고,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고-비난하고 책망하는 것은 자녀의 성장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실력과 결과로 인한 평가는 이 사회를 살아가며 차고 넘치게 경험한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의 기준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부모이든 자녀이든, 그에 대한 평가나 비난은 '실력이나 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글] 아띠에떠 미오 artietor@mhns.co.kr

미오(迷悟): 좋아하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여주인공 이름이자, '미혹됨과 깨달음'을 통틀어 의미하는 말.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심리학, 연세대 임상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임상심리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필자 블로그 방문가기  * 아띠에터는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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