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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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불행한 일이 느닷없이 찾아와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심을 잡으려고 강하게 맘을 먹고 이를 악물어도 의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무너지기 마련이죠. 눈시울이 붉어져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을 어찌 막을 수 있나요. 멈추려 해도 쉽사리 멈추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맘껏 통곡하라고 우리에게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시인의 조언처럼 소리 내어 맘껏 울어 가슴 속 상처와 현실적인 문제가 씻은 듯 해소된다면 백번이고 통곡을 할 겁니다. 그러나 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리 없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울고 나면 좀 개운한 느낌은 있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그치고 나면 다시 또 가슴 속 설움과 현실적인 문제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몇 해 전, 저 역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가슴 속에 눈물의 파도가 울렁인 적이 있었습니다. 불행한 일은 왜 그렇게 도미노처럼 연속적으로 터지는 걸까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가족의 병환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 글쓰기에 대한 회의, 불면증, 큰 형님의 이혼과 작은 형님의 생활고 등등.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힘든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는 지인이 저에게 얼굴이 많이 상했다며 왜 이렇게 인생을 재미없게 사느냐하고 말했을 때는 시쳇말로 ‘멘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하는 건가? 재미는 무슨! 아무 일도 없으면 다행이지. 그 지인의 말에 제 자신이 더 초라해지는 듯했습니다. 왜 나에겐 인생이 팍팍하고 무료하고 힘겨운 걸까.

한참 힘겨울 때 다행히도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만났고 그 책은 저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미의 우림 지역에는 데사나라는 부족이 사는데 이들은 삶과 죽음에 일정한 균형의 법칙이 있다고 믿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모든 탄생은 사망을 낳고, 모든 사망은 탄생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이 얘기를 사냥에 대입해본다면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할 때 자신이 죽이는 동물이 영혼의 우물에 구멍을 남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냥꾼이 죽으면 동물이 남긴 영혼의 우물을 메운다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주고받으며 일정한 균형을 이룬다는 거죠. 즉 사람이 죽으니 새나 물고기가 태어난 것이고 새나 물고기가 죽으니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모리 교수의 철학과 사색이 담긴 이야기이지만 저는 불행과 행복 또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불행이 어쩌면 머지않아 찾아올 행복의 전초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터널을 만나지만 그 어둠이 계속 되지 않는 것처럼, 해가 지면 곧 해가 뜨는 것처럼, 꽃이 지고 이듬해에 다시 화사하게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처럼 불행의 질량이 소비되면 그 빈자리에 행복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영원한 불행은 없습니다. 끝이 없는 터널은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불행이 조금 더 빨리 끝나고 누군가는 조금 더 지속되고의 차이뿐입니다. 언젠가는 불행의 끝을 만나겠지요. 그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 시작점이 바로 지금보다 더 성숙한 내 자신과 만나는 시간일 것입니다.

혹여 당신은 지금 불행의 늪에 빠져 있습니까?

눈만 뜨면 눈물이 나는 나날의 연속입니까?

울지 마십시오. 다 지나갈 테니까요.

저 역시 지금 삶과 주변 환경이 그다지 개선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힘을 내려합니다.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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