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한 때, 그는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축 대전에도 입상한 건축학도였다. 그랬던 그가 한국영화계의 인재를 육성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에 9기로 졸업한 영화인이 됐다.

영화 일을 한다고 어머님과 의절을 할 뻔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는 한국영화계를 위해 일했다. 각본, 촬영, 심지어 단역으로도 출연한 그는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에선 제작진행, '아름다운 시절'(1998년)로 조감독, '내 마음의 풍금'(1999년)으로 프로듀서를 하더니 '아나키스트'(2000년)엔 첫 상업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문화뉴스에서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에서 처음으로 선정한 영화계 인물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유영식 KAFA 원장이다. 그가 전하는 자신의 이야기, KAFA의 비전, 그리고 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들어보자.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소감은?
ㄴ 기분이 좋긴 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죄송스럽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저는 항상 '예술가'가 무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직 예술가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로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내가 훌륭한 예술가로 다가가고 있지 않아 이 자리가 부담되고 염려스럽다. 저보다 훌륭한 영화계 많은 분이 있고 그 분들보다 앞 순으로 들어와서 부담스럽다.

KAFA에 지난 11월 12일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근황이 궁금하다.
ㄴ 원장 취임 전, 지방 대학 영화과에서 조교수로 있었다. 그때 업무량보다 원장 취임 하고 나서 열 배 정도 많은 것 같다. 물론 일도 좋아하지만, 영화 보기, 술 마시기, 친구 만나기, 운동 조금 하기 같은 사적인 생활도 좋아 하는데 단 한 가지도 못했다. 밤 11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다. 게다가 '국가 기관'이다 보니 아침에 '칼출근'을 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업무량과 과중한 책임을 KAFA에서 왜 필요한 것 같은지?
ㄴ 저도 잘 모르겠다. (웃음) KAFA가 생긴 지 32년이 됐다. 전 원장님들을 보면 지금까지 KAFA 출신 동문이었다. 이곳에 대한 커리큘럼의 융통성, 선후배 사이 같은 애정, 학교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것이 선정된 이유에 중요하다. 초기 아카데미와 지금을 비교하면 원장이 할 일이 더 늘어났다. 먼저 정규과정에서 아이들을 교육해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영화 산업 쪽으로 나갈 감독, 촬영 감독, 애니메이션 감독 등을 배출시키는 원래 지속했던 교육과정이 있다. 또한 졸업자와 동문들 중에서 독립 장편 영화나 애니메이션 장편, 상업 장편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장편 제작 연구과정이 있다. 여기서 '파수꾼', '잉투기', '소셜포비아' 같은 걸출한 영화가 나온다. 그리고 확대된 일이 'KAPA+'로 영화인들을 재교육하는 일, 해외 교류하는 일, 신기술을 도입해 신기술 관련 영화를 만들어 내는 일을 같이 한다. 연말에 결재만 하루에 90건 정도니 일이 정말 많고, 1년에 40~50편 정도의 단편, 중편, 애니, 장편, 3D, 스크린 X 같은 영화를 만드는 엄청난 제작사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KAFA 동문이라는 것, 감독과 프로듀서를 같이 했고, 학교에서 교수를 했다는 다양한 이력이 아마 "지금 원장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건축공학을 전공한 건축학도인 걸로 알고 있다. 건축학도에서 영화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무엇인지?
ㄴ 우리 집은 형님과 저 두 형제였는데, 형님은 전국에서 정말 1등을 하는 수재였고, 저도 반에서 1등 하는 그런 실력이었다. (웃음) 그런데 제가 어린 시절에 병약했다. 집에서 주로 책을 보거나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아이였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형의 공부 실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취미를 살려서 미래의 직업으로 가야 할 분야가 뭘까?" 생각했다. 그러다 건축이 공학과 그림, 예술과 과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고, 공부를 하기에 좋은 학문이라 생각해 막연하게 지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건축은 예술적, 사회적, 인문학적, 공학적으로 굉장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이 화목하지 못했는데(웃음), 가끔 화목할 때가 몇 번 있었다. 일요일 점심때 밥을 먹을 때와 '명화극장' 영화를 볼 때였다.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 좋은 인상으로 남은 것이 맛있는 것을 먹을 때와 영화를 볼 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는 좋은 것이 됐다. 게다가 성인이 된 후에 부모님이 영화를 통해 만난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영화를 배워보고 싶었다. 미래의 직업은 설계를 통해 건물을 만드는 일을 하되, 졸업하고 기회가 된다면 유학을 가서라도 어떻게든 영화를 배워보고 싶었고, 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키우게 됐다. 그러던 중에 KAFA를 알게 됐다. 그래서 집에는 건축으로 대학원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지원했다. 결국, 운이 좋게 합격했고, 24년 전 KAFA에 학생으로 들어왔다.

   
▲ ⓒ 유영식

처음엔 영화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없어 무조건 많이 봤다. KAFA의 과정을 통해 차츰 영화에 대해 이해가 생겼고 미학이나 다른 분야의 연관 관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 과정을 통해 건축이 건물을 만드는 전체적인 미학과 기술적 프로세스의 과정이 합쳐진 것이라면 예술과 과학이 합쳐진 집합체가 영화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건물은 하나 지으려면 공사가 3~4년 정도 걸리고 평가는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이 5년에서 10년 정도 살아야 그 건물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 반면, 영화는 3~4개월이면 한 편을 만들고, 개봉하면 관객들이 곧바로 평가를 한다. 이런 것을 보고 영화가 훨씬 빠르게 남들과 생각을 함께하고, 평가받고 자기 생각을 수정하는 예술의 길이라 생각하여 영화의 길로 전환하게 됐다.

건축했던 사고방식이 영화계로 갔을 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ㄴ 미학을 파고, 시나리오를 쓰는 데 집중해 영화 연출 과정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바라볼 땐 "연출도 잘하지만, 프로듀서를 더 잘한다"고 말한다. 스케쥴링과 예산에 대한 민감한 처리 부분이 건축에서 체득되어 져 온 것을 높게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대해 사람들이 욕을 많이 했다. 그 건축물들의 설계도면과 건물이 나올 때까지 계획되는 서류를 보면 백과사전 10개 이상 분량의 시방서(공사에서 일정한 순서를 적은 문서)가 나온다. 구획별 상세도면, 체계적인 시공 계획, 인력 노동에 대한 표, 자금·물류·유통에 관련한 서류를 모으면 어마하다. 그런데도 무너지는 건물이 나온다.

그런 것들을 배운 상태에서 처음 영화계에 들어올 땐 깜짝 놀랐다. 90년대 초반 영화계엔 시방서와 같은 것을 사용하는 분이 아무도 없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에도 영화를 만들 땐 2억에서 많게는 6억 정도의 예산을 쓰고 있었는데, 그 큰돈을 계획이나 어떤 스케쥴과 상관없이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것에 놀라웠다. 그래서 "난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해서 세밀한 계획을 짜니 사람들은 "넌 제작을 해야 한다"고 해 결국 제 발목을 잡게 된다. 순수 미학과 시나리오에 집중하고 싶어서 연출 공부를 하고 수석 졸업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건축을 통해 학습된 것으로 인해 프로듀서로 전향하게 된 것 같았다.

프로듀서, 조감독 등을 거쳐서 상업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은 '아나키스트'였다. 그 당시 감독으로의 유영식은 어땠나?
ㄴ 그땐 상당히 긴장됐다. 국내 최초의 중국과의 정식 합작을 통한 해외 로케이션 작품이었다. 그 당시 상업 영화로 데뷔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패키징'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한데, 시나리오, 주연 배우, 감독, 프로듀서, 제작사가 누군지가 가장 중요했다. 처음 나는 투자자가 내려보낸 프로듀서 임무가 부여됐다. 시나리오는 처음엔 박찬욱 감독이 썼고, 제작엔 지금은 유명한 감독님인 이준익 감독이 맡았다. 그리고 주연 배우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내 마음의 풍금' 프로듀서를 하면서 당시 출연을 못 한, 장동건 씨를 알게 됐다. 그 당시의 인연으로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이렇게 '패키징'이 잘 이뤄졌는데, 박찬욱 감독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불허가가 떨어졌다. 참 지금 보면 웃긴 이야기다. 지금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감독이지만, 그때 당시는 감독으로의 지명도가 높지 않아 투자자가 반대를 한 것이 요인이 됐다. 그래서 제가 프로듀서 입장에서 거꾸로 투자자들에게 설득했다. 그런데 이준익 지금 감독이시지만 대표도 반대했다. 이러면 투자가 안 될 테니 감독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중국으로 넘어갔다. 왜냐면 현지에서 주어진 예산으로 제한 요건이 매우 커서 "이걸 찍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돈을 많이 썼다고 소개가 종종 되는데, 먼저 만들어진 '쉬리'가 40억 정도의 순 제작비를 썼다고 하는데 '아나키스트'는 20억 정도밖에 없었다.  원래 시나리오대로는 절대 찍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됐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설계도면처럼 처음부터 다시 써야겠다. 스토리도 완전히 수정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영화화 하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돌아오게 됐다.

   
▲ 영화 '아나키스트' ⓒ 영화 스틸컷

그렇게 한 달 동안 중국을 보고 돌아오던 사이 서울에선 차기 감독 물색 작업이 펼쳐졌다. 그때 잘 나가던 김성수 감독 등 몇 후보가 있었는데, 다들 다른 작품에 얽혀계셨다. 그래서 세 후보 안에 프로듀서에 있던 저도 감독 후보로 들어갔다. 왜냐면 그때 '아름다운 시절' 조감독을 통해 감독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보에 있을 당시 "이 시나리오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이 영화 프로듀서를 할 수 없다"고 집어 던졌더니, "껄껄껄"하고 이준익 감독, 조철현 기획 등 헤드 분들이 "적임자다. 당신이 고치면 된다. 고쳐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책을 다 주고 한 달을 줘봐라"고 해서 절에 파묻혀 한 달 동안 책을 다 읽고 시나리오를 고치기 위한 뼈대 작업을 했다. 그 때, 라면 상자로 두 상자 분량의 50여 권의 책과 논문들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고칠 수 있겠다"는 일종의 자만을 가졌다. 큰 실수였다.(웃음) "돌아와서 한 번 해봅시다"고 말하며 감독이 된 것 같다.

'아나키스트' 이전까지 시대극을 만들어왔다. 1952년 배경 '아름다운 시절', 1950년 배경 '그 섬에 가고 싶다', 1960년대 배경 '내 마음의 풍금'들이 그랬다. 시대극을 만든다는 것이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든다. 특히 시대를 재현하는 '리얼 드라마'가 됐을 때는 더 했다. 고증부터 프로덕션을 만드는 일까지 공부를 하면서, 준비과정에 심도를 가져야 한다. KAFA를 졸업할 땐 굉장히 미래 지향적이고, 패셔너블하고, 모던한 작품을 하려고 했는데 내 안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결핍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 사조에 민감한 건축을 했지만 우리 역사와 우리 과거에 대한 것에 공부를 필요로 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시대극을 많이 했고, 역사의식에 대한 생각을 만들면서 계속 갖게 됐다. 더군다나 '아나키스트'는 1920년대 중반 상해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이고, 숨겨진 의열단에 관한 이야기라서 더욱 나를 자극했다. 물론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웃음), 그것이 나한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중국 합작이라는 어려운 산이 오히려 나에게 힘을 줄 거라고 믿었다.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거다.

후회는 없어도 영화가 매우 아쉽다. (어떤 부분이 가장 후회되는지?) 프로덕션 운영을 너무 무리하게 했다. 아마 두 달이었다면 중간에 한 달은 조금 쉬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너무 무지했다. 61일 동안 54회라는 촬영이라는 말은 7일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7일 중에 전 세계가 다 노는 '밀레니엄 신정'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4일까지와 크리스마스 연휴 2일이 있었다. 그걸 빼니 1월 중순 하루 있었다. 중국은 가깝다 치면 차로 8시간 거리다. 차에서 자고, 눈곱 떼고 일어나서 "준비됐어! 어어어~ 레디 액션!"하고 다시 차 안에서 자는 일정으로 영화를 찍었다. 내가 이 정도였으니 스태프들은 안 봐도 뻔했을 것이다. 다들 향수병에 젖어서 육체적으로도 고달프니, 한국 갈 생각만 하고 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류와 한·중 합작 등의 물꼬를 튼 시작이 되었다. 아직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말이다. (웃음)

만주나 상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다룬 것이 많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많이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그 후 영화감독으로는 작품을 접하는 것이 어려웠다.

ㄴ 감독으로 결핍이 많다. 지금도 원장을 하면서 "난 원래 감독인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도 작품 구상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원장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시나리오를 쓸 시간이 없지만, 전에 교수를 하면서도 시나리오 개발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감독 자리는 애증인 것 같다. 상업영화 감독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 기회라는 것이 뭐냐면 데뷔작으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80~90% 정도 하는 것이다. 그때 당시엔 몰랐다.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요령이라는 것이 그 당시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차기작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빨리 감독으로 차기 작품을 진행했다면, 지금 제가 있는 위치가 달라졌을 것 같다. 지금 원장을 하고 있지만 임기가 정해져 있다. 임기가 끝나면 "다시 내 작품을 할 것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여전히 악전고투하고 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냉철할 것 같고, 외모상으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실제로 공부 잘했다) 보일 것 같다. 그러나 숨어있는 감성이나 멜로가 살아있는 야들야들한 부분을 사람들이 놓치는 것 같다.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계에서도 저를 '보이스카우트'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이미지상 프로듀서는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나?
ㄴ 30대 후반부터 40대 초중반까지 정말 신경질이 날 정도로 프로듀서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왜 나한테 프로듀서의 기회만 날아오는 걸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감독인데 프로듀서 일을 정말 잘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프로듀서 일을 받지 않기도 했다.
 

   
▲ ⓒ 유영식

교수로 지낸 유영식은 어떤지 궁금하다.
ㄴ 처음엔 현장 경력이 있어서 실기를 위주로 애들과 작품을 만들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지방대 조교수로 있을 땐 이론을 가르치고, 학위를 한두 개 더 따면서 이론 과정의 정립을 이뤘었다. 영화 미학의 순수 분야,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분야, 연극 연출 분야를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아! 이것을 좀 더 일찍 공부했어야 했는데!"가 주였다. 학습이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제자들과 작품도 많이 만들었고 영화제 출품해서 수상도 하니 총장님도 상도 주고 즐거운 일들을 많이 했다.

또 이번에도 사람들은 나의 열망인 감독을 뒤로하고 "선생님이 딱 맞다! 교수가 천직이다!"는 말을 해주셨다. 심지어 특강을 조금 했었는데, 분위기가 좋다 보니 특강 연락도 많이 들어왔다. 특히 지방이다 보니 더 요청이 들어온 것 같은데 "2년 동안 특강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고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집중해주는 것을 느끼고 나도 즐겁기도 했다. 영화와 관련해 특강을 많이 했다. '전문 강의를 개발해볼까?'하는 생각도 했고 실제 몇 강의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여기 KAFA에 들어오게 됐다.

한 가지 일하면, 그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천직'이라는 소리를 계속 들었던 것 같다.
ㄴ 근데 영화감독은 왜 그렇게 안 들렸는지 궁금하다. 영화감독이 천직이라고 듣고 싶었다.

영화감독이 다시 된다면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가?
ㄴ 그건 아주 구체적이다. 평생 작업 중인 스크립트가 있다. 14번 이상 고친 스크립트도 있고, 이건 원장을 마친 이후에 끄집어내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종류가 많은데 역시 시대와 현대가 어울린 판소리 주제 영화가 하나 있다. 풍물놀이에서 사물놀이로 가는 변천사로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시대상이 껴있는 줄거리다. 사물놀이를 탄생한 스승과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인생을 걸고 해야 하는 건데,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여기서 줄여야 할 것 같다. (웃음)

시대적인 부분에 계속해서 관심을 두는 것이 유영식 감독 예술세계의 성향인지?
ㄴ 그렇지 않다. 제가 재미난 걸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영식 감독이 포스터를 보여줬다.)
 

   
 

1959년 작품인 '세쌍동'의 포스터다. 이 당시 우리 영화는 한 해 192편이나 만들어졌다.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장르도 다양했다. 이 작품은 저희 어머니가 무용원장을 하시다가 주인공으로 발탁된 작품인데, 여기 포스터에 날아다니는 분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서 이 포스터 자료를 볼 수 있다. 우연히 이 자료를발견하게 됐다. 사실 어머니가 영화 하는 것을 정말 반대하셨다. "너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착하니 건축을 했으면, 대성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KAFA 들어가고 영화계 들어갔을 때 의절까지 하시려고 했다. 의지를 갖고 영화 일을 하고 성과도 보여주니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서 어머니도 생을 정리하시는지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굉장히 많이 표현하셨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왜 역사 쪽에 관심이 있느냐면 '지금의 나를 찾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영화계에 왔을까?"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다 보니 "내 과거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와 관계된 일을 하셨던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요즘 한국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
ㄴ 사람들이 요즘 한국영화 굉장히 호황이라고 한다. 객석 점유율도 높고, 관객 동원 기록을 깨고 있고, 천만이 넘는 영화가 몇 편씩 나오는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내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발전과 지표가 좋게 나온 것은 물론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표다. 산업적으로 내부에 있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의 몫이 골고루 평균적으로 나뉘었느냐고 생각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것이 안타깝다. 그 이유는 하나다. 지금은 너무 영화가 양극화되고 있다. 예산이 아주 많이 들어가는 영화와 저예산 영화로 나뉜다. 모래시계 꼴의 형태인데 사업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모양은 항아리 꼴이다.

그 이야기인즉슨, BEP(손익분기점)를 평균 100만~120만 정도 동원되면 맞출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아져서 일하는 사람, 연기자들도 많이 등장하는 모양새를 갖춰져야 하는 업계 발전이 되어야 한다. 지금 지표로만 엄청나게 성장하고, 사업적으로 커진 것 같지만, 이것은 양극화로 벌어진 것이지 조금 위험하며 조심스럽다. 엄청난 건물을 사는 재벌도 있지만, 아직도 배곯고 기초 생활 연금도 나오지 않는 생활로 일하고 있으며, 아직도 열심히 골방에서 밤새 글 쓰고 있지만 밥 한 끼 먹기 힘든 사람들이 많은 걸 주변에서 보고 있다. 그런 것이 복잡하게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미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앞서 1959년 이야기를 했던 것은 우리나라 영화 장르가 다양했었는데, 요즘은 편협된 장르로 몰리는 영화만이 잘 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를 열었던 영화처럼, 미약적, 예술적 성취가 있는 작품들은 비율을 놓고 봐도 평가가 조금 어둡다. 너무 하향평준된 관객들 기준에 맞춰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물론 오락 영화는 굉장히 성공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뭔가 우리가 삶을 고민하고, 그 영화를 봤을 때 심심하더라도 우리 생활과 삶 속에 자기가 가진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으면서 사유할 수 있는 영화들도 분명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아직은 상업영화계가 폭이 그렇게 넓지 않은 것 같다.

그 편협된 장르 중 하나로 최근 영화계에도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
ㄴ '내 마음의 풍금' 때도 복고 바람이라고 이야기 나왔다. 저는 마케팅 쪽에서 언어술사들이 만들어낸 화두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결국 잘 만들고 재미있어지면 관객이 들게 마련이다. '국제시장'이 잘됐다고 그게 "복고 바람이다. 아버지에 대한 열풍이다"라는 말도 있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면서 일상에서 숨겨진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되는데 모두 영화가 뜨고 난 이후에 나온 거다. 데이터로 만든 화두에 대해선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 ⓒ 유영식

KAFA 출신인데, 그때랑 지금의 KAFA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ㄴ 과거 KAFA 있었을 당시엔 저흰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옆에 있는 스물 다섯 평에서 서른 평남짓하는 방 하나로 시작했다. 방 하나에 TV, 비디오데크 하나로 출범해서 공부했다. 그게 10기~11기까지였다. 그것이 지금 이 건물의 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사실 창피한 일화가 있는데 지금 프랑스, 일본의 동경예술대학 교수도 지금 와 계신다. 워크숍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해서 하고 있는데 이분들이 웃으신다. 예술대학인데 건물도 하나고 작으니 그러셨을 건데 우린 골방 하나에서 시작한 학교다. 물리적인 상황이 정말 좋아져서 이 학교의 원장보다 학생으로 가면 더 행복할 것 같다. 우리도 다닐 때 불만이 많았다. "지원 경비 좀 늘려주지", "지하실 좀 더 빌려주지", "촬영 기간 좀 더 주지", "우리 작품도 더 찍게 해 주지", 그 불만들을 지금 학생들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 재밌었다. 나도 학생일 때 그랬는데, 지금 학생도 그러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KAFA가 좋은 건 커리큘럼뿐 아니라 학생의 생각과 고민을 들어준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원장으로 교수님과 교직원분들에게 부탁한 것은 "큰 원칙을 깨지 않는 이상, 학생의 고민과 생각을 우리가 생각해 줍시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였다. 우리 땐 교수님이 정해지지 않고 커리큘럼이 체계적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학생이 원해서 한다면 웬만하면 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커리큘럼은 교수, 학생의 동의를 받는다면 제가 결제해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체제 운용이 우리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인 것 같다.

KAFA에서 배출된 걸출한 감독들이 현대 한국영화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ㄴ 지표 내는 걸 좋아해서 1년 결산을 내서 랭킹 TOP 10을 보면 적어도 30%, 많을 땐 60~70%가 동문의 영화다. 지금까지 20년째 그렇게 유지하고 있다.

KAFA 출신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면 대한민국 정서에 엄청난 영향력과 파급력을 주고 있다.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사람의 정서를 건드리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지금 KAFA에서 배우고 작품을 만드는 학생들, 미래의 감독들이 한국영화로 국민을 흔들어 줄 그 사람들의 성향은 어떠한가?
ㄴ (놀라며)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KAFA에 들어올 때 가장 공들인 부분은 학생 선발이다. 학생 선발을 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거쳐서, 한 학생의 면담 시간을 한 시간씩 가진다. 8명의 교수가 그 한 사람을 한 시간씩 대면하는 시간을 주며 학생을 선발한다. 그 이유는 사람을 뽑는 인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들이 나아가 우리나라 영화를 만들고 알리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그때 우리가 학생들에게 보는 것은 그들의 기술적인 측면, 학력적인 측면도 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만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관계의 소중함, 서로에 대한 통찰, 어떤 심도 있는 관찰 등에 대한 평가를 열심히 한다. 그 심도는 어떤 학업과 자기 성찰, 깨달음으로 생긴다. 그 방면마다 약간씩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할지에 대해 본다. 그래서 "자기소개서 10장을 써와라", "작품을 내라", "인물학적인 가치를 말해봐라", "독후감을 써봐라", 면담도 하는데 면담하면 야단까지 쳐서 일부 여자 친구들은 울기까지도 한다.
 

   
 

그런 식으로 삶의 다방면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저희가 생각하는 영화는 사람을 다루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내가 타자에 대한 성찰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에 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은 결국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력을 증폭시켰을 경우에 그 안에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간에 대한 관계를 이 친구가 얼마나 가졌는지에 대한 평가를 제일 중요시 한다. 물론 테크닉적인 요소도 중요하고, 학업도 중요하니 그런 것들이 버무려진 포트폴리오가 좋은 친구들을 뽑게 된다. 그들이 여기서 학습하는 동안 자신의 깊이감을 증폭하고 변모하여 졸업하게 한다.

국가기관장으로 한국영화계가 사실 KAFA에 바라는 것이 많다. 어떤 영화들이 쏟아져 나올지에 대한 기대가 많은데, 그런 것에 대한 포부를 밝힌다면?
ㄴ 나도 여기 졸업생이고 여기 나온 친구들이 대부분 영화계가 힘든데도 끝까지 영화를 한다. "포기하지마라!" 그걸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와 심도에 집중한다.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은 교육의 과정으로 바꿀 수 있다. 미학적 스킬이나 기술은 확실히 가르친다. 그리고 영화를 대하는 태도, 영화를 향유하고 공유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 그 친구들이 나가서 자기가 어떻게든 교수, 감독, 극장, 투자자, 프로듀서 등 영화계에서 영향을 발휘한다. 책임감이라고 하면 내가 성실해야 아이들도 성실할 것 같다. 대단히 피곤한 일이다. KAFA를 나왔다고 너무 자만하지도 않았고, 소수정예교육이지만 이들이 '슈퍼 엘리트'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영화를 할 거라는 이 각오는 제 원칙이고 항상 강조하는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 질문을 위해서 지금까지 긴 인터뷰를 진행한 것 같다. 유영식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화 예술인이란 무엇인가?

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예술은 삶이다." 저도 나이가 50이 다 되어가지만, 우린 삶에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수정하거나, 고쳐야 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전복되는 일을 맞이하거나, 보게 되거나, 듣게 되거나,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좋은 예술가는 바로 그런 지점들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남들도 그 순간이 얼마만큼 고통을 통해서, 기쁨을 통해서, 슬픔을 통해서든 중요한 전환이 됐다는 것을 표현을 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 삶 속에서 그 영화를 통해 나름대로 삶에 대한 전환점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하거나 제가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삶 속에서 이 터닝 포인트들이 얼마만큼 영화 안에 사건이나 캐릭터를 통해 삶에 붙어있는가를 강조한다. 그 점을 영화를 통해 주어진 시간, 매체, 비주얼, 오디오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한 예로 공부가 필요 없는 애가 있다. 굉장히 멍 때리고 있고, 바보 같기도 한데 영화를 잘 만드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왜 그럴까?" 고민을 해보면 그 친구는 항상 "내 삶이 뭐지? 저 사람의 삶이 뭐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걸 자신이 제일 잘하는 영화에서 녹여낸다. 그만큼 에 대한 통찰을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영화 교육을 하던, 영화 창작자, 비즈니스를 하는 영화 프로듀서로 살든 간에 그 삶에 대한 통찰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지 않으면 예술가로 승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 점이 느껴지면 그것이 조악하던, 화려하던, 소박하던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요즘 저는 눈높이를 그런데 두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삶을 성실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내 삶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자기 삶에 대한 고민하는 여유를 갖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요즘 가진 사람도 여유가 없는 시대 같다. 불만 게이지가 높아질 텐데 내 삶에 대한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언급한 내용을 갖춘 사람이 진정한 예술을 향유하고 진행하는 것 같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사진]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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