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여기 공연 내내 엄마 미소(혹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보게 되는 작품이 있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대명문화공장과 달 컴퍼니의 첫 공동제작 작품으로 1912년 발표 후 오랫동안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아온 진 웹스터의 명작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의 오리지널 연출가이자 토니 어워즈 최고 연출상을 받은 적 있는 존 캐어드가 연출을 맡았으며 2009년 미국 초연 후 도쿄, 런던, 캐나다 마니토바 등을 거쳐 한국에서 초연된다.

   
 

고아원에서 자라난 '제루샤 애봇'과 그녀를 '키다리 아저씨'로서 비밀리에 후원하는 '제르비스 펜들턴'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이 작품의 한국 버전은 넬 발라반이 연출을 맡고 박소영 연출이 협력연출을 맡았다. 음악은 주소연 음악감독이 맡았다. '제루샤 애봇' 역에는 이지숙과 유리아가, '제르비스 펜들턴' 역에는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가 출연한다.

우선 작품 자체의 퀄리티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별다른 배경 변화 없이도 제르비스의 방과 제루샤의 방 정도로 만들어진 무대지만 상자의 활용이 매력적이다. 침대도 의자도 책상도 심지어 산꼭대기도 되는 데다 안에 넣어둔 옷의 활용도 적절하다. 화려하거나 특이하고 상징적인 무언가 없이도 무대가 주는 즐거움을 느끼기란 흔치 않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만큼 대사 또한 훌륭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정말 제루샤의 편지를 내 귓가에 대고 읽어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제루샤 역의 두 배우가 펼치는 성대모사 또한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다. 단 두 명이 오르는 무대지만 번역에 신경 쓴 작품답게 대사의 맛으로도 큰 무대를 풍성하고 꽉 채운다.

가사에도 이 감동은 이어진다. 행복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복의 비밀'은 단순하고 평범한 단어로도 아름다운 가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압도적으로 많은 대사, 가사를 빼어나게 소화한 배우들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작품은 여성의 성장소설이지만 요즘 화두가 되는 여성혐오적 배경이 듬뿍 담겨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이 1908년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남자가 선택한 여자 고아'거나, '여자는 대학을 졸업한 뒤 만난 가장 멍청한 남자와 결혼한다'거나, 여성 참정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지만 지금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은 발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좋은 작품은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제루샤를 단순히 제르비스라는 왕자를 만난 신데렐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제루샤는 고아원의 큰언니고 자기 진짜 성도 모르고 이름도 전화번호부에서 따온 아이지만 희망적이고 생기발랄하다.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2016년에도 유효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오히려 기품있어 보이지만 그녀 앞에서 질투하고 고뇌하는 제르비스를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한 번 더 생각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이 작품은 2인극이지만 제르비스의 비중은 사실 생각보다 크지 않다. 왜냐면 그는 상당 부분 '제루샤의 편지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르비스는 분명히 주체적인 캐릭터다. 주인공이자 동시에 악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줄곧 비서의 이름을 빌려 제루샤를 조종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제루샤가 사랑하는 사람인 제르비스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이자 동시에 제루샤의 '성인으로서의 길'을 방해하는 악역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제루샤가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용서는 더 성숙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웃음을 짓게 한다. 악역이라고 했지만 사실 관객 입장에선 속이 훤히 보이는 데다 잘생기고 키 크고 노래 잘하고 때론 귀엽기까지 한 연상의 키다리 아저씨를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제루샤를 조종하려는 이유조차 정말로 순수하게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 혹은 강요도 대체로 그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이다. 물론 그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꿈에 도달해가는 제루샤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유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둘의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아주 흐뭇하게 감상할 수 있다.

끔찍한 현실과 달리 '고아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제루샤의 모습에서 그 누가 위안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때로 사랑이란 이름 앞에 상대를 자신의 안에 가두고자 한다. 나만이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실 근거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진취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이 공연을 보는 수많은 제루샤들도 마찬가지다. 공연을 보는 관객을 어린아이 보듯이 허투루 만들 수 없는 이유다.

뻔한 스토리, 긴장감 없는 사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멋진 로맨스를 보고 싶다면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로 찾아가자. 10월 3일까지.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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