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당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사랑받을 만 하다는 것을 아는지.

이 익숙하고 당연하지만, 소리 내 말하기 부끄러운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작품이 있다.

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연극계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오세혁 작가가 첫 뮤지컬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우울증에 빠져 3년간 음악 활동이 멈춘 음악가 '라흐마니노프' 역에는 안재영과 박유덕이, 그를 치료한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역에 정동화와 김경수가 출연한다.

이번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첫 뮤지컬 연출에 도전한 오세혁이지만 '천재'로 불리기도 한 명성에 걸맞은 작품을 선보인다. 좌우와 앞, 뒤로 확연히 구분된 무대는 관객에게 작품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적 역할이 되는 의미의 무대가 아닌 관객의 적극적인 사유를 통해 무대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 ⓒHJ컬쳐

무대 가장 앞쪽에 바짝 붙어있는 니콜라이 달과 라흐마니노프 두 사람의 방은 입체적인 현실 속에서 평면적인 동선을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입체감이 존재하는 것은 무대 안쪽을 향해 설치된 마루뿐이고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심리적 깊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직접적인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라흐마니노프가 반말을 하는(치료과정으로 추측되는) 경우 그 마루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며 달 박사도 그 마루 위에서만 쯔베르프 교수, 차이코프스키가 되어 이야기를 펼친다. 안쪽으로 갈수록 라흐마니노프의 심리 심층에 관계가 있는 것도 작품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 ⓒHJ컬쳐

그렇게 라흐마니노프의 심리 속에서 이야기하는 둘이 종국에는 마루의 앞쪽에 나와서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은 그의 심리 안쪽 깊숙이 잠겨있던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느끼게 된다.

또 넓은 무대를 극대화한 연출로 두 사람이 각자의 방에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관객의 눈이 둘의 방을 오가며 자연스레 교차 편집된 이미지를 보게끔 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훌륭한 미장센이다.

다음으로 대사 역시 작품의 평범한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상징적인 대사들이 텍스트의 본질을 드러나게 한다.

   
 

"열려있었네요. 닫혀있는 줄 알았는데"로 시작하는 둘의 첫 만남부터가 그렇다. 어김없이 작품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매개체는 두 사람의 사소하지만, 특별한 '말'에 달려있다.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쓰고 사랑받게 될 것"이라며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을 한 꺼풀 벗겨내고 뒤이어 "당신은 왜 나를 치료하고 싶어 하죠?"라는 라흐마니노프의 대사로 달 박사의 마음도 한 꺼풀 벗겨낸다.

   
 

게다가 마지막에 결국 라흐마니노프의 기나긴 독백 끝에 달 박사가 두들겨준 어깨와 우울증을 극복하고 신곡을 발표하는 순간 두 사람이 별다른 이야기 없이 보여주는 눈빛과 제스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단순한 말 이상의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연 전에 '진심을 담은 순간'을 찾아내며 대사를 비우고 있다고 말한 제작진의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악수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라흐마니노프가 먼저 악수를 하는 커튼콜 또한 인상적이다.

   
 

물론 아이러니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가장 필요했던 것은 두 사람의 '말'이다.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음악가입니다"라는 달 박사의 메시지는 라흐마니노프가 아닌 관객석에 앉은 우리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선보이는 '말의 힘'은 이런 게 아닐까. '말' 이상의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려면 '말의 힘'을 먼저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보고 있는 누군가는 '말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수도'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이미 사랑받고' 있다. 세상에는 가끔 당연히 알고 있지만, 소리 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말도 있는 법이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그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누구나 가지고 있을 지나간 일에 대한 죄책감과 무게감에 짓눌린 당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작품이 아닐까.

공연은 관객의 마음에 어떠한 형태로든 남게 되며,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남이 볼 때 재미있지만 내가 볼 땐 재미 없거나, 반대인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관객 본인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려놓고 풀어가는 느낌이 들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트라우마에, 니콜라이의 열등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결코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기에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공연되는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가 120분을 훌쩍 넘는 여타의 작품들 못지않게, 때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리라 여겨진다. 물론 이 모두는 매일 '열일'하는 이범재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현악 4중주의 김명철, 정연태, 황준정, 임수찬, 김경원, 유승범, 한동윤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 피아니스트 이범재 / ⓒHJ컬쳐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밀도 있는 메시지,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활용한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의 넘버, 빠른 관객의 귀가 시간까지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HJ컬쳐 작품이 늘 그렇듯 너무 짧은 공연 기간은 덤이므로 이 가치 있는 공연을 보려거든 서두를 필요가 있다.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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