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심청' 리뷰

 

 

[문화뉴스] '심청'의 이름은 우리에게 효녀의 대명사로 새겨져 있다.

심청의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의 특성상, 심청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판소리로 남긴 이들의 이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심청은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걸까. 혹은, 왜 탄생하게 됐을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 여성영웅설화 등으로 설화에서부터 연원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은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기사에서 다루는 연극 '심청'은 심청의 탄생을 하나의 가정으로 접근한다.

연극 '심청'의 작가 이강백은 반복해서 말한다. "이상하고 이상하구나"라고. 심청의 이야기에는, 무역선 선원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 있다. 그렇다면 심청이 제물로 바쳐지게 하는, 선주의 존재는 어디로 숨겨진 걸까. 이강백은 지적한다. "해마다 바다에 처녀를 바치는 선주는 오히려 굉장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 이강백이 던진 의문은 다음의 진술에서 명확한 답으로 이어진다.

"심청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선주가 쓴 것 같다."

이강백은 심청전이, 선주가 직접 쓴 게 아니라면 적어도 사람을 고용해서 대필을 지시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강백은 심청전을 널리 퍼트린 장본인 역시 선주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선주에게는 "매혹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기꺼이 제물이 되게 하려거든, 심청이 그러했듯 공양미 300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깊은 바다에 빠져도 죽지 않고, 심지어 연꽃에 실려 바다 위로 떠올라 "신화적인" 부활 끝에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심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이강백의 서사는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심청전을 뒤집으면 선주가 나온다. 심청전의 진짜 주인공은 심청이 아니라 선주인 것이다. 그런데 선주도 죽는다. 제물을 많이 바쳤다고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제물과 제물을 바치는 자에게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얼핏 의아하게 들리는 말이다. 선주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제물을 바친 건 아니었다. 사업을 위해서였을 뿐. 그런데, 어떻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선주 본인에게로 귀결된다는 걸까.

연극 '심청'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선주에게서 고이는 지점을 보여준다. '심청'은 제목처럼, 심청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극은 선주가 바다에 바쳤던 수많은 심청, 이름을 가지지 못한 복수 단위의 심청들이 거쳐 간 자리를 그려낸다.

익명의 심청들
그들은 어떻게 심청이 "되었나"

'선주'는 일평생 9척 상선으로 중국과 무역을 해왔고, 해마다 어린 처녀들을 제물로 바쳐왔다. 그리고 겉보리 스무 가마에 사온 제물, '간난'이 있다. 선주는 이번에도 간난을 제물로 바치는 순서를 치르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간난은 다르다. 이번만은, 정해져 있는 순서를 차근차근 밟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이전과 다르다.

바다에 빠지지 않겠다고 곡기를 끊었다가도 사나흘이면 포기하던 다른 처녀들과는 달리, 간난이 열흘씩이나 버텼기 때문만은 아니다. 간난이 열흘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간난의 의지만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다. 선주의 세 아들은 증언한다. 예전에는 처녀들에게 엄격하게 굴어서 제물로 바쳐지는 일을 "감히" 거부할 수 없게끔 하였는데, 간난에게는 유독 너그럽다고. 그렇다. 간난이 "다른" 건, 본질적으로 선주가 "달라진" 까닭이다. 무엇이 선주가 간난에게 너그럽도록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극이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선주는 가난한 평민 처녀인 간난을 방에 모셔두고 꼬박꼬박 상을 차려 대령하고, "마마님"이라는 높은 존칭으로 부른다. 바닥에 엎드려 수그러진 모양으로 간난에게 호소한다. 제물의 운명에 따라주기를. 간난은 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는 존중과 간절함을 대하고 혼란을 느낀다.

간난은 단식 도중 선주가 내어준 물을 입에 머금었다가 선주에게 뱉어내는 과격한 행동을 취하기도 하지만, 이를 선주에게 끝까지 저항하려는 결연함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간난의 거부로 출항이 예정된 날짜로부터 사흘 늦춰진 시점에서, 간난은 묻는다.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죽어야만 한다고 죽어달라고, 의무인 것처럼, 부탁인 것처럼 요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간난에게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선명하게 머무르고 있다.

 간난을 설득하려는 선주의 세 아들의 말처럼, 제물들은 본디 불행한 사람들이다. 초라한 삶보다 영화로운 죽음을 택하고자 할 것이라는 그들의 짐작은 폭력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유효한 내용이다. 간난은 취약하다. 불행한 삶을 살았고, 불행한 결말에 이르려는 대목에서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찾는다. 그것은 동시에 선주에 대한 보은과도 같다. 비참한 삶에서 따듯한 시간을 안겨준 상대에 대한 인사. 하지만 선주는 간난의 은인이 아니다.

연극 '심청'은 전술했듯, '심청전'의 저자를 선주로 설정한다. 선주에게는 왜 '심청전'이 필요했나. 선주의 "이유"는 쇠락하고 물러진 선주의 입 대신, 선주의 아들에게서 밝혀진다. "사업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이국까지 무사히 항해할 튼튼한 배를 만드는 것보다, 위험을 감수하고 출항에 나설 뱃사람들을 고용하기 위한 추가 비용보다, 이름 없는 '심청'을 제물로 바치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간난의 목숨에는 '심청전' 속 심청처럼 공양미 300석씩이나 필요하지 않다. 고작 겉보리 스무 가마가 간난에게 운명을 부과한다. "죽어줘야" 한다고.

 선주에게 이 모든 사정은 사실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일이다. 간난을 새삼스럽게 동정할 필요도, 주저할 이유도 없다. 선주가 망설이지 않고 행해왔던 인신공양은 어느덧 뱃사람들과 선주 사이의 공조가 되었다. 뱃사람들은 안전한 항해를 보장받기 위해 제물을 원한다. 또는, 그동안의 행위가 마땅히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인받기를 원한다. 그간의 행위가 악습이었다고 부정되지 않고. 그들에게 가엾은 제물의 사연은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악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선주는 더 이상 '심청'의 이름으로 되풀이되어온 이야기를 초연하게 대할 수 없다. 간난은 '심청전'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선주의 이야기는 왜 없는지를 묻는다. 자신이 주인공이 된 때에 간난은 어쩌면,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선주의 처지에 아쉬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간난에게 선주는,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렸으면 하는 "좋은 사람"이니까.

 선주는 '심청전'이 이야기로써 완성될 수 있는 까닭을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이야기에는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청'일 수 있는,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간난의 이야기와는 달리 선주에게는 죽음이 없다. 선주는 막막하게,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토로한다. 이는 선주의 삶에서 낯선 "막막함"이다. 선주에게서 돌연 일어난 그 안개 같은 막막함은, 새롭게 일어났다. 선주에게 없던 죽음이 이제, 세월을 거쳐 훌쩍 가까워졌으므로.

 죽음을 가지지 못했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선주의 이야기. 선주가 많은 심청 중 하나에 불과한 간난에게 특별히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선주의 셋째 아들이 지적한 바대로다. 선주는 간난에게 자신의 죽음을 투영하고 있다. 순조롭게 이행되어야 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았던 인신공양 의식과 그 필요 수단인 심청이라는 잘 짜인 구조에서, 선주는 비로소 인간 심청, 인간 간난을 읽어낸 것이다. 자신에게 죽음이 부쩍 다가온 사실을 통해.

 인신공양은 정당화될 수 없는 가혹한 짓이었다는 후회와 함께, 간난을 도망치게 하려던 선주에게 간난은 도리어 위로를 전한다. 선주의 이야기가 왜 없냐고 묻던 간난은 자신이 왕비가 된다면 선주는 왕이 되는지를 묻는다. 간난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선주의 아들이 건넸던 종이 연꽃을 선주에게 건네며 말한다. "연꽃은 선주에게 주겠소. 이 연꽃이 선주를 왕으로 만들어줄 것이오."

'심청전'의 신화로 치장됐던, 사업을 위해 바쳐져야 하는 제물인 간난은 어느새 선주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 선주는 간난을 살릴 수 없다.

선주, 죽음을 갖게 되고
'심청', 선주의 이야기가 되다
그리고 '심청'은 선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연극 '심청'은 사면 받지 못한 악한의 "인과응보"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선주는 선한 인물이 아니다. 선주는 오직 사업을 위해서 불행한 처지의 처녀들을 '심청전'의 환상을 통해 바다로 몸을 던지게 만들어왔다. 선주의 개심, 혹은 충동이 설사 간난을 구해냈다고 하더라도 선주의 죄는 사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덩어리져 놓여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극 '심청'은 단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극의 중반, 선주는 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 아래에 허공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인가? 내가 죽을 곳. 내 발 밑이 텅 빈 허공으로 보여."

선주가 본 허공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환영이며 가상적인 대상이다. 죽음을 얻어 이야기를 가지게 된 선주는 그렇게 조용히 숨을 꺼트린다. "선주 죽음이요." 땅으로 무너진 선주의 몸 위로 끝이 선고되고, 극은 막을 내린다.

연극 '심청'은 선주의 허공에 맞닿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선주가 제물로 바쳐졌던 처녀들의 허공, 그들을 검게 삼켰던 바다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듯, 우리는 선주의 허공에 우리의 죽음 또한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인간에게서 공평하게 압도적인 죽음으로써. 그래서 선주의 죽음은 용서와 단죄의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선주가 떨어진 허공, 죽음 앞에서 멍해지는 순간 우리는 애도나 동정 대신, 우리에게도 예비된 필연으로써의 죽음을 이해한다.

 그것으로 선주가 이야기가 된 '심청'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죽음을 매개로 하여.

 연극 '심청'은 5월 22일까지 나온시어터에서 무대에 오른다.

문화뉴스 김미례 기자 prune05@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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