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혈맥' 리뷰

 

 

[문화뉴스] 눈물과 웃음이 공존할 수 있는 무대, '혈맥'의 무대는 그것이 가능했다.

때는 1947년, 한반도에 광복이 찾아온 지 2년째다. 광복이 도래한다면 '호시절'이기만 할 줄 알았건마는, 광복직후 민초들의 삶에는 비극적 요소가 난무했다. '혈맥'은 광복직후 방공호에 사는 세 가정을 조명해 비극과 희극이 섞인 민초적 삶을 구현해낸다. 딸을 기생으로 보내야 하는 깡통 영감네,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 여전히 담배를 팔러 가야 하는 원팔이네, 그리고 아끼고 아낀 전 재산을 새색시에게 도둑맞은 털보 영감네.

문패만 붙여도 남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우길 수 있는 것이 가능했던 그 혼돈의 시대에도, 갑의 횡포는 여전했다. 그들은 이 비인간적인 주거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그 어느 곳에도 맘 편히 정붙이며 평생을 살아갈 '공간'이 마땅치 않다.

 

 

이 비참한 환경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입가에는 줄곧 웃음이 번져있다. 그들의 낙천성 때문이다. 전 재산을 홀라당 날리고도 깡통 영감의 위로의 술 한 잔에 털보 영감은 금세 귀여운 술 주사를 부리며, 기생으로 팔려는 계모의 핍박에 집 나가는 딸을 둔 깡통 영감도 "도망가려면 멀리 가거라, 그래야 땅굴 속을 면하지"라 읊조린다.

또한 내레이터를 맡은 배우 황연희의 존재감이 황홀하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보듯, 정적인 자세와 목소리로 방공호의 사정을 나직하게 말하던 내레이터는 극 중반부터 깡통 영감의 새색시 청진계집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더욱이 재미난 것은, 그가 내레이터이자 청진계집인 것을 굳이 숨기지 않고 관객들 앞에서 바로 그 역할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극내와 극외를 천연덕스럽게 오가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주기 충분한 포인트가 된다. 윤광진 연출가는 "이 작품은 1947년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사실주의 작품"이지만 "이제 칠십 년이 흐르고 이 극의 현실은 우리 주변에 사라지고 관객들도 변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극의 드라마나 사건에만 휩싸이지 않고 무대 위의 극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극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연출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우리 근대극에서 곧잘 느껴지던 무거움, 비극, 고난이라는 뉘앙스가 '혈맥'에서는 맥이 끊긴다. 무겁다가도 곧 명랑해지고, 비극적이다가도 웃음이 나고, 고통스럽다가도 금세 극과 거리감이 생긴다.

 

 

김영수의 희곡이 당시 민초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잘 그려낸 사실주의적 희곡일지는 몰라도, 이번에 재현된 무대에는 '사실적'이라는 요소로만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흘러간 70년의 세월을 무시하지 않은 윤광진 연출가는 지혜롭게도 관객과 작품 간의 거리를 적절히 진단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작품 '황금용'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내래이션과 캐릭터를 동시에 진행하는 영리한 배우의 위치를 설정했다.

 

 

웃음을 배제하고 비참함으로 가득한 근대의 '사실주의극'이 2016년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얼마나 '사실적'일 수 있을까. 윤광진 연출가의 선택은 탁월했다. 우리의 근대극 또한 괴롭지 않을 수 있고, 세련된 위트를 담아낼 수 있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국립극단의 근현대희곡 재발견 시리즈 '혈맥'에 가장 중요한 의의일 것이다.

국립극단 근현대희곡 시리즈이자, 김영수의 희곡을 원작으로 둔 연극 '혈맥'은 오는 1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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