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31 석민우 감독의 '대배우'

   
▲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문화뉴스] '국제시장', '베테랑'의 연이어 천만 영화를 달성한 황정민. 그는 최근 '히말라야'와 '검사외전'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천만 관객엔 도달하지 못했다. '왜 이번엔 천만을 넘지 못 했나'라고 짓궂게 묻는다면, '오달수의 빈자리 아닐까요'라고 웃으며 대답하고 싶다.

강동원의 이미지마저도 해내지 못했던 천만 영화를 일곱 번이나 해낸 대배우 오달수. 너무 요란한 도입부였다. 배우 중엔 자신을 대배우로 칭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오달수 배우 앞에서 직접 이런 말을 했다면 민망해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번엔 오달수 배우의 첫 주연작 '대배우'를 읽어보려 한다.

잘 실패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

석민우 감독은 '대배우'를 '잘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잘하다'와 '실패하다'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말인지, 이 조합이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과정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감독은 '시도'한다는 행위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석민우 감독의 의도가 영화엔 얼마나 잘 묻어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애매하다 생각한다. '좋은+실패'라는 단어의 애매함처럼.
 

   
 

주인공의 성공이라는 이야기 도식, 그 진부함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배우'는 작위적인 설정들을 피해갈 여지가 많이 있었다. 장성필(오달수)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는 노력형 인물이다. 그는 비범한 의지를 가졌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런데도 그는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한다.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그에게 원하는 것을 쥐여주려 하지 않은 잔잔한 전개와 담백한 결말이 좋았다. 비극적이었지만,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라 좋았다.

이런 작위적 결말의 배제는 '대배우' 지망생의 삶을 더 처절하고 현실적으로 그리게 했고, 덕분에 영화는 한 분야에서 '대가'의 삶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말을 걸고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물론, '대배우'가 이 주제를 표현한 방법에 동의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몰입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겠지만, 색다른 주제에 접근하려 했다는 시도가 분명 보인다.

설강식(윤제문), 깐느박(이경영) 등의 인물을 통해 카메라 밖의 배우, 감독의 삶을 엿보게 한 것도 '대배우'의 재미다. 그 밖에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노력하고 있는지 등 한국 영화판, 혹은 영화제작 환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영화의 매력이다. 특히, 박찬욱 감독을 표현한 이경영을 보는 게 즐거웠다. 여기에 다양한 카메오의 등장도 영화를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가혹하게 말하자면 '대배우'는 영화판에 대한 오마주 혹은 패러디, 그리고 카메오들의 이미지가 더 기억에 남을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절실함에 관한 이야기
'대배우'는 배우를 다룬 이야기이지만, 연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극 초반, 연기 지망생에게 고드름을 연기하라 지시하면서 내뱉는 대사, 그리고 장성필의 아들 장원석(고우림)이 연기에 대해 말하는 것 등을 통해 연기'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배우의 본질적 고민인 연기와 동떨어져 있다.

'대배우'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면 삼아 펼쳐지는 성공에 대한 열망, 절실함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앞서 장점으로 언급된 영화 제작 환경을 구현한 것이 소모적인 인상을 준다. '대배우'에서 영화와 배우 혹은 연기는 흥미를 위한 장치, 감독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배경지식의 활용, 패러디 혹은 오마주를 위한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장성필이 가지는 어려운 환경과 배역을 향한 열망, 무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노력. 이는 배우라는 위치를 다른 직업으로 대체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오랜 세월 개를 연기하면서도 품어온 연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영화 출연에 대한 열망, 연기를 위해 다리를 부러뜨리는 처절함. 여기서 유발되는 감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경이롭다. 그리고 장성필이 연기를 대하는 자세엔 숭고함이 있다. 생과 꿈을 향한 뜨거운 에너지가 느껴져, 관객을 뭉클하게 한다. 하지만 배우라는 소재,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그 어떤 독특한 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좀 게을렀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영화와 뗄 수 없는 '배우'를 조명한 영화임에도 연기와 배우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적어 아쉬웠다.
 

   
 

절실함의 오독
좋은 실패라는 말이 모호했지만, 그보다 더 애매한 것이 있다. 절실함이라는 태도를 표현하면서 '대배우'는 이중적인 관점을 취한다. 장성필과 설강식이 배역을 얻는 과정은 그들의 꿈을 향한 열망과 절실함을 보여주는데, 어딘가 아슬아슬하다.

'연기력만으로는 힘들다는' 영화 속 외침은 씁쓸하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절실함, 그리고 노력은 이런 현실 앞에서 항상 빛을 볼 수 없다. 부당하고, 답답하며 화를 낼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씁쓸함과 분노, 그리고 여전히 남아 갈 길을 찾지 못한 절실함이 어떠한 방법으로 표출되어도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대배우'는 이 지점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이 점은 이 영화의 문제이자 오류 혹은 위험이다.

장성필은 연기를 못하는 배우다. 영화 출연을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배역과 연기를 향한 절실함의 표출, 배역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어필, 설강식이라는 인맥의 활용이다. 심지어 납치까지 실행한다. 장성필이 택한 방법에서 처절함, 애절함, 그리고 꿈을 향한 절실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이런 생각도 스친다. 장성필처럼 배역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그 모든 사람이 저런 방법을 사용해야만 경쟁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장성필처럼 극단적 방법을 택하지 못한 이들은 절실함이 부족한 것일까.
 

   
 

장성필의 방법에서 리얼리티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경쟁자들과 다른 방법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한 배역이 옳은지, 끝으로 장성필은 자신의 꿈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래도 이 물음엔 영화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끝내 장성필은 부족한 연기력이 공개되고, 그에 맞는 처벌(배역의 상실)을 받지 않는가. 여기까지는 '대배우'의 태도가 확실해 보였다. 장성필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절실함은 옳은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모든 행위가 꿈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한 명의 배우 설강식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과거 설강식이 대호(강신일)의 배역을 획득하는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대호가 출연하지 못하게 감금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행위는 비윤리적이며,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설강식의 배역을 향한 열망은 범죄로 표출되었고, 결과적으로 꿈을 이뤘다. 무대에서 퇴장한 대호는 연기에 대한 절실함을 연기학원에서밖에 이어갈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연기를 사랑했는데, 설강식의 절실함은 대호의 절실함을 추락시켰다. 그것도 이상한 방법으로. 이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설강식은 장성필과 다르다. 그는 처벌 받지 않는다. 그에겐 장성필에게 없는 연기력, 즉 재능이 있었고, 재능이라는 면죄부 덕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여기서 영화는 노력보다 재능의 손을 들어주는듯 보였고, 재능이 선과 악을 초월하는 가치라 생각케 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감독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인가.
 

   
 

'대배우'엔 설강식이 가지는 죄책감이 표현되지만, 그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설강식은 대호에게 용서까지 받는다. 한 남자의 꿈을 짓밟은 '절실함'의 부도덕함은 함께 찍는 사진 한 장으로 봉합된다. 영화가 선택한 시선은 꿈을 위해 어쩔 수 없었고, 절실함이 만들어낸 불의의 사고였다 정도인 듯했다.

설강식에게 자리를 뺏긴 대호.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행동 중에 부도덕한 것이 있었는가. 그가 노력하지 않거나 간절함이 없는 인간이었나. '대배우'는 대호에 대해 많은 것을 담지는 않았다. 기껏 표현된 것은 배역에 대한 '욕심'이었고, 이 감정이 조금 과격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 욕심은 장성필과 설강식에게도 있었고, 그 욕심은 대호 나름의 절실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대호만 그렇게 씁쓸함을 맛봐야 하는가. 대호는 자신의 부재 덕분에 설강식이 재능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을까. 그리고 그런 게 좋은 실패일까. 석민우 감독이 말한 '잘 실패하는 것'에 관해 묻는다. 장성필의 부족함이 초래한 실패는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면서, 누군가 추락시킨 대호의 실패에는 왜 카메라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는가. 왜 그의 절실함은 고려하지 않았는가.
 

   
 

절실하다면, 나의 노력에 떳떳하다면, 그 어떤 방법도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능력이 보일 기회를 얻는 방법은 어떠한 것도 용인되어야 하는가. 노력하는 자가 약자의 위치에 있다면, 그들은 반칙을 써도 된다는 말인가. 영화를 뚫고 나와 던져야 하는 질문은, '대배우'가 보여준 상황을 면접, 선거 등의 생활/사회/정치적 관점에 대입해도 옳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설강식에게 취해야 했던 태도는 처벌로 귀결되는 시적 정의이거나, 극단적 악이다. 차라리 대호의 더 큰 추락 혹은 타락을 보여주고, 이에 무심한 설강식을 그리는 게 어땠을까. 그럼으로써 비윤리적 인간의 성공이라는 현실의 잔혹함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하지만 설강식이 피해자가 청한 화해를 통해 모호한 결말에 도달함으로써, '대배우'는 애매해졌다. 좋은 실패라는 모호한 말처럼, 절실한 노력과 잘못된 방법, 그리고 나쁜 성공이라는 것들이 어지러이 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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