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21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문화뉴스] '디렉터스 컷'이라는 용어가 있다. '감독판'이라고도 하는 이 단어는 다양한 분야, 작품(감독이라는 직책이 있는 수많은)에서 사용된다. 영화에서는 상영 시간, 심의 등의 요소가 발목을 잡아 감독의 표현을 제한하고는 한다. 이때, 감독이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재편집해 표현한 버전을 '디렉터스 컷'이라 부른다. 영화의 작가를 감독이라 한다면, 이 감독판을 그의 진짜 의도가 온전히 담긴 영화로 봐야 할 것이다.

늘어난 50분, 혹은 줄어든 40분의 뉘앙스
대개는, 아니 항상 영화의 디렉터스 컷은 DVD 등의 2차 생산물에 선물처럼 들어있었다. 그래서 이번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의 개봉은 특이하다. DVD가 제작되기 전, 그리고 아직 본판의 상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감독판을 연달아 상영하는 것은 '내부자들'이 최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임에도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음을 자축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감독이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일까.

우민호 감독의 최초 편집본은 3시간 40분이었다고 한다. 개봉된 '내부자들'은 2시간 10분이었으니 1시간 30분이 잘렸다는 건데, 이는 웬만한 영화 한 편 분량이다. 덕분에 상영 시간 확보를 통해 '내부자들'은 본 편의 거친 호흡을 보완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개의 속도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위험 요소도 안았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영화를 더 뜯어볼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는 점, 그리고 본 편과 '오리지널'의 차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람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늘어난 50분은 이 영화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바꿔놓았다. 이 글은 뉘앙스의 차이에 대해 잡담할 것이다.
 

영화 생산자들의 이야기
1)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려는 욕망

'내부자들'은 노골적으로 '영화'를 자주 언급한다. 안상구(이병헌), 이강희(백윤식)는 자신들이 계획하는 작업을 영화에 비유한다. 안상구가 비장하게 '너 나랑 영화 한 편 하자'라는 대사를 말하는 것을 기억하는가. 그는 극본을 짜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억대의 돈을 투자하며 개봉을 고대하는 영화 제작자(놀랍게도 1인 제작자다)였다. 이번 감독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안상구의 영화에 대한 내레이션인데, 그는 로만 폴만스키의 '차이나타운'을 언급한다. 몰디브와 모히또를 구분 못 함에도 고전 영화에 대한 지식, 혹은 애정은 유독 돌출되어 있지 않은가.

안상구가 영화 제작자였다면, 이강희는 원고지에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다. 그가 쓰는 글은 현실이 되고, 그의 원고지는 전지전능한 예언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강희의 회사 조국 일보는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제작사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의 투자자는 조국 일보의 광고주, 미래 자동차의 오 회장(김홍파)이며, 이 작품은 정치인 장필우(이경영)가 주연을 맡았다. 오 회장에게 '배우를 바꿔야 할 것 같다'며 건의하는 이강희의 대사에서 그가 자신의 글, 더 나아가 현실을 영화로 바라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안상구, 이강희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려 했다. 그리고 이들의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현실이 된다. 영화관이 아닌 현실에서 개봉되는 영화. 안상구는 자신이 직접 출연해, 교도소에 가면서까지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려 했다. 그리고 이강희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큰 창 안에 청와대를 배치하고, 거기에 자신의 시나리오까지 첨가해 현실로 만들고 싶어 했다. 정리하자면, '내부자들'은 자신의 영화를 개봉시키고자 했던 욕망을 가진 두 남자의 이야기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였을까.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 (거울처럼 마주 보는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도 '내부자들'의 재미있는 관람 방법이 될 것 같다) 두 사람은 순서만 달랐을 뿐, 결국 같은 처지가 되었다. 이강희를 믿었던 안상구는 그에게 뒤통수(이 맥락에서 조 상무가 안상구의 뒤통수를 때리는 장면은 꽤 재미있게 읽힌다)를 맞고 오른팔이 잘린다. 그리고 이강희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이후 칼을 갈았던 안상구는 우장훈을 이용해 이강희를 속이고, 오른팔을 잘랐다. 그리고 안상구의 영화가 개봉된다. 두 남자는 서로의 영화를, 오른팔이 잘린 채, 의수에 담배를 꽂고서 바라보는 영화광이었다.
 

   
 

2) 장르의 차이
앞서 두 사람이 가진 '영화를 개봉하려는 욕망'이라는 공통분모를 다뤘다면, 두 사람의 영화가 가진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애용하는 도구가 가진 성격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강희의 도구는 '연필'이다. 작지만 '글'을 쓸 수 있고, 이 글은 대중이 사고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강력한 도구다. 그리고 연필은 작은 크기 덕분에 숨기기 쉽다. 안상구의 도구는 '둔기'다. 크고 기괴하며 피를 부른다. 이 피는 공포를 부르며, 둔기 앞에 선 인간을 통제할 힘을 준다. 또한, 둔기는 그 크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다.

두 남자가 속한 세계는 영화였고, 장르적으로 '누아르'라는 지장 안에 있다. 그런데 둘의 누아르는 다르다. 이강희가 연필로 판을 짜는 정치 스릴러를 연출했다면, 안상구는 둔기로 피를 부르는 액션 스릴러를 추구한다. 정치 스릴러가 책상 위에서 진행되는 고요한 두뇌 싸움이라면, 액션 스릴러는 주먹과 둔기가 마찰하며 요란하게 진행되는 몸의 영화다. 그래서 이강희의 계획은 시시각각 변하는 권력과 그에 따르는 '줄타기'가 전개의 중심(영화엔 치실을 비롯해 다양한 '줄'에 대한 언급이 있다.)이 되며, 은밀한 배신은 필수적이다. 이에 비해 안상구의 시나리오는 무모하고 몸이 긁히고 피가 흐르지만, 남자 간의 믿음과 의리가 있는 마초적 영화가 된다.

이강희가 표정을 차분히 유지하며 연필을 감추듯 감정을 숨겼지만, 안상구는 둔기를 숨길 수 없듯 그의 적의와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이러한 그들의 차이가 뚜렷하게 보이는 장면이 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안상구가 이강희의 사무실에 찾아가 오른손의 복수를 했던 장면. 안상구는 보란 듯 그의 둔기를 과시하며 피비린내 진동할 액션 영화를 준비한다. 반면에 이강희는 책상 앞에서 연필을 숨기고, 그가 살기 위해 판을 짠다. 그렇게 이강희는 끝까지 연필을 무기로 사용해 연필로 만든 세계를 방어하려 했지만, 안상구의 둔기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3) 스크린의 차이
두 사람의 영화가 개봉되는 스크린의 차이도 두 사람이 속한 세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강희의 시나리오는 신문, 방송 등의 대중 매체라는 스크린을 통해 대중에게 개봉된다. 이에 비해 안상구의 영화는 개봉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제작 과정부터 험난했던 그의 영화는, 공식 기자회견이라는 통로를 통해 어렵게 개봉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폭로 영화는 금방 상영이 중단된다. 안상구가 잠깐 점유했던 스크린은 다시 이강희의 것이 되고, 안상구의 영화도 이강희에게 먹혀버린 것이다.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 영화는 비참하다. 개봉되지 못한 영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영화는 영화임에도 영화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언론, 재벌이 소유한 대중 매체라는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한 안상구에게 남은 스크린은 무엇인가. 안상구가 준비한 마지막 동영상은 TV, 신문 등을 통해 개봉되지 않는다. 대신에 그가 찾은 곳은 스마트 폰 등 개개인이 소유한 채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확산이었다. 이렇게 도식화한다면, '내부자들'은 올드 미디어에 대한 뉴 미디어의 승리, 대중매체 생산자들에 대한 개인 채널의 승리라는 서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달달한 것이 없는 엔딩
1) 죽음의 이미지

우민호 감독이 '내부자들'에 담은 세계는 정치, 언론의 죽음을 목격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첫 번째 이미지는 국회의사당에 있다. 영화가 국회의사당을 보여주는 장면에는 유독 한강이 자주 등장한다. (한 장면을 제외하고, 국회는 늘 강을 걸치고 등장한다) 강 건너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강이라는 장애물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카메라가 서 있는 곳과 국회의 거리이며,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국민)과 국회의원의 거리로 보인다.

특히, 우장훈이 눈에 보이는 국회를 꽤 멀리 있는 곳으로 표현한다. 우장훈이 정보를 공유하는 국회의원에게, '교수님 같은 분은 저기(국회)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안상구에게 강 건너 국회의사당을 보며 말하는 대사를 보자. 그때 우장훈은 그곳에 대한 불편함,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관객은 그가 가지는 국회에 대한 거리감, 괴리감을 엿볼 수 있다. 우장훈에게 그곳은 한 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 한 번 물들면 돌이킬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우장훈이 갖고 싶던 황금 동아줄이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이강희, 장필우의 세계이며 그가 끝내 거부하며 싸운 세계다. 서양의 스틱스 강, 우리의 고전 공무도하가 등에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강은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부자들'이 보여준 강 건너 국회의사당, 그곳은 무엇이 죽어있는 세계일까. 혹시 정의라는 달달한 것이 죽은 세계가 아니었을까.
 

   
 

죽음에 대한 두 번째 이미지는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강희가 만든 진실이자 현실이 된 시나리오, 신문. 영화엔 신문이 모욕(?)당하는 장면이 몇 번 있다. 한 정치인이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없는 신문을 보고, '이것도 글이냐'라고 말하며 창밖으로 버리는 장면.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 이강희 측의 행동대장이었던 조 상무에게 화형이라는 복수를 줄 때, 함께 타오르는 신문.

신문이 타는 이미지는 '내부자들'이 처음부터 꾸준히 말하고자 하려는 것과 맥락이 닿아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꾸준히 언론의 죽음을 말한다. '대중은 개, 돼지'라 말하며, 대중의 사고를 통제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언론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신문이 타는 장면은 죽은 언론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의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2) 달라진 뉘앙스에 대하여
이제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뉘앙스 차이에 대해 말할 차례다. 이강희가 말했듯 '의도했다'와 '의도를 의심케 했다'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르다. 누구에게는 '∼하다고 보기 힘들다'인 것이 어떤 이이게는 '∼하다고 매우 보여진다'가 된다. 이 말장난 같은 차이가 '내부자들'의 본판과 '디 오리지널'의 결정적 차이다.

이 질문부터 해야겠다. '내부자들'의 본 편은 해피 엔딩인가? 안상구는 이강희에게 오른팔을 오른팔로 갚는 복수에 성공했다. 재벌, 언론, 정치인의 더러운 행적은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스타 배우 장필우는 '졸라 고독하다'며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장훈은 속물 검사생활을 그만뒀다. 끝으로 안상구와 우장훈은 웃으며 몰디브와 모히토 타령을 한다. 정의라는 달달한 것이 없다던 안상구는 정의 비슷한 것의 맛을 본 것인데, 이 정도면 해피 엔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디 오리지널'의 엔딩엔 추가된 엔딩 장면이 있다. 우민호 감독이 이 장면을 뺀 이유는 관객에게 '희망을 뺐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장면이기에? 영화의 끝에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강희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독백이 내뱉고 있다. 그는 여전히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남은 왼손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짜겠다고 선언한다. 안상구가 오른손을 잃고 그의 영화를 개봉시켰듯, 이강희도 오른손을 잃었기에 새로운 방법으로 영화를 개봉시킬 수 있지 않을까.

롱 테이크로 구성된 이 장면은 자연스레 안상구의 독백이 등장하는 첫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 안상구의 복수극이라는 영화였다면, 이강희의 독백 뒤엔 그의 영화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애초에 안상구가 원했던 것이 정의가 아니라 복수극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나선 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는 영화의 엔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예상하게 한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이 정의였다면, 이 영화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가졌을 것이다. 아무튼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 준비한 엔딩은 본 편의 해피 엔딩을 뒤집었다.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엔딩이다. 관객이 목격할 수 없는 뒤의 시간, 우장훈이라는 내부자가 없는 이강희의 새로운 영화는 그의 잔혹한 복수극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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