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고선웅 연출 인터뷰

   
 ▲ 극공작소 마방진을 이끌어 가는 연출가 고선웅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올해 가장 만나보고 싶었던 연출가를 만났다. 올 한 해 가장 바빴을 연출가 중 한 명인 고선웅 연출가다. 그가 이끌고 있는 극공작소 마방진은 창단 10주년을 맞이했다. 10년 이상의 세월을 연극과 함께 하면서 그가 품고 있던 생각이 궁금했다. 지난 14일 명동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 고 연출이 힘 있게 툭툭 내뱉은 말들은 가슴에 콕콕 박히곤 했다.

무언가에 심취해 있을 때, 우리는 본질에 대해 곧잘 잊곤 한다. 그를 통해 잊고 있던 본질이 생각났다. 연극에 심취해 있는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연극'은 무엇이냐고. 여기, 고선웅 연출가는 연극은 '놀이'라고 생기 있게 대답한다. 어렵고 심각하기만 한 연극은 수없이 많다. 으레 연극을 뮤지컬보다 어렵게 생각하는 대중의 시선도 이런 연극계 분위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는 자신 있게 연극을 '즐기라'고 말한다. 현재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라는 작품의 연출을 맡은 그와 복수에 대해, 그리고 연극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 고 연출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통해 국립극단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올 한 해 무척이나 바빴다. '푸르른 날에', '아리랑', '홍도', '강철왕', 그리고 '조씨고아'까지. 올해 작품 중 가장 힘들었거나 기억에 남는 작업을 꼽는다면?
ㄴ 뮤지컬 '아리랑'이다. 워낙 작품도 크고 준비도 오래했다. 창작 뮤지컬로 받을 수 있는 평가나 냉엄한 도마 위에 놓일 작품이었다. 작업 자체는 즐겁게 했지만 심리적인 압박이나 부담이 있었다. 창작하는 사람은 늘 불안한 터널을 지나야 하니까 말이다.

이번 뮤지컬에 대해 '연극스럽다, 뮤지컬스럽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 똑같은 것을 하려고 하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소재를 우리 시대의 뮤지컬로 풀어가는 작업이었고, 모든 구성원들의 합의가 있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됐다. 나 혼자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방식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또한 '큰 책의 분량을 축약했다'고 말하는 말들에도 동의할 수 없다. 책 12권짜리 이야기를 줄일 수는 없다. 그 이야기를 담는다고 하기 보다는, 내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각색'이다. 각색하지 않고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흐름의 맥락을 잡아낸 상태에서 나의 식으로 정리한 것이 맞는 설명이겠다. 그것이 조정래 선생님께서 바라는 방향이셨을 것 같다. 산을 넘으려고 무지 애를 썼다. 하지만 곧 그 산을 넘을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산에서 떨어져 보니 그제야 산의 모양이 보이더라.

 

   
 

고선웅 연출가의 언변과 글 솜씨에 매번 놀라고 있다. 말도 워낙 유려하게 잘하고 글도 담백하면서도 뜨겁게 잘 쓰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ㄴ 비결은 딱히 없다. 하고 싶을 때에야 말을 잘할 수 있다.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을 만들면 이상하기 마련이다. 말을 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의 논리가 정연하든 하지 않든, 그 맥락이 분명하게 전달된다. 그렇지 않으면 애매하고 모호하다. 작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 작업이 열심히 잘 된다. 또한 관객들도 그런 공연을 봤을 때 저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구나가 분명해진다.

평소에 "애타게 하고 싶은 말을 찾아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배우도 그렇다. 극본에 쓰여 있는 것을 그냥 표현하면 그 배우가 애타게 하고픈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배우도 자신 안의 애타게 말하고픈 상태를 유지해야 관객이 주목하고 사랑하는 배우가 될 수 있다, 누구든 그렇다. 안에 '애타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연극은 놀이다"라고 말했던 연출가를 보며, 많은 학생들이 존경하는 연극인으로 삼았을 것 같다. 특별히 존경하는 연극인이 있다면?
ㄴ 나보다 앞선 연출가들 모두 존경한다. 연극계에서 오랫동안 버티셨고 그걸 업으로 삼고 계신 분들이니까 말이다. 선배 연출가 분들과 얘기하면 꼭 배울 게 있다. 어떤 부분은 관대하고, 어떤 부분은 촘촘하고 매력 있게 만드신다. 어떤 부분은 완벽하게 하는 것 같지만,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아무 것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가 강렬히 '한' 것으로 보였던 적도 있다. 볼 때마다 배우고 반성한다. 선배 연출가들의 작업을 계속 보면서 내가 배울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있다. 그분들을 비판적으로 볼 생각이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연극 '푸르른 날에'를 거의 15번 정도 봤다.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다가오면서, '익숙한 내용은 있어도 익숙한 연극은 없다'라고 느꼈다. 고 연출도 리허설 혹은 공연 마다 와서 호쾌하게 웃거나 눈물짓는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다. 자신이 직접 제작하고, 매번 보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로웠는가?
ㄴ 연극은 매일 집을 짓고 매일 집을 부수는 작업이다. 매일이 '새 집'이니까, 새 집 살이도 매번 다르다. 매일 똑같은 자리에 침대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침대에서 자는 잠자리는 다 다르다. 연극이 매번 똑같다면 연극이라는 작업이 생산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끊임없이 늙어가고, 하루하루 벌어지는 일이 달라진다. 극장에서도 배우의 컨디션이 매일 다르기 때문에 그 조합도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마방진'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숫자의 조합에 따라 매번 재배열이 되듯이, 배우들이 그 칸 속에 있다면 계속 느낌들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느 한 숫자가 변한다면 조합에 의해 다른 숫자들도 변할 수밖에. 그러니 매번 같은 연극을 보더라도 다르게 다가온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 번 본 연극을 또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출을 할 때마다 재공연을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작업이 된다. 한번 올릴 때마다 비용이나 배우들의 공력 등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매순간 새로운 작품을 올릴 때마다, 재공연을 올릴 수 있는 작품인지 아닌지 검증을 받는다. 배우들도 언제까지나 새 작품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신작들도 계속 창작돼야 하겠지만, 재공연도 많이 올라가는 게 맞다.

 

   
▲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습 현장

본인이 이끌어 가고 있는 극공작소 마방진 배우들과 국립극단 배우들은 어떤 점이 다른가?
ㄴ 둘 다 똑같다. 그러나 어찌 보면 국립극단 배우들은 모험이 아니라, 검증이 끝난 배우들이라고 할까. 마방진 배우들 중에는 검증을 아직 거치지 않은 배우들도 있다. 이미 외부에서 검증받은 배우가 있긴 하지만, 나와 작업한 게 전부인 배우들도 있다. 그 친구들은 아직까지 야생에서 검증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마방진 1, 2, 3기 배우들 정도면 밖에서도 곧잘 적응한다. 호산, 이명행, 조영규, 이영미, 김명기 배우 등이 1기다. 현재는 5기까지 뽑았다. 1, 2, 3, 4기까지는 밖에서도 별 문제가 없다. 지난 여름에 공연했던 '강철왕'에 출연한 배우들 중 5기 단원들이 많이 있다. 5기는 '강철왕'을 통해 처음 무대에 선 배우들이다.

 

   
▲ 조씨고아를 안고 있는 정영(하성광)

기자 간담회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금껏 해온 각색 중에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ㄴ 예전의 동거와 지금의 동거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지금의 동거를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지, 과거를 사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작품일 지라도 지금 연극 '푸르른 날에'를 한다면, 나는 '푸르른 날에'를 사랑할 것이다. 가장 현재의 것을 가장 좋아할 것이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철든 순간이 현재일 테니까.

이번 작품은 복수의 전과 후의 시간들에 초점을 맞췄다.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복수의 주체는 행복하게 복수했고, 복수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복수를 무려 20년간 준비해온 정영이 너무 가엾게 느껴지며, 과연 '복수'란 그것을 품어온 사람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불행한 일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고 연출이 생각하는 '복수'는 어떤 의미였는가?
ㄴ 어떤 작품에서든, 복수하는 장면은 몇 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저 사람을 죽이기까지의 시간과 과정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단단하게 결심하는 것, 곧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드라마다. 복수를 결행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을 것이냐를 정리하는 거다. 정영이 고아의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이 이번 연극의 드라마다. 고아에게 맡겨진 것은 '복수를 할 수 있는가, 자기의 의부(도안고)를 죽일 수 있는가'였다. 그런데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봤는데도 고아는 결행을 해낸다. "그깟 뱉은 말이 뭐라고"라는 대사가 극중에 나오지만, 고아의 행동은 가능한 것이었다. 이번 작품은 보면 볼수록 괜찮은 작품이다. 공연을 올려놓고도 많이 본 편이다.

 

   
 

'각색의 귀재'라는 호칭이 붙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각색 작업에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ㄴ 재주가 좀 있는 것이지, 귀재까지는 아니다. 먹고살 만큼의 재주다. 원작이 좋으면 각색도 잘 풀리고, 좋지 않으면 애를 먹는다. 작업을 할 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보이면 된 거다. 가령, 집을 사려고 할 때 어떤 집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선명해져야 집을 짓는 사람이 지을 때 감안해서 짓기 쉬워진다. 그런데 그런 걸 잘 설명하지 못하면, 짓는 사람은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집이 중구난방으로 지어질 것이다. 선명한 무슨 색깔이 있을 때에야 작업하기가 쉬워진다. 아까도 말했듯이 '애타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원작이면 이야기를 잘 엮어갈 수 있다.

'조씨고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들렸던 것은, "인생은 짧은 꿈.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춰 놀다보니 어느 새 늙었구나."라는 공손저고의 대사였다. 그 말이 가장 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들어와 박혔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우주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시시각각 변하며, 생로병사를 겪으며, 짧은 꿈을 꾸며 죽는다. 누구는 평생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고, 복수를 위해 산다. 그러나 결국 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또한 모두 죽을 존재임에도, 끝까지 버티려고 한다. 다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좋게 살다 가면 좋을 텐데 끝까지 악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고 연출의 연극을 보면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게 한다. 흔히 알려진 비극이라는 이야기들에 희극적 요소를 과감히 넣는데, 이렇게 희극과 비극의 조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ㄴ 인생은 어차피 섞여 있다. 나는 희극이라기보다는 '이화(異化)'라고 얘기한다. 계속 동화(同化)만 되면 사람은 굳고 결린다. 나는 동화되는 과정에 이화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이화는 더 강한 동화를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계속 감동만 받을 수는 없다. 중간 중간에 유머를 써야 한다. 동화를 더 단단히 하기 위해 말이다. 극중 인물들도 상대방이 심각하다고해서 모두 비극일 필요는 없다. 엄숙함을 곧이곧대로 전체로 삼을 필요 없다. 연극으로 장난치는 게 아니라 노는 거다. 연극은 '놀이(play)'니까 말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오태석 연출가가 생각이 난다. 혹시 오 연출가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가?
ㄴ 영향 많이 받았다. 학교 다닐 때 그분께 감동을 많이 받았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 연극에서는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겠는데 눈을 뗄 수 없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87년도 즈음 그분의 '부자유친'이라는 작품을 봤을 때, 노트에 이렇게 적었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도 재밌게 볼 수 있네? 연극은 음악 같아도 되는 구나'라는 메모였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 중에 다시 만들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ㄴ 꽤 많다. 연극 '뜨거운 바다', '리어외전', '마리화나', '날숨의 시간' 등이 있다. 괜찮은 작품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냥 그 공연들이 계속 무대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내년에는 어떤 작품을 작업할 예정이고, 앞으로 어떤 연출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ㄴ 내년 작품들은 아직 스케줄 조정 중에 있다. 나는 늘 'n분의 1'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연극 연출가로 나오면서 스스로 자문해봤다. 연극을 하면 내게 뭐가 좋은지 말이다. 그때 만든 논리가 '연극 하는 사람이 10명인데, 내가 들어가서 11명이 되면 더 풍성하고 붐비고 좋을 것 아냐?'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들어가서 더 풍성해지는 것. '연극계에 고선웅이 있어서 다채로워졌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래서 세상 존재하는 것들은 모든 것이 존재함으로써 아름답다. 필요치 않은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발생한 프랑스 테러 사건을 보면서, 인간이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며 참 가슴이 아팠다. 이 일은 전 세계의 공분을 살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보복과 응징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복하면서도 완전히 후련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보복하는 과정에서 일면식도 없는 희생자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복수는 쓸쓸한 일이다.

[인터뷰, 글, 영상]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국립극단
[영상 편집]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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