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 날에>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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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편으로는 다 풀어내지 못할 연극 한 편을 만났다. 벅찼다. 그야말로 '벅찬' 연극이었다. 족히 열 번은 넘게 보았던 듯싶다. 이제는 장면과 대사, 노래까지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익숙한 내용이라 해서, 익숙한 연극이 되지는 않았다. 매번 촉촉해지는 눈가는, 연극이 왜 '연극'인지, 왜 이 연극이 '벅찬' 연극인지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칼을 버리라고 했더니, 꿈마저 버렸느냐"

아직도, 가슴 속에 사무치는 대사이다. 연극은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견뎌낸,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1980년 5월, 광주가 겪어내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 앞에, 그 누가 개의치 않을 수가 있으며, 그 누가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연극 <푸르른 날에>는 이 역사를 하나의 '배경'으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사건의 중심이자 주체였던 5월 18일의 민주주의 물결을, 한 개인의 역사적인 삶 속 하나의 배경으로 나타낸 것이다.

끔찍한 날의 사건은, 그 사건을 기억하는 주체가 진정한 주체이지를 못 하게 한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나라는 주체는 기억에 의해 지배당하는 '객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수많은 역사를 왜곡하여 기억했고, 트라우마를 만들어 역사도, 개인도 제 본질을 잃어가게끔 만들었다. 5년 전 시작했던 첫 <푸르른 날에>가 감격스러웠던 이유, 그리고 5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 연극이 고마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극은 5월 18일의 아픔 자체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오민호'라는 20대 청년이 '여산'이라는 50대 스님이 되기까지, 한 사람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지극히도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5월 18일의 기억을 회상하게 하였다.

   
 

50대가 되어버린 여산과 정혜가 30여 년 전 그날을 기억하며, 현재와 과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행방식은, 1980년에 머물러있지만은 않는 연극의 동시대성을 담아낸다. 더불어 민호와 정혜가 과거를 함께 회상함으로써, 미처 풀지 못했던 지난날의 불행한 인연을 풀어가는 쾌감적인 실마리를 서사의 구성으로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괴로웠던 지난 인생은, 결코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1980년 5월 광주라는 시공간 속에 속해 있던 사람이라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피하기 쉽지 않았을 테다. 그렇게 정혜와 민호는 '누가 더'랄 것도 없이, 저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주인공 민호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죽이고 있는 군인들에게 목숨을 구차하게 빌어야만 했고, 잔인한 고문도 견뎌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한 젊은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며 스스로 '칼'을 품게 된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마저 절망 속에 빠뜨리는 '칼'을 말이다. 일정 스님은 그런 민호에게 "칼을 버리라"고 말한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던 민호에게, 일정 스님은 불교의 뜻을 가르쳤고, 그는 그렇게 겨우 스스로 향했던 칼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절에 들어가 30여 년의 세월을 지냈으면서도, 잊지 못한 자신과 정혜의 딸 운화를 재회하게 되면서, 그는 속세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저 자신을 질타한다. 여기서, 죽은 일정 스님은 높은 곳에서 여산에게 외친다. "칼을 버리라고 했더니, 꿈마저 버렸느냐!"고 말이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빠져 자야지."라고 말이다. 여산은 살기 위해 칼을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죽이는' 칼을 버리면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꿈마저 버렸느냐고 일정 스님에게 질타를 받는다. 그 말이 꼭 나를 향한 말인 것 같아서 눈물이 솟구쳤다. 칼을 버리기 위해, 즉,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삶이, 그 인생이 과연 '나다운' 삶인가, 인생인가를 뒤돌아보면, ……. 사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버겁고 힘든 우리에게, '자신답게 살라고, 너의 꿈을 계속 바라라'고 하는 요구가 너무나 부당 해보였다. 너무나 모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호'는 '여산'이 되면서 깨닫는다.

   
 

"땅에서 넘어졌으니,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야겠지요."

넘어졌다. 넘어진다. 넘어질 것이다. 우리 인생은 넘어짐의 연속이다. 넘어지지 않고서는 삶을 부지할 수가 없다. 역동적인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삶일진대, 어찌 단 한 군데의 상처도 없는, 햇볕에 그을린 흔적 하나 없는 무결점의 피부가 존재할 것이냐 말이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고 나서 다시 일어설 것이냐, 계속 주저앉아 있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여산은 딸 운화를 만나고 나서 울부짖으며 고민한다. 그가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는 온전히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은 일정스님이 나와서 여산에게 '꿈마저 버렸느냐'고 질타하는 것은, 그가 일어서지 않은 채로 다리를 질질 끌며 인생이라는 길을 헤쳐 왔기 때문이다. 너무 크게 넘어졌던 민호는 다시는 넘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인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고, 그는 일어서지 못한 채로, 주저앉은 채로, 길을 건너왔다. 그래서 30년이 지난 순간까지도 그는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인생을 마주보기 두려워했던 것이다.

비록 30여 년을 질질 끌어온 인생이지만, 딸 앞에서 그는 다시 일어선다. 사랑했던 여자 정혜를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땅에서 넘어졌으니,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야겠지요."라고 읊조리며 말이다.

   
 

그렇게 연극은 '나'라는 한 개인에게 주목한다. 1980년 5월 광주를 살고 있었던 수많은 인생을 하나하나 비추어볼 수는 없다. 우리의 관심과 기억의 한계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역사의 기록마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역사를 살았던 한 '개인'이 있었음을 새삼 발견한다. 그 평지풍파를 노골적으로 겪어낸 개개인들을 통해 역사의 자율성이 되살아난다. 하나의 시선, 하나의 기록, 하나의 기억만이 존재했던 거대하고도 보편적인 역사적 절대성이, 연극을 통하여 수많은 시선, 다양한 기록, 저마다 기억으로 존재해야 할 '역사적 자율성'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연극의 끝자락, 두 배우는 신나게 몸을 흔들며 대화한다.

"누가 우릴 기억해줄까?"
"누가 기억해주는 게 중요하당가? 한 시절 잘 살다 갔으면 그만인 거지."

그랬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한 시절, 잘 살다 가는 것 말이다. 그렇게 개인이란 존재는 '살고 있다'는 '순간'이 중요한 존재이다. 어려울 것 없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역사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개인들은 저마다의 역동성을 내뿜으며, 한 시절 한 시절을 아주 '푸르게' 물들여갈 것이다. 그리고 연극 <푸르른 날에>는 우리의 푸르렀던 시절을 회상하게 해주는, 혹은 지금의 푸른 순간을 실감하게 해주는,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푸르른 날을 기대하게 해주는 연극이 되었다.

끝으로, 연출 고선웅 씨의 말을 빌린다.

"다들,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처럼 사랑합시다!"

#문화뉴스 아띠에터 장기영 artietor@mhns.co.kr

[내레이션 ⓒ 이윤희,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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