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 ‘진동(振動)’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고도 가치롭다.

진동이라는 것은 일정한 주기성(週期性)을 띠고 위치를 이동시키면서 반드시 ‘회귀(回歸)’되는 현상으로, 평형상태에서 벗어난 후 평형상태로 다시 복원되려는 힘의 반응을 일컫는다.

음악 용어에 보면 <트릴 'Trill'>과 <트레몰로 'Tremolo'> 그리고 <리토르넬로 'Ritornello'>라는 말이 있다. ‘트릴’은 악보에 쓰여진 으뜸음과 2도 위의 도움 음의 빠른 연속적인 반복을 말한다. 그러나 ‘트레몰로’는 같은 한 음의 떨림으로 트릴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트릴은 진동하는 음의 높낮이가 달라서 회귀가 이루어지지만 트레몰로는 같은 음의 떨림이기 때문에 회귀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리토르넬로’란 원래 이탈리아어 ‘리토르노(Ritorno)’의 의미인 '돌아오다' 즉, '회귀' 를 말하는데 보통 ‘반복구'라 하여 후렴 부분 같은 악구(樂句)가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변주적(變奏的) 반복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나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 Deleuze)’가 '영원회귀(永遠回歸, Eternal Recurrence)'를 말할 때, 그것은 트레몰로 같은 '고정된 반복'이 아니라 트릴이나 리토르넬로 같은 '차이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차이가 있어야만 반복이 있는 것이고 그 반복을 통하여 '영원회귀'의 의미가 생성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동이라는 현상은 반드시 물리학이나 음악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인생의 형태나 사람들의 행동 패턴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항상 제자리에 고착되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늘 유동적이면서 먼 세계를 꿈꾸는 개체이기 때문에 그 궤적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면 그것은 작은 변화를 품고 있는 진동에 불과하다. 아무튼 회귀란 본능에 의해서든, 또는 계산에 의해서든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다는 데서 인간 행동의 고정적 패턴을 보여준다. 이는 일상의 평범함이 지루하고 권태로워 또 다른 특별한 세계에 빠져들었다가도 언젠가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정말이지 일상으로 돌아올 때의 느낌이란 올림푸스(Olympus) 산정까지 밀어 올린 돌이 굴러떨어져 다시 그것을 밀어 올리기 위해 산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는 '시지푸스(Sisyphus)'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이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신화(神話)를 통해 '시지푸스'의 운명이 바로 그 진동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흔히 광인(狂人)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진동의 에너지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즉 계속되는 반복에 묶인 채 탈선이나 방종을 통해 나아갔던 세계에서 다시 회귀하지 못하고 그 속에 주저앉은 사람, 그가 바로 광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의(義)로운 사람은 그 진동의 리듬 속에서 온전한 회귀를 이루는 사람이다. 이것이 인생의 정로(正路)이다. 이는 성경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이사야 57장 2절)

이 두 가지 형태 중에서 필자는 굳이 어느 편이 더 낫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만 진동이 없는 삶은 단호히 거부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미 맥박이 진동하지 않는 것처럼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중에 앞서 언급한 ‘시지프스’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시지프스는 최근 모 유명 정치인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네 번째 반복 출두하면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그 이름을 소환함으로 거의 모든 국민에게 알려지게 된 신화 속 인물이다. 이는 어느 특정인을 떠나 식자(識者) 집단인 이 시대 정치인이 국민에게 주는 지적(知的) 선물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선물이란 그 내용을 알고 주어야지, 모르고 주었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외국 언어(言語) 중 ‘기프트(Gift)’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선물’이지만 독일어로는 ‘독(Poison)’이기도 하듯이.....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1488~1576)의 '시지푸스(Sisyphus)‘, 1549년 작 210cm x 237cm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1488~1576)의 '시지푸스(Sisyphus)‘, 1549년 작 210cm x 237cm 

시지프스는 신(神)들을 기만한 댓가로 큰 바위를 산(山)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일을 무한 반복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 정치인이 발표한 입장문에서의 시지프스에 대한 언급 부분을 보면 “비틀어진 세상을 바로 펴는 것이 이번 생에 저의 소명이라 믿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굽힘 없이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기꺼이 시지프스가 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시지프스가 바위를 반복하여 밀어 올리는 모습은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는 것이지, 타(他)에 의한 억울한 고난의 모습이 아님을 인지(認知)하는 한 이는 시지프스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왜곡된 발언으로 여겨진다. 

바라기는 그 정치인에게 있어서 시지프스라는 트릴은 단순히 반복되는 형벌적 의미의 [진동]보다는 진정한 반성을 통한 인간적 의미의 마지막 [회귀]가 되었으면 한다.

문득 당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이자 교수였던 1692년 이탈리아 태생의 ’쥬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가 작곡한 [악마의 트릴 'Devil's Trill']이 생각난다. 

이 작품이 태어나기까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타르티니가 젊은 시절의 어느 날 밤 꿈속에 나타난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 내용은 악마가 자신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혼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악마는 타르티니의 바이올린으로 한 곡의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신들린 연주였다. 이 신비로운 연주에 매료된 타르티니가 꿈에서 깨어나 악곡을 되살리며 악보에 옮긴 곡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들은 선율을 그대로 재현해 내지 못한데 대해 실망감은 있지만 그래도 타르티니는 이 ’악마의 트릴‘이 자신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아끼는 곡이었다고 한다.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타르티니는 왼손 손가락이 6개였기에 이토록 어려운 트릴 연주를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두 4악장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제2악장과 제3악장은 연결되므로 실제로는 3악장의 곡이다. 제목인 ’악마의 트릴‘은 마지막 제3악장에 등장하는데 매우 신비롭고 경쾌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감흥과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Giuseppe Tartini / Sonata for Violin and Continuo in G minor [Devil's Trill]/ 1. Larghetto  affetuoso 2. Allegro  energico - Grave 3. Allegro assai-Andante-Allegro assai / Anne-Sophie Mutter, Wiener Philharmoniker, James Levine

이글을 쓰다보니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가 떠오른다. 어떤 면에서 탕자는 오늘의 주제인 [진동과 회귀]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여겨진다. 사실 우리 모두 탕자가 아닐는지?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돌아온 탕자’ 1669년작, 262cm x 206cm. /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돌아온 탕자’ 1669년작, 262cm x 206cm. /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소장

필자는 마치 탕자와 같은 우리 인생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고 싶다.

“혹, 삶의 진동에 의해 멀리 나왔습니까? 지금 바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떠나온 곳에 회귀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어차피 [진동과 회귀]는 정상적 삶의 패턴이니까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회귀하는 것, 이 땅에 나그네 삶을 마치고 본향으로 회귀하는 것. 이것이 인생의 한 번뿐인 가장 큰 진동이 아닐까요?”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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