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원은 2004년 인도 쓰나미 국제구호활동을 시작으로 미얀마, 아이티,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일본의 자연재해 구호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미국, 중국, 캄보디아, 몽골, 베트남, 라오스, 네팔, 독일, 코스타리카등의 평화 현장을 찾았다.

서울디지털대 교수로 있으며 역사의 흔적과 여행을 통해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로 이어진 관계임을 전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부라나 타워
[사진=윤창원] 부라나 타워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윤창원] 키르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작은 나라중 하나다. 1991년 소련 연방붕괴과정에서 중앙아시아 5개 신생국가중 키르키스탄은 유일하게 2005년 민주화 혁명을 거쳤다. 2005년 2월과 3월 시행된 총선의 선거부정으로 키르키스탄 수도인 비슈케크의 중앙정부 청사를 시민들이 점거하고 대통령의 망명을 요구하는 무혈시위를 주도하였다. 키르키스탄은 씨족주의, 다민족주의에 기반한 역사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관료제의 역할이 미미한 곳이다. 높이 솟아오른 설산으로 통행에 제한을 받지만 지금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강제이주는 1937년 9월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전부터 1930년대 고려인 지식인들이 키르키스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키르키즈 반체제 인사 139명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어 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도 고려인들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사는 당 중앙위원회와 인민 내각 회의가 공동으로 극동지방 23개 지역의 모든 고려인들을 1938년 1월 1일까지 중앙아시아로 이주 완료할 것을 결의하고 18만 명이 넘는 거주민들에게 사흘 내에 떠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하며 비극의 이주사가 시작됐다.

1937년 고려인들은 삶의 터전인 러시아 극동ㆍ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으며, 이주 지역은 참으로 참혹한 땅이었다. 1930년대 후반 들어 스탈린은 노골적으로 소비에트 민족들에게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대국주의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족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수단, 민족의 강제 이주를 진행시켰다. 

18만 명 정도가 이주행렬에 올랐는데, 고려인들이 그렇게 갑자기 강제적으로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땅을 뒤로 한 채 떠나야만 했는지 당시 그들은 왜 왜 척박하고, 낯선 땅으로 가야 만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중 25,000-30,000 명 정도가 강제이주과정에서 사망했다. 끔찍하고도 두려운 참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추위속의 서러운 죽음의 여정이었다.

비슈케크에서 30분거리에 있는 공산혁명의 비극이 서린 아타베이트 국가 유공자 모역에 가면 첫눈에 들어오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노끈과 철사로 묶여 고통받는 3인의 대형동상이 있다. ‘아타베이트(Ata-Beyit)’는 ‘우리 아버지의 무덤’이라는 의미인데 1937년 스탈린의 탄압기간동안 살해된 1940명을 기념하는 묘역이지만 고려인들의 죽음과 오버랩되는 묘역이기도하다.
고려인들의 죽음은 소수민족이라는 태생적 취약함과 국가기관의 엄청난 공권력 앞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객관화할 기회를 찾지 못했고 모역을 병품처럼 둘러싼 천산의 만년설은 나라없이 백년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우리 고려인들의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하다.

 [사진=윤창원] 아타베이트 묘역
 [사진=윤창원] 아타베이트 묘역

5000m 천산산맥의 빙하수와 눈물로 채워진 해발 1,600m에 위치한 산정호수인 '이식쿨' 호수는 길이가 180km 폭이 60km에 달해 키르키스탄의 바다로 불리는 곳이다. 세계에서 2번째 큰 담수호로 0.7% 염분을 가지고 있어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이식쿨은 키르키스탄어로 따뜻한 호수라는 뜻인데 중국고전에 '열해'라고 불리워 졌고 근처에 온천도 많다.
과거 이곳도 실크로드가 지나갔고 중세에는 서방에서 피신해 온 마니교도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가 거주하였고, 위구르족과 공존하였으나 14세기 흑사병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깊은곳은 700m가 넘는데 이곳에서 도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니 인류의 흔적에 새삼 대단함을 느낍니다.

부라나 타워는 키르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80km 정도 떨어진 톡크목(Tokmok)이라는 곳에 소그드인들(스키타이 민족)이 12세기경에 세운 원통형 첨탑이다. 이 탑은 천문대와 전망대, 방어용 망루, 기도시간을 알리는 기능, 실크로드 대상들을 위한 등대의 기능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다양한 설이 있다. 튀르크 역사학자들은 몽골계 민족도 튀르키예 민족이 알타이 산맥으로 나눠지며 분화했다 주장한다. 튀르크인들은 영생을 믿고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을 기리고 돌에 대한 신성함을 믿는 문화가 결합되어 석인상을 만들어 '발발'이라는 장례문화를 만들어 냈다. 

발발은 몽골·투르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장례풍습 중 하나로 업적과시뿐만 아니라, 고인에 대한 존경과 명예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석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투르크인이 믿었던 돌의 신성함과 조상령 숭배가 결합되어 나타난 풍습이다.
부르나 타워 주변에는 석인상들이 흩어져 있고 석인상중에는 상투를 틀고 있는 모습도 있다. 튀르크 민족도 상투를 트는 문화가 있다고 하니 그 석인상이 그였는지 우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설산에 둘러쌓인 황량한 이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느낀다.

우리나라와 키르기스스탄은 2016년 64.3백만불에서 2021년에는 112.9백만불로 교역액이 급성장하고 있다.  ODA 중점협력국으로 선정하고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중장기 ODA 지원 계획을 담은 국가협력전략을 2022년 1월에 마련(2하였고 이러한 제도적 기반을 바탕으로 환경, 공공행정, 농림·수산, 보건·위생 등 중점협력 분야에서 양국 간 개발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않은 자연환경과 고려인들의 흔적을 통해 키르키스탄을 만나보면 좋겠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