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돈 크레머 & 크레메라타 발티카,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내한
발틱 출신 연주자들 연이어 공연

사진=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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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수요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조성진 그리고 쇼팽' 공연이 진행됐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쇼팽 피아노협주곡 제1,2번의 연주협연 및 쇼팽의 녹턴 Op. 62-2(빅토르 키시네 편곡) 연주를 선보였다. 이어 9월 2일 금요일 저녁 예술의 전당에서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연주가 있었고, 파보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까지 이어졌다. 발틱 연주단체들의 향연에 국내 클래식 관객들이 흠뻑 젖어든 것이다.

“발틱 국가들 음악의 전령사,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

발틱 국가 출신 연주자들 가운데 국내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라트비아 출신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작고했지만 몇 번의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의 인상적 내한무대 연주로 뇌리에 선한 마리스 얀손스 같은 지휘자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간 10여 차례 이상의 내한무대를 펼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를 우선적으로 꼽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이는 역으로 얘기하면 발틱 국가들 음악의 전도사로 기돈 크레머를 꼽을 수 있고, 기돈 크레머가 그런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왔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기돈 크레머는 현존하는 러시아 및 동유럽 작곡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 그들의 중요한 신작을 많이 연주해왔다. 이중에는 그에게 헌정하는 곡도 다수 포함돼 있다.

현대음악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기돈 크레머는 피아졸라 등 탱고음악의 녹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Eight Seasons' CD 앨범은 비발디의 사계 연주 중간중간에 피아졸라가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를 삽입해 탱고음악에 대한 흥미를 북돋운 음반으로 기억에 남는다. 기돈 크레머는 비발디의 사계를 ’Eight Seasons'라는 이색적 클래식앨범 타이틀로 사계의 새 버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기돈 크레머가 이끄는 크레메라타 발티카가 몇 차례의 내한연주회를 통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 발틱 나라들의 음악의 전령사가 되어온 것 역시 마찬가지다. 클래식 주류 음악을 넘어 아르보 패르트, 기야 칸첼리, 페테리스 바스크스,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 알렉산더 라스카토프와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계 초연하는 크레메라타 발틱카만의 독창적인 프로그램 구성은 크레메라타 발틱카의 예술적인 특성의 중요한 부문을 차지하는 것으로 회자돼왔다. 

사진=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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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크레메라타 발티카 내한연주회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브로 패르트의 '프라트레스(형제들)', 라트비아 출신 작곡가 야캅스 얀체브스키스의 '리그넘(나무)', 라트비아 출신의 작곡가 아루투르스 마스카츠의 '한밤중의 리가'가 연주됐다. 발틱 출신의 연고가 있는 연주단체가 아니라면 들려주기 어려운 연주곡들을 들려줬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아르보 패르트의 ‘형제들’은 언뜻 단순하게 들리는 음악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명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두 개의 주제 선율과 나중에 가세하는 또 하나의 선율은 수도사들이 묵상을 하며 수도원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모습을 연상케해 이채로웠다. 

작곡가가 라트비아의 울창한 숲과 사계절, 그리고 이를 통한 명상을 음향으로 구현했다는 야캅스 얀체브스키스의 '나무(Lignum)', 현악 앙상블의 피치카토 연주와 비브라폰이 한데 어우러지며 탱고풍의 매혹적인 음악이 펼쳐지는 아르투르스 마스카츠의 '한밤중의 리가(Midnight in Riga)'도 돋보였다. 이런 발틱 특성의 연주는 크레메라타 발티카가 아니면 들려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올해 크레메라타 발티카 연주의 중요한 성취는 슈베르트의 위대한 연가곡집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모은 21세기의 또 다른 ‘슈베르트 사이클’, 프란츠 슈베르트와 여러 작곡가들의 '또 하나의 겨울나그네'(Another Winterreise)를 국내 관객들에게 귀중하게 들려준 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이들의 작품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녔지만 모두 21세기의 음악언어와 19세기 초반 슈베르트의 독일 낭만주의를 하나로 엮은 인상적인 표현을 들려준다. 또 각 작품사이에는 슈베르트의 '춤곡'(D93)에서 가져온 미뉴에트 단편을 일종의 간주곡으로 삽입해서 전곡에 통일성과 응집력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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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 또 하나의 발틱 연주의 정점”

9월3일 토요일 오후 예술의 전당, 9월4일 통영국제음악당, 9월5일 월요일 저녁 경기아트센터에서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첫 내한연주회를 가졌다. 이들의 연주는 또 하나의 발틱 연주단체의 정점을 보여줬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파보 예르비는 과거 도이치캄머필과 함께 선보인 빠른 템포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로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이미지가 선명하다. 파보 예르비의 멘토링 아래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자신들 연주의 특별한 색깔로 에스토니아 고유의 정서적, 문화적 특징을 담아냈다. 에스토니아 출신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의 ‘벤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와 에르키 스벤 튀르의 ‘십자가의 그림자’를 들려주는 것이 매우 인상깊고 이채로웠다.

에스토니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트린 루벨과 첼리스트 마르셀 요하네스 키츠가 선사하는 브람스 이중협주곡의 속삭임이 귀를 사로잡았다. 또한 '최고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연주였다'는 극찬을 받은 서울에서의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연주의 백미(白美)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었다. 필자가 참석한 경기아트센터에서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2번과 이어진 ‘슬픈 왈츠’ 앙코르곡들이 서울 연주곡들과 대조를 이뤘다.

재능과 열정으로 뭉친 전 세계 각국의 음악가들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모으는 것은 파보 예르비의 오랜 꿈이자 열망이었다고 한다. 파보 예르비의 음악적 구심점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공연. 이를 통해 마에스트로 파보 예르비의 음악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날 볼 수 있는 국내 관객들에게 훌륭한 발틱 클래식음악 연주체험의 기회가 됐다고 본다. 

에스토니아의 관현악적 정체성은 독립과 함께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이롭게 성장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파보 예르비 역시 라트비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못지않게 그동안 에스토니아 음악문화의 대사로서 힘을 보탰다. 아르보 패르트, 레포 수메라, 에두아르드 투빈, 에르키 스벤 튀르등의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유럽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청중들에게 소개해왔다. 또 하나의 발틱 음악의 전령사내지 전도사의 이미지를 부여할 만하다. 

 

음악칼럼니스트 여홍일

2012년부터 몇몇 매체에 본격 음악칼럼 리뷰를 게재했다. 현재는 한국소비자글로벌협의회에서 주한 대사 외교관들의 지방축제 탐방 팸투어 전문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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