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움이 산재하며, 혼란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사점 있어
장르의 결합으로 소통하는 예술을 보여준 ‘목멱산 59’

[문화뉴스 박준아 기자] 목멱산59는 남산의 옛이름인 목멱산과 남산에 위치한 국립극장 주소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59의 지번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2017년 이후 올해 5회를 맞는 본 공연은 사계절이란 틀 안에서 다른 주제로 클래식, 대중음악 그리고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공연예술을 만들어왔다. 크로스오버의 전통 무용공연 ‘목멱산 59’를 관람하고, 이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박준아 기자는 미술을 전공하였다. 미술 전공자의 시각으로 다른 분야 예술을 미술적으로 접근해 연결하는 기사를 주로 작성한다. 간단한 미술사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작품에 숨겨진 뒷이야기도 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편집자 주>

기자에게 가장 막연하고 어려운 예술 분야를 뽑으라면 무용공연을 뽑지 않을까? 거기다 주제까지 ‘백조의 호수’ 같은 잘 알려진 스토리가 아닌, 예를 들어 ‘경계선’, ‘계절’ 같은 개념어들이라면 현대미술 작품들만큼이나 골치 아프고 어렵기만 하다.

미술 작품들도 그렇지만 무용 작품에서도 느껴지는 막연한 어려움은 추상성에서 온다. 추상(抽象)이란 대상의 어떠한 특성이나 특징에서 모양을 뽑아냈다는데 어원을 갖는다.

목멱산59 공연 장면
목멱산59 공연 장면

 

 

 

 

 

 

 

 

 

이와 반대의 개념은 구상, 구체적인 모양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구상과 달리 추상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예술가가 제시하는 어느 한 주제, 대상에서 뽑아낸 형태와 움직임들을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추상예술은 정해진 법대로 도상을 읽고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고 무진하다. 정답없이 그저 보는 사람이 느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느끼면 되는 일 인 것이다.

무용은 사람의 몸의 움직임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추상 표현예술이다. 무용공연에서 몸의 움직임과 대형들로 한 표현은 관객들에게 제각기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비슷한 감정 혹은 생각을 만든다. 이러한 과정이 추상화를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용과 추상화의 유사점 때문인지 ‘목멱산59’를 보며, 20세기 이후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8(composition VIII)’이 연상됐다. 당시 미술의 동향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19세기 이전에 초상화는 인물 사진, 성화는 성경의 스냅사진과 같았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8(composition VIII)’ ,canvas on oil,140x2011923(사진=구겐하임뮤지엄 Guggenheim Museum)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8(composition VIII)’ ,canvas on oil,140x2011923(사진=구겐하임뮤지엄 Guggenheim Museum)

그러나 19세기 사진기의 발명은 대상의 재현을 더 이상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생각으론 어떤 재현도 사진보다 진짜 같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의 질서를 따르던 세상은 산업혁명 등 이성과 과학의 질서를 따르는 세상으로 점차 변해가 그림의 주제도 점차 신에서 사람으로 옮겨왔다. 

이후 미술은 다른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고전적인 미술 이후에 등장한 것이 우리도 잘 아는 인상주의, 반 고흐 등이다. 이런 경향은 여러 사조를 지나 진정한 의미로 재현, 구상을 탈피하며 완전한 추상에 이른다. 그 대표주자 중 하나가 바로 ‘칸딘스키’다.

목멱산 59의 경쾌함과 리듬감에 ‘칸딘스키’ 떠올라

어렵게 느끼던 추상화의 시조새 ‘칸딘스키’의 그림은 사실 단순하다.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인 점‧선‧면만을 이용해(둥근 모양과 직선적인 뾰족함 같은) 형태들의 대립과 구성, 색채를 통해 화면 안에 아름다움을 만들고, 더 나아가 운율과 음악성을 담고자 한 것이다. 

확실히 그림을 통해 밝은 색채와 도형들의 배치들 속에서 경쾌함과 리듬 그리고, 에너지가 전해지는 듯 하다. 이러한 다채로움이 산재하며, 혼란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점들이 ‘구성8’과 ‘목멱산 59’의 장현수 안무가의 작품에서도 느껴지는 유사함이랄까.

 

​목멱산59 공연 장면
​목멱산59 공연 장면

‘목멱산59’는 ‘사계’라는 큰 틀 속에서 각 막들의 주제에 충실하며, 각자 다른 구성을 하나로 묶어냈다. 작품에서 무용수들의 대형과 배치들은 칸딘스키의 ‘구성8’처럼 불규칙하게 흩어져 일관된 흐름과 동작의 통일성을 갖춘 채 산재하는 구성을 보여준다.

무용수들이 흩어지고, 뭉쳐져 어떤 불규칙한 흐름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나란히 정렬된 대형들은 공간상의 배열을 나타낸다. 그리고 음악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이고도 불규칙한 움직임의 시차도 작품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자른 퍼즐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짜 맞춰지기도 하며,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인상을 줘 공연 내내 즐거움을 선사했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공연의 흐름이 관객에게 즐거움 선사

특히, 1막의 서가는 올해 주제인 ‘농가월령가’에 맞춰, 자연의 순리와 그에 따르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빗대어 우주와 행성의 움직임으로 표현하였다. 행성의 자전, 공전의 원운동과 행성들이 나란히 정렬한 직선의 배열이 자연스럽게 칸딘스키의 조형 언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 3막의 여름 모내기와 5막 겨울의 동백꽃의 군무는 대조되는 계절만큼이나 대조되었다. 모내기의 동작들에서 착안한 무채색의 빠르고 역동적인 직선의 움직임과 동백꽃이 그대로 재연된 듯한 붉은색의 정적이었던 원형의 대형 속 가장 전통 무용다웠던 단아한 움직임들이 서로 대조를 이뤘다.

 

목멱산 59 공연 장면
목멱산 59 공연 장면

이 부분에서 공연 전체의 유기적임과 함께 칸딘스키가 말한 형태의 대립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운율과 다채로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연의 분위기와 내용에도 찰떡이었던 전통한복을 모티브로 한 변형된 한복의상도 ‘목멱산 59’의 묘미 중 하나다. 

길을 가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피하기 마련이고, 위해가 없다는 걸 알면 대게는 무관심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읽히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금세 따분함을 느끼고 때로는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물며 해야 하는 일도 아닌 예술작품이라면 당연히 더 피곤할 일이다.

그런데도, 무용이든 미술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이러한 추상성을 읽어내고, 공감하며 예술을 알아가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더 짜릿하고 다른 일로는 채워지지 않을 행복한 피곤함일지 모른다. 더 나아가 왠지 더 나은 인간이 된 듯 묘한 성취감이 중독성 있게 다가올지 모른다.

알수록 재미있고, 느껴지는 예술의 세계

예술은 알아갈수록 더 재밌고, 느낌이 와야 더 알고 싶어지는 딜레마를 겪으며, 앎(이성)과 느낌(직관)이 줄다리기한다. 그래서 예술은 더 재밌고 오묘한지도 모른다. 또 이런 줄다리기를 혼자 하는 거 같지만 예술가와(소통) 하는 것이기도 하고, 관객들끼리도 주고받기도(공감) 하는 밀당이란 점도 예술의 또다른 매력이다.

어렵다고 느껴질 전통 무용공연인 ‘목멱산 59’에서 보여주는 클래식이나 대중음악, 현대무용과의 접목은 관객들과 접점을 늘려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어쩌면 작품에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더한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단 이틀뿐이라 아쉬웠던 본 공연은 차후 온라인 언택트 공연으로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니, 직관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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