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DJ 래피 nikufesin@mhns.co.kr. 글 쓰는 DJ 래피입니다. 두보는 "남자는 자고로 태어나서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며 문사철을 넘어 예술, 건축, 자연과학 분야까지 포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읽고 쓰는 사람입니다.

[문화뉴스]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이라 부른다. 헤겔은 "인간의 자기의식은 현실 속에 살아 있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적 관계가 된다. 심할 경우 상호 간의 폭력까지 난무하게 되고 우리는 오직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비인정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야만의 상태에 빠지게 만들어버린다.

화(和)는 나와 상대방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즉 차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일상 속에서 '화'를 망각하고 사는지는 '다르다'와 '틀리다'의 빈번한 표현 실수에서 엿볼 수 있다. 방송에 입문했을 때 가장 많이 지적받는 것 중 하나도 바로 '다른 것(Different)' 과 '틀린 것(Wrong)'을 혼동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색깔이 틀리네"가 아니라 "색깔이 다르네"가 맞다. 방송에서 누군가 "색깔이 틀린데?"라고 잘못 말하면 자막에서는 '다르다'로 표현되어 나온다. ('틀리다'는 건 문제 따위를 '틀렸'을 때나 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다름'과 '틀림'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는 '나와 같은 의견이 아니라면 저 사람은 틀려먹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뿌리 깊은 생각이 원인일 수 있다.

우리들이 원하는 세계는 '조화의 세계'다. 서로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생각도 각자 '다를' 뿐,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Good 과 Evil>, 즉 선과 악은 사회 구성원의 안녕을 위해 인위적으로 존재하므로 맞고 틀림의 기준이 있지만, <good 과 bad>, 즉 좋음과 나쁨은 그것이 사회 공동체의 유지에 관련된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예컨대 나는 실제로 술을 맥주만 마시는데, 나는 그게 좋은데 자꾸 양주를 마시라고 강요하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것은 남녀 간 연애에도 당연히 적용되는데, 상대방을 고치거나 바꾸려 하는 사람과는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인간은 생긴 대로 사는 동물일 뿐, 사랑의 힘으로 쉽사리 고쳐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개성시대에 성격 궁합은 더욱 중요하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헤어지는 커플들이 생겨난다. 왜 그들은 결별해야만 했으며, 왜 헤어짐을 고려 중인 걸까. 사실 이것은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전반을 관통하는 이슈다. 바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다.

 

   
 

뇌 과학자들은 사랑도 화학 작용의 하나라고 말한다.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기관은 뇌의 변연계인데, 여기서는 사랑의 각 단계마다 신경 전달 물질이 분비된다. 그런데 사귄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항체가 생겨 사랑과 관련된 화학 물질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시들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쳐다만 봐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연애 초반의 설렘이 평생을 갈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설렘에 우선 가치를 둔 사랑은 얼마 못 가 또 다른 사랑을 만나야만 다시 설렐 수 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을 찾고 또 다른 사람을 찾고, 무한 반복이 될 것이다. 사랑의 최고 가치는 떨림과 설렘보다는 서로의 존재 자체에서 찾아야만 한다. 설렘이 없어졌다고, 열정이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럴 때 '넌 변했어'라고 규정짓거나 다른 사람을 찾으려 할 게 아니라 서로 노력해 나가야 한다. 사랑도 의리다.

사랑에 빠지기는 쉬워도 사랑에 머무르기는 쉽지 않다. '사랑에 머무는 단계'는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누며 행복하고 편안한 가운데 서로의 존재를 감사하게 생각해야만 지속된다. 사랑에 머물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이다. 헤어지는 연인이나 부부의 가장 대표적 클리셰인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졌어요'가 바로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 (둘 중 어느 한 구성원의 '치명적인 잘못'으로 인한 결별은 여기서 논외로 하자.)

성격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툭하면 성격차로 헤어졌다고 둘러대는가? 성격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나 품성'을 뜻한다. 분명히 '고유의' 성질이라고 되어있지 않나.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의' 성질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최초의 명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목소리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모든 고려 대상이 다 다른 거, 그게 정상이다.

나는 회를 좋아하고 그녀는 삼겹살을 좋아한다고 치자. 어떻게 그를, 또는 그녀를 내 취향으로 바꿀 것인가를 궁리하다가는 어김없이 싸우게 된다. 그걸 좋아하도록 그대로 두던지, 내가 취향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싸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서로의 양보를 유도해 접점을 찾는 선에서 마무리를 해야 '성격차'로 인한 헤어짐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격차로 헤어졌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그 사랑을 서로가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허울좋은 핑곗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 송대의 문인 소동파의 시 중에 제서림벽(題西林壁)은 그가 여산(廬山)을 보고나서 읊은 시다.

"가로로 보면 고개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 멀리서 가까이에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각기 다르구나. 여산(廬山)의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리라."

산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역설적인 내용이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 멀리서 보아야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쉽게 빠져든다. 아무래도 인간이다 보니 자신의 관심사만 눈에 보이게 마련이고, 무엇이든 자기에게 맞게끔 교묘하게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니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며 냉정히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과연 상대를 오롯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나는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보고,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며 경계해야 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최고의 고수는 다름 아닌 구경꾼들이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구경꾼이 되자.

 

※ 본 칼럼은 아띠에터의 기고로 이뤄져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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