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적 특징과 이 시대의 3대 거장들.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아띠에터) 김수영 panictoy27@mhns.co.kr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일까, 실용음악과 건반을 가르치면서 음악방송 '음악잡수다' DJ를 맡고 있다

[문화뉴스] '바로크 시대는 바흐의 탄생부터 시작되어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흐라는 음악가가 지배적이었던 바로크 시대가 끝나고 도래한 시기의 음악, 즉,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기의 음악을 고전주의 음악이라고 이야기한다.

'바흐의 죽음 이후에 새로운 음악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라고 보는 견해와, '바흐의 죽음 이후부터 낭만파 음악가들인 쇼팽과 슈만 등의 음악가들이 출현하기 이전의 음악을 이름 지은 것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전자의 견해가 조금 더 우세하다고 볼 수 있겠다.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대중적이면서도 간결한 음악의 유행', '소나타 형식의 기악 연주 발전', '귀족들이나 신을 위한, 소수의 만족을 위한 음악이 아닌 대중을 위한 음악의 발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대위법 같은 작곡기법들이 대중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만 들렸기에,
조금씩 더 대중적이면서 간결해진, 쉽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선율 위주의 음악들이 발전하면서 또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시기다.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고전주의 음악이 발달했으며, 대중들이 스스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또 대중들을 위한 콘서트가 흔하게 열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바흐와 헨델이었다면,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3대 거장으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세 사람 모두 오스트리아의 빈이라는 도시를 주 활동무대로 삼았던 사람들인 만큼,
이 세 음악가를 통틀어 '빈 고전파'라고도 이야기한다.

   
▲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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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의 존경을 받았던, 현재 독일의 국가를 만든 위대한 작곡가, 하이든.

1732년에 오스트리아의 로라우 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하이든은 훌륭한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자,
또 성악가이자, 현악기 연주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음악의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풀네임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어릴 때부터 민요에 관심이 많아 많은 지역의 민요들을 자신의 작품에 활용을 많이 했다.

8세 때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면서 그곳에서 성악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 하이든이 받게 된 생애 첫 번째 음악교육이었다. 대위법 같은 다양한 음악 이론들은 책을 보며 독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이든이 젊은 시절까지만 해도 바로크 시대처럼 왕족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서 음악을 만드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만 음악가들이 살아갈 수 있던 때여서, 하이든 역시 여기저기에서 일하던 중 당대에 유명했던 한 성악가의 반주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 성악가로 인해 귀족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을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음악 선생님 역할을 하면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1761년에 에스테르하지 라는 가문에서 운영하는 악단의 부악장으로 고용이 되면서 약 30년 동안 이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음악 활동을 하게 된다. 주로 귀족들의 파티와 식사시간에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했어야 했기에 하이든 역시 바흐와 비슷하게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약 100여 개의 교향곡과 수십 개의 피아노 소나타, 오페라, 협주곡, 칸타타를 남기게 된다.

하이든이 남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면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재 불리고 있는 독일의 국가를 만든 일이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하이든이 원래는 영국 국가에서 영감을 얻어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라는, 프란츠 황제에게 헌정하는 곡을 남기게 되는데, 이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지금과 다르게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였고, 이때 잠시 이 곡을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점점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약해지고 황제가 바뀌게 되면서 국가도 바뀌게 되는데,  결국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으로 오스트리아의 국가가 바뀌게 되면서 원래의 오스트리아의 국가였던 프란츠 황제의 헌정 곡은 나치 시대에 이르러 독일에서 쓰이게 되고, 나치 시대 이후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가사만 바꿔서 오늘날까지 독일의 국가로 사용돼 오고 있다.

결국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가는 모차르트의 곡으로, 독일의 국가는 오스트리아인인 하이든의 곡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 외에 하이든의 대표 작품으로는 '놀람 교향곡, '종달새', 그리고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의 테마가 후에 '황제'라는 작품에 다시 한 번 차용돼서 이 역시도 하이든의 대표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 하이든의 '종달새' 1악장 현악 4중주.

▲ 하이든이 작곡한 독일 국가. (현재 찬송가로 불리고 있기도 한 곡이다)

▶ 이런 사람을 '천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 - 모차르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

이 이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실제 풀네임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아마데우스'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데에는 바로 이 풀네임에 숨겨져 있는데, '테오필루스'라는 이름이 그리스어이고 이 단어를 프랑스식으로 표기하면 'amade'라는 단어가 되는데, 이 'amade'라는 이름을 모차르트가 서명할 때마다 사용하게 되면서 '신이 사랑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한 이 'amade'라는 표현을 라틴어로 바꾸어서 '아마데우스'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명칭은 '신이 사랑한 모차르트'라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6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7세 때에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10대 초반에는 심지어 한 악단의 악장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워낙 어릴 때부터 '천재음악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으며 유년시절부터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천재라는 수식어에 버금가는 활동을 펼치게 해주겠다는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모차르트와 그의 누나를 데리고 연주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모차르트가 어릴 때부터 건강이 사실은 아주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워낙 명성이 높고 천재로 유명했던 모차르트였기에, 그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고용주로부터 시키는 대로
음악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려 했던 성격이었기에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능력에 비해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모차르트의 삶과 죽음에는 여러 가지 루머들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일화는 바로 '레퀴엠'이라는 작품에 관련된 일화인데, 모차르트가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가고 있을 무렵에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죽은 사람을 위한 곡'을 써달라고 모차르트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의뢰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곡을 쓰기 시작한 모차르트는 결국 이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 레퀴엠을 의뢰했던 인물을 '정체불명의 사자였다', '모차르트의 죽음을 예견하고 찾아온 죽음의 사자였다'라는 소문이 난무하기도 했다. 후에 이 곡을 의뢰한 사람은 폰 발제그 스투바흐 라는 한 백작이 자신의 죽은 아내를 위로하고자 자신의 하인을 통해서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것이라고 뒤늦게 밝혀졌다.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 라는 작곡가가 완성을 시키게 된다.

모차르트의 대표작으로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인 '반짝반짝 작은 별'의 선율도 바로 모차르트가 남긴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 모차르트의 '작은 별 주제에 의한 변주곡'. 정명훈의 연주.

▶ '악성'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베토벤.

베토벤의 인생은 후대 사람들이 제1기 부터 제3기까지 나누어 평가하기도 한다.

제1기는 1783년부터 1803년까지의 베토벤의 인생. 바흐의 평균율을 거의 외우다시피 연습하고 교육받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 시기이며, 1804년부터 1815년까지를 제2기로 보는데 이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걸작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운명교향곡, 전원교향곡, 열정 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 등). 그리고 제3기는 1815년부터 그가 인생을 마감한 해인 1827년까지인데, 약 1800년대 초반 즈음부터 귀가 조금씩 멀기 시작한 그가 자신의 장애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을 철저히 받아들인 상태로 음악 활동을 하게 된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음악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악가이면서 동시에 동네의 유명한 주정꾼이기도 했다.

이 베토벤의 아버지가 어느 날 모차르트라는 대단한 음악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이용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베토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를 알고 있었던 베토벤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특별히 할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 많이 슬퍼했다고도 전해진다.

베토벤은 11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되는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였지만,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소개로 네페 라는 그 당시의 궁정 음악가에게 교육을 받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혹독하게, 또 한편으로는 베토벤의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하여 당시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출판되는 한 음악 잡지에 베토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글을 기고해 베토벤이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또한, 실제로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만나게 해준 사람 역시 바로 이 네페 라는 스승이었다.

1792년에는 하이든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존경해주는 관계였던 반면, 베토벤의 스승으로서의 하이든은 그렇게 좋은 스승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업을 해주고 과제를 내주고 또 그 과제 내용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는 과정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이 자신을 소홀히 가르친다고 생각했기에 하이든을 좋은 스승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유명한 살리에리에게 성악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한 체질이었던 베토벤은 결국 여러 가지 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음악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청각 장애는 베토벤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장애가 아닌,
그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질병과 장애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그런 것에 굴하지 않고 항상 열정적인 자세로 음악을 만들었던 음악의 성인, '악성'베토벤이었다.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3악장. 

다음으로 이어지게 될 '얕게 파보는 서양 음악사 4편'에서는 낭만주의(낭만파) 시대의 음악적 특징과 음악가들에 대해 얕게 파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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