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과 '서울역', 더 강렬한 현실의 소환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오르되브르는 정식 식사에 앞서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입니다. '영읽남의 오르되브르'는 관람 전, 미리 영화에 대해 읽어보는 코너입니다.
 
집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 서울역. 기웅(이준)과 혜선(심은경)은 여인숙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기웅은 인터넷 만남 주선 사이트에 혜선의 사진을 올려 돈을 벌려 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혜선은 집을 나간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자신의 딸(혜선)을 보게 된 석규(류승룡)가 그녀를 찾기 위해 기웅에게 연락을 한다. 두 사람은 여인숙에서 혜선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서울역을 헤매다 괴물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쫓긴다. 그리고 기웅과 석규도 비슷한 사람들에게 습격을 받는다. 도심의 한복판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석규와 기웅은 혜선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미쓰리의 솔직한 리뷰] '부산행' 천만…3가지 포인트로 본 천만의 이유 ⓒ 시네마피아
 
'부산행'과 '서울역'의 연결고리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덕분에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에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언론에는 '부산행'의 하루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프리퀄로 알려져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유명세를 얻었다. 한 인터뷰에서 연상호 감독은 두 개의 좀비물을 하나의 패키지로 만든 이유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산행'이라는 실사영화의 성공이 '서울역'이라는 애니메이션의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열악한 애니메이션 상영 시스템에서 '서울역'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천만 영화 '부산행'의 탄생이었다는 것은 놀랍고도 씁쓸한 이야기다. 동시에 연상호라는 인물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변화를 위해 애쓰는 제작자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감독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인물임을 알게 한다.
 
'부산행'의 프리퀄이란 소문과 달리, '서울역'의 관람 후엔 '한국에 좀비가 나타났다.' 외엔 두 영화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부산행'의 첫 감염자로, 동시에 '서울역'의 혜선 역의 더빙을 맡은 심은경은 두 영화에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 별개의 인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 심은경이 '서울역'의 더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좀비의 성격도 다르다. 기본적인 좀비의 특성에 빠르고 민첩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두 영화 모두 같다. 하지만 시각이 약점이던 '부산행'의 좀비와 달리, '서울역'의 좀비는 보이지 않아도 인물들을 위협한다. 두 영화의 관계는 점점 헐거워진다. 결국, '서울역'은 연상호의 세계를 온전히 담은 작품이고, '부산행'은 연상호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의 세계를 재해석했다는 느낌을 준다. 앞서 말한 영화 제작의 목적이 이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두 영화의 연결고리가 '서울역'의 작품성엔 전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부산행'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좀비의 시발점이 궁금했을 관객은 이 영화에 실망할 수 있다. '서울역' 역시 좀비가 나타난 원인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과 그 작화를 접할 기회가 없던 관객에게 이 영화는 분명 낯선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이런 관람 요소에 관객이 어떻게 적응하고, 몰입하는가는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줄 것이다.
 
   
 
 
더 강렬한 현실의 소환
'서울역'은 '부산행'보다 더 잔혹한 현실을 불러오고, 이는 우리 사회를 더 날카롭게 겨누고 있다. '부산행'이 '기득권'이라는 대상을 일반·추상화시켜 용석(김의성)으로 표현했다면, '서울역'은 대한민국의 실제 공권력을 직설적으로 소환해 우리의 진짜 사회를 마주하게 한다. '부산행'에도 군인이 등장하지만, 대규모 감염자로서 현실성을 잃은 뒤였다. 하지만 '서울역'엔 도망치는 시민을 폭도로 규정짓고, 칼을 겨누는 공권력으로서 경찰과 군인이 있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적'을 규정하기 바쁜 공권력. 이 역시 현실을 오버랩하고, 자연스레 역사적 사건 및 우리의 오늘을 소환하게 한다. 관람하기에 불편하고 힘든 장면들이 많다. 그게 연상호가 보고 겪었던, 그리고 직접 보라고 하는 대한민국이며, 그 심장 서울이다.
 
   
 
 
인간의 맨얼굴에 관한 이야기
'서울역'엔 '부산행'에서 볼 수 있던 '신파적' 요소가 없다. (이 신파는 감독이 '부산행'을 만들 때, 양보한 요소일 것이다.) '부산행'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던 자리에 '서울역'은 아버지의 사랑 같아 보이는 것을 배치했고, 이는 결말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관객을 기다린다. 그리고 '서울역'엔 일반적 의미의 영웅은 없다. 도식화된 착한 인물도 없다. 어딘가 타락했거나, 세상의 추악한 걸 목격했거나, 이미 삶이 망가진 자들이 서울역을 배회하는 이야기다.
 
연상호는 시궁창 같은 서울역의 그늘, 그 공간에 물든 인간의 삶을 비춘다. 그리고 이들은 좀비로 극대화된 공포 앞에서 생존을 위해 다양한 얼굴을 내민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가치가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 인간이 취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유쾌하지는 않지만, 바라볼 가치가 있는 그 얼굴을 응시해보길.
 
결국, 하나의 익숙한 질문만 남는다. '서울역'은 연상호가 삐딱하게 바라본 대한민국의 지옥도일까. 혹은 지옥도를 창조한 대한민국 맨얼굴의 복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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