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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문화공감] 조선이 국권을 침탈당했던 사건들역사 속 우리나라의 국권피탈 과정들
  • 차주화 기자
  • 승인 2018.07.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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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문화공감] 새로 시작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초반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태양의 후예>등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스타 작가가 된 ‘믿고 보는’ 김은숙의 극본. 그리고 이병헌과 김태리 등 연기력과 인기, 인지도를 모두 갖춘 배우들의 조합. 게다가 극의 배경 역시 흥미롭다. 첫 화에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운요호’. 아마 운요호를 오랜만에 들어보시리라 생각된다.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는 그 시작에, 운요호와 강화도 조약이 있었다.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중에서

그러나 당시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아무래도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아야 하는 '드라마'인지라, 역사적인 배경과 더불어 극적인 흥미 요소를 위해 가상의 인물과 허구를 더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더 흥미롭게 보기 위해서라도, 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역사적 배경이기에 다시 한 번 조선의 국권피탈 과정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

조선은 물론이요, 전 세계가 격동의 시기였던 그 때 조선 내/외의 상황이 어떠했으며, 우린 어떤 결정을 내리고 또 강요당해야 했는가.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간 실수들은 또 무엇이었기에 그들의 ‘수’에 당했던 건지 말이다. 가슴 아프지만 되돌아보아야 한다. 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함께 살펴본다면, 좋은 역사 공부가 될 것이다.


■ 폭풍을 기대치 못했던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어느 날 조선 강화도 근처에 낯선 배 한 척이 들어선다. 일본인들이, 영국에서 수입한 신식 군함인 운요호에 타고 있었다. 닻을 내린 그들은 바다의 깊이를 재어보겠다는 구실로 접근했다.

그러나 속셈은 다른 데에 있었다. 낯선 모습의 신식 군함에 탄 일본인들. 주민들과 조선군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경포하며 대포를 쏘았고, 이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다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는 처음부터 한마디로, ‘게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조일수호조규를 묘사한 그림

여기에 가만있을 일본이 아니다. 그들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피해를 입은 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해온 것이다. 조선은 당시 흥선대원군에 의해 쇄국정책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내부에서도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오히려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금관조복을 입은 흥선대원군의 초상

결국 1876년 두 나라는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기억해야할 것은 단 하나다. 바로 ‘불평등 조약’이었다는 것. 처음부터 일본이 피해를 주장하며 요구했던 조약이기에, 일본에 유리하고 우리로선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었다. 이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은 조선 내부에 침투하기 시작하며 양국의 잊지 못 할 역사가 시작된다.


■ 조선 내부의 혼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 시기는 조선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조선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중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조선의 정부는 우리도 새로운 신식 군대를 꾸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창설된 것이 바로 ‘별기군’이다. 여기서 찬밥 신세가 된 것은 바로 구식 군인들이다. 그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견뎌야했다. ‘공무원’인데 13개월 치의 봉급을 받지 못했으니, 요즘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이들이 봉급으로 받은 쌀에는 모래와 쌀겨가 섞여있었고 물에 젖어 썩은 것도 있었다. 당연히 격분할만한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이 군란을 제압하기 위해 청을 개입시킨다. 이에 반발한 개화세력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개화하자며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조선의 별기군

그 당시를 살지 않았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쉬운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 군을 제압하지 못하여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다니 상당한 아이러니라 여겨진다. 봉급을 주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무게를 속이려고 모래를 넣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의 군’ 아닌가.

갑신정변의 주요인물들


■ 명성황후의 죽음- 을미사변과 을미의병

오래전 드라마 <명성황후>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명대사를 남겼었다. 일본인들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조선 황후의 마지막 말...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보다 현실은 더욱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차마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1904년 발간된 프랑스 잡지 ‘르 투르 뒤 몽드’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

당시 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작전의 이름은 ‘여우사냥’. 한 나라의 국모를 그렇게 칭한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알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과 세자를 무릎 꿇게 만들고 황후를 능욕했다. 그녀의 시신에도 차마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악무도한 짓을, 그것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저질렀으며 시신에 기름을 부어 활활 태웠다. 당시, ‘우리의 국모’가 저런 처참함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을미의병

이에 격분한 유생들은 일제히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에 반발하는 민중의 호응까지 얻게 되어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단발령을 주도한 관리들을 처형하는 등 친일세력에 대한 응징을 벌였다.


■ 본격적인 움직임, 을사조약

을사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던 조약이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상태였다. 외교권 박탈은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전에 임오군란 때 우리가 청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으며, ‘아관파천’과 같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러시아 등 여러 나라와 교류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이러한 우리의 국제 교류 관계에 개입하려 한 것이다. 외교권 상실이란 어떤 의미인가. 다른 나라에는 대한제국이 '주권이 없는 나라'라고 비칠 수 있는 일이었다.

을사조약 문서

을사조약의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을사늑약’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이 조약 자체가 강제로 체결된 것이기에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의 ‘늑약’으로 불리는 게 맞다는 것이다.

당시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데에 있어 ‘을사오적’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대표적인 친일파로 불리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 다섯을 ‘을사오적’이라 칭한다. 소설가 이해조는 책에서 ‘을사년스럽다’라는 것이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을사년’이 한스럽고 비참했었다는 것이다.


■ 고종황제 강제 퇴위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었다. 네덜란드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조약임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사들은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황제

고종의 이런 행동을 일제가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 결국 그들은 고종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디에도 고종을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친일 세력이었던 이완용은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은 전하께서 지셔야한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는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께 사죄하시던지, 대한문 앞에서 국민들에게 면박을 당하지 않으면 일본에 선전포고를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고종은 일본에 무릎 꿇지 않고 그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44년 조선을 다스리던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그는 그렇게 자리에서 내려왔다.


■ 조선, 국권침탈을 당하다

결국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다. 이완용과 3대 한국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다. 8월 29일에 공포된 이 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은 완전히 피탈 당하게 된다. 이로서 우리의 뼈아픈 역사인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조약 문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강점기 당시의 일제의 성격과 매우 다르다.

한일병합조약 문서

(서문)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치 굉장한 친했던 두 나라가 서로의 행복과 주변국과의 평화를 위하여 병합을 결정한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조약 내용은 불평등 그 자체.

1907년에 파견되었던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때에 우리의 억울함을 주장하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이후에도 독립 열사들은 해외에 우리가 강제로 주권을 빼앗겼음을 알리기 위해 불철주야 목숨을 걸었었다. 일제 역시, 우리가 세계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조선총독부 건물. [우리역사넷]

나이가 아주 많으신 노인들 중에 일제강점기를 겪은 분들이 아직도 계신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도 일본은 아직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일본과 우리는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우며, 문화교류가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이전에 우리는 일본의 음악과 애니메이션, 문학, 영화에 큰 영향을 받았었고, 이후 한류 열풍으로 우리의 드라마와 음악, 패션 등이 일본으로 번져나갔다. 교류한 역사가 길었던 만큼 서로 비슷하게 공유할 수 있는 취향이 많은 것도 사실.

두 나라가 더욱 활발하고 친하게 교류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에 대한 확실한 사과와 정리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아마 드라마<미스터 션샤인>도 여느 한류 드라마들처럼 해외로 팔려 인기를 누릴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현재를 사는 세계의 모든 이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늘 깨어 있어야할 것이다.

 
    차주화 기자 | cjh@gomh.kr

    공감할 수 있는 문화계 소식을 쉽고 재밌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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