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회화에 현대미술을 입히다, 한국 현대 미술 거장 고암 이응노

ⓒ '이응노의 집' 홈페이지

[문화뉴스 MHN 주재현 기자] 일반적으로 ‘동양 회화’는 ‘전통 회화’의 틀에서 이해된다. 수묵화든 서화든 ‘전통 회화’를 재생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용 측면에서 전통을 벗어나더라도 기법 측면에서 ‘정통’을 벗어나면 인정받기 어렵다. 동양 회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현대 미술’로 진화하지는 못한 것이다. 과거에 박제된 미술이다.

그러나 과거에 갇힌 동양 회화를 꺼내 현대 미술로 승화시킨 선구자가 있으니 바로 고암 이응노다. 이응노 화백은 파격적인 콜라주나 추상화를 그리는 등 50~80년대 현대 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콜라주 재료로 먹물 들인 한지를 활용하거나 추상화 소재로 한자를 추상하는 등 동양화의 기법과 소재를 사용했다.

실험적 장르 교차가 아니다. 이응노 화백은 원래 동양화가다. 서양 회화에 동양 회화 기법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동양 회화를 현대 미술로 바꾼 것이다. 이응노 화백 활동 당시 기준으로 현대 미술에 동양 회화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예였다.

ⓒ 이응노 미술관 홈페이지

   

유럽은 열광했다. 붓의 필치나 먹의 농담을 절묘하게 활용하는 수묵화나 한자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하는 서화에서 풍기는 동양적 매력만으로도 유럽을 홀리기에 충분한데 이를 현대 미술로 승화시켰으니 홀리지 않고 베길 수 없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나라에는 이응노 화백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같은 세대인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화백에 비하면 생소하다. 특히 김환기 화백과는 비슷한 시기 파리에서 활동했는데도 그렇다. 여기에는 냉전이 낳은 비극적 내막이 있다.

‘전통 회화의 계승자’에서 ‘냉전의 희생자’를 딛고 ‘현대 미술의 선구자’가 된 고암 이응노의 삶을 그의 작품과 함께 따라가보자.

 

  

■ 전통 회화의 계승자

ⓒ '이응노의 집' 홈페이지 / 이응노 미술관 홈페이지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 이응노는 어려서부터 문인화를 배웠다. 1922년에는 해강 김규진 문하에 입문했다. 해강 김규진은 창덕궁 희정당 벽화를 그린 화가다. 우리 전통 회화의 ‘정통’을 전수받은 것이다. 이 시기 고암 이응노가 남긴 수묵화와 서화는 조선 후기 화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미술전람회’등에 다수 입선하며 동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응노는 돌연 일본 유학을 선택한다. 가와바타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며 서양 회화 기법을 습득했다. 그러나 동양화를 버린 것은 아니다. 일본 유학 시기 이응노의 작품은 ‘사실주의적인 경향의 동양화’에 가깝다. 동양 회화를 버리고 서양 회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동양 회화의 한계를 넘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것이다.

 

  

■ 한국전쟁기

유학 후 이응노 화백은 예산 수덕사 인근 ‘수덕여관’을 인수해 운영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나간다. 본격적으로 동양화를 다양한 기법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하던 시기다. 한국 전쟁 중 아들이 납북되는 아픔을 겪지만 고암의 작품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1958년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고 파리로 건너간다.

 

  

■ 현대미술가로 인정받다

이응노 화백은 파리에서 거장들과 교류하며 작품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부인 박인경 화백과 함께 동양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유럽 미술계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당시 프랑스에서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하던 파케티 화랑과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가 하면 파리 시립 세르뉘쉬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수묵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상당히 실험적이고 다양하다. 한지에 먹물을 들여 콜라주한 ‘구성’시리즈가 바로 이 시기 작품이다. 이 시기를 지나며 이응노 화백은 ‘동양 회화’를 ‘현대 미술’로 재탄생 시킨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 동백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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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인생에 아주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으니 바로 ‘동백림 간첩조작 사건’이다.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알려진 ‘동백림 간첩조작사건’은 1967년 공안 당국이 유럽에서 활동 중이던 문화예술인을 대거 간첩으로 조작해 재판에 넘긴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 등 당시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문화예술인이 대거 포함돼 유럽에서도 이슈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예술인이나 유학생을 무단 납치하고 조사 과정에서 고문해 독일, 프랑스 등과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아들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북한 대사관을 출입한 이력이 있던 이응노 화백은 이 사건 주요 피의자로 지목됐다. 유죄 판결을 받은 고암 이응노는 약 2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응노 화백은 수감 생활 와중에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수 십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 남긴 수덕 산장의 ‘문자 추상 암각화’는 아직까지 수덕사의 명물로 남아있다.

2년 뒤 가석방된 이응노 화백은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정치적 낙인이 찍혀 국내에서는 작품 전시가 금지된다. 우리에게 비교적 고암 이응노가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다. 조국에서 외면 받은 그는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다.

 

 

■ 조국과 멀어질수록 작품은 빛을 발하다

ⓒ 이응노 미술관 홈페이지

동백림 사건 이후 그는 작품 활동의 저변을 더욱 넓혀갔다. 그의 대표작인 ‘군상’시리즈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군상’은 춤 추는 듯한 동작의 사람의 무리를 간결한 붓질로 그린 그림이다. 동세가 독특해 마치 원시 제의를 보는 것 같다. ‘동적이다’는 표현은 부족하고 ‘신명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군상’시리즈는 현대 미술가로서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줬다.

비록 국내에서는 작품의 전시도 매매도 금지됐지만 프랑스에서의 활동은 활발했다. 다수의 전시회는 물론이고 수묵화 서적을 발간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이후에는 ‘프랑스인’으로서 북한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프랑스로 귀화했지만 조국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활동 중 ‘서울, 파리, 동경 : 그림과 민족에 대한 사색’을 발간하는 등 통일과 조국에 대한 염원을 끊임없이 표출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이응노 화백에 대한 금지가 해제된 것은 1987년 이후다. 금지령 해제 이후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의 개인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국내 개인전을 이응노 화백은 결국 보지 못했다. 개인전 개막 당일 이응노 화백이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저명한 문화예술인이 묻히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사후 프랑스에는 그를 기린 ‘고암서방’이 건립됐고, 2000년에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다. 이후 2005년 이응노미술관은 폐관됐고 소장품은 대전광역시가 인수해 대전에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해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의 생가가 있는 충청남도 홍성군에는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생겨 역시 그를 기리고 있다. 지난 2018년은 고암 이응노 도불(渡佛) 60주년 되는 해로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에서 관련 전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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