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종만이 말하는 마이즈너 테크닉과 헐리웃 진출기

   
 


[문화뉴스]
지난 달 19일부터 23일까지 대학로 세종 액터스 스튜디오에서는 특별한 강의가 열렸다.

'샌포드 마이즈너 테크닉'과 '헐리웃 비즈니스 오브 액팅'을 주제로 한 강연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강연의 강사는 현재 헐리웃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배우 김종만이었다. 마이즈너 연기론부터 배우 개인이 헐리웃에 진출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그야말로 이론부터 실제까지 연기의 핵심을 꿰뚫고 알려주는 강의였다.

배우 김종만은 뉴욕필름 아카데미(New York Film Academy)와 뉴욕의 3대 마이즈너 액팅클래스인 디 액팅 스튜디오(The Acting Studio)를 통해 현재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마이즈너 테크닉을 배웠다.

   
ⓒ http://www.jongmankim.com/

그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제자들이 모인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에서의 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룹 시어터는 리 스트라스버그, 샌포드 마이즈너 등 현재는 각 연기론의 한 축을 이룬 배우들이 속한 극단이다. 극단에 속한 배우들이 자신들의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설전이 이어지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마이즈너는 무대 중앙에 드러누워 "난 연극을 사랑해!"라고 외쳤다고 하는 이야기였다.

지난 달 25일 대학로에서 만난 배우 김종만 또한 마이즈너의 모습이 연상되는 배우였다. 연극을 꿈꾸고, 연기를 사랑하는 김 배우는 "연극을 사랑한다"고 외치며 이 모든 싸움을 하나의 본질로 감싸버리는 마이즈너의 모습이 드리워지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김 배우는 "연극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싸우는 것도 연극이다"라고 얘기한다. 그의 연극에는 예술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고, 그의 연기에는 그의 삶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김종만 배우의 연기 이야기,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자.
 

   
 

이번 강연에서 마이즈너의 연기론을 가르쳤다. 샌포드 마이즈너는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 이론 중 미국에서 가장 큰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방법론으로 알고 있다. 마이즈너 테크닉을 어떻게 접하게 됐나?
ㄴ SNS를 통해 홍보 했다. 나는 굉장히 많은 액팅 클래스를 들었다. 뉴욕필름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마이즈너 테크닉을 일 년간 접하게 되고, 뉴욕의 3대 마이즈너 액팅클래스인 디 액팅 스튜디오에 가서 본격적으로 배웠다. 거기서 제임스 프라이스라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은 뉴욕에서 처음으로 마이즈너 테크닉을 가르친 분이다. 그 기간 동안 배우기만 한 게 아니라, 여러 아르바이트도 했다. 나중에는 요가 프로그램의 강사도 맡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도 나는 항상 배우러 다녔다. 그리고 만나는 배우들마다 좋은 클래스 뭐가 있는지 물어본다. 안 들으면 뒤처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아시아인뿐 아니라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계속 배워야 한다. 클래스는 스킬은 물론이고 자신감을 더해준다.
 

   
 

미국으로 건너간 계기는?
ㄴ 미국으로 가기 전, 한국에서 많이 아팠다. 몸과 마음 모두가 말이다. 연기에 대해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선배들에게도 그것을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우연구소 'true'라는 집단을 만들어서 3년간 운영했다. 탁상공론의 끝을 보고 트레이닝을 시작한 것이다.

'being' 조선아 선생님 밑에 들어가 또 3년간 뮤지컬 보이스 트레이닝을 받았다. 배우고 가르치고를 반복했다. 당시 정말 바빴다. 글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논문도 썼다. 당시 쓴 논문이 성균관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이었는데, 제목은 「배우훈련에 있어서 '감각기억'의 활용 연구 : Lee Strasberg 메소드(Method)를 중심으로」다.

그 논문을 쓰다가 샌포드 마이즈너(Sanford Meisner)를 처음 접하게 됐다.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하고 대중적인 연기론의 창시자였다. 나도 곧 이 연기론에 빠지게 됐다. 왜냐하면 굉장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진실된 감정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배우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탈출시켜서 상대방에게 집중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싫은 것에 대해 'social mask(사회적 가면)'를 쓰고 있다. 그 훈련법대로 연기를 하면 가면을 벗게 한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한다고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진실한 순간과 순간이 서로 만나게끔 한다. 제임스 프라이스가 "Acting is real than reality"라고 했다. 실제보다 연기가 더 리얼하다고 말이다. 소셜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현실보다 소셜 마스크를 벗는 연기가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때 뒤통수를 맞았다. 당시 자연스럽고 진실된 연기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리얼리티를 흉내 내곤 했다. 당시는 한 길만 봤기 때문에 내 생각만이 맞다고 외치며 미쳐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프라이스의 말이 더 옳다고 깨달았으니,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셈이다.
 

   
김종만 배우 ⓒ http://www.jongmankim.com/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디가 아프셨나?
ㄴ 사실 5년 전에 몸이 많이 아팠다. 불치병이었다. 병명을 아예 몰랐다. 근육이 녹아내려서 오른손으로 젓가락질도 하지 못했다. 왼손으로 연습해서 밥을 먹었고, 아픈 와중에도 논문을 썼다. 당시 내가 맡은 역할이 불치병 환자이기도 했는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정말 힘들었다. 학교에서 강의도 시작한 무렵이었고, 영화 '우리형',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 출연 얘기도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약도 먹을 수 없던 상태였으니 말이다.

무작정 인도로 떠났다. 14일 동안의 여행이었고, 내 목적은 인도의 속살을 알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속살을 알고자 왔으면서 호텔에서 자고, 호텔뷔페의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찰 앞에서 진짜 인도 음식을 먹었다. 그때 먹은 난이랑 커리는 그 동안 먹었던 음식과 너무 달랐다. 속살을 알고 싶어서 왔다면서 호텔에 머물며 인도의 진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한국 밖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3년 정도 우리나라 밖에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고통의 시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보니까 자살까지 생각해봤었다. 그래서 또 무작정 뉴욕을 갔다. 뉴욕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연기를 그만두려고 갔었다. 너무 아프고 인생이 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일 살기 싫은 곳이 뉴욕이었기 때문에 뉴욕에 갔다.

나는 상업주의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다. 상업주의가 싫어서 그에 반발하는 집단도 만들었고 관련된 공연도 했을 정도다. '기성세대에 넘어가지 말자', '타협하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아파서 상처를 받다 보니, 살기 싫은 도시로 가게 됐다. 막연하게 연기를 영어로 배우면 잘 배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는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뉴욕이 됐다. 뉴욕은 상업주의라는 단어로만 설명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남들에게 들은 선입견에 대해 믿고 있었던 내가 바보구나 싶었다.

세종액터스 연기학원에서 강의를 열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ㄴ 세종액터스 연기학원 원춘규 원장님과 아는 사이다. 내가 국립극단에서 이윤택 선생님 밑에서 연기했을 때, 원춘규 원장님이 조연출이었다. 그러면서 친해지고 이후에도 원춘규 원장님이 공연할 때 곧잘 배우로 출연하곤 했다. 말하자면 연극 동지인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들르게 되면서 특강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좋은 내용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한테 홍보를 부탁했다. SNS에 내가 왜 이 특강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심을 담아 장문으로 썼다. 늙어 죽을 때까지 클래스를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글이었다. 그러다가 춘규 형과 연락이 돼서 이렇게 하게 됐다.

   
 

어떤 꿈을 가지고 있나?
ㄴ 헐리웃에서 배우를 하고 있다는 현재의 소식을 듣고는 다들 내가 영어를 다들 잘하는 줄 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보기에 나는 심한 사투리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매일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아시아인, 개중 코리안(Korean)이 헐리웃과 브로드웨이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책을 내고 싶다. 나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갔다. 계속 무언가를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목표를 너무 높게 세워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세워 그것을 쉽게 이루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얼마 전에는 헐리웃에서 대작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오디션을 봤다. 무엇이든 선천적 재능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꿈을 높게 가져야 한다.

강연을 통해 헐리웃과 한국을 비교하며 '헤드샷, 오디션, 에이전시, 광고촬영' 등에서의 각 차이점을 알려줬다. 문화뉴스 독자 분들께도 몇 가지 팁을 알려줄 수 있는가?
ㄴ 한국에서도 15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배우 활동을 해왔다. 영화산업에 대해 말해보자면, 한국에서는 매니지먼트를 통해 들어가지 않으면 기회를 얻기가 정말 어렵다. 물론 미국이 (기회가) 많다는 것은 아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프로필 사진(head shot), 이력서(resume) 작성 등에 대한 세세한 방법을 알려줬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는 큰 기획사 대표나 선배한테 한 번도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런 기초적인 것들부터 배우면서 많이 놀라웠다. 배우는 오디션 기회가 없으면 일이 없는 거다. 미국은 오디션의 문에 들어가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오디션 방법, 레쥬메 작성법, 헤드샷에 대한 노하우들이 생기는 것이다.

참고로, 오디션 사이트는 돈 많이 내고 가입을 해야 한다. www.jongmankim.com에 들어가면 나의 헤드샷, 이력서 등이 다 나와 있다. 배우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자신을 알리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미국은 아직 기회가 있다.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매니지먼트사를 굳이 끼지 않아도 배우들이 스스로 하며 그 길을 개척해나가기에, 한국에 비해 문이 열려있다고 하는 것이다. 완벽해진 상태에서 도전하면 안 된다. 내 마음과 의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웃음).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꾸준히 도전한다. 팁으로 말해드리자면, 광고 쪽이 기회가 엄청 많다. 혼자 하면서도 에이전시 없이 큰 광고를 맡는 친구들도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연기 쪽은 그런 케이스가 많지 않다.

   
 

정말 파이팅이 넘친다. 배우 김종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ㄴ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이끌고 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아인슈타인이 이미 말했던 것이다. 과학을 하고 싶으면 예술을 해야 하고, 예술가들도 과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같은 것인데 우리가 다 나눈 것은 아닐까 싶다.

덧붙여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유튜브로 보면서 많은 힘을 얻었다. 고통이 내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또한 나의 스승이었던 제임스 프라이스가 "연기 예술인으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진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교육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지내고 있다.

   
 

연기를 꿈꾸는 배우지망생들에게 한 마디 남긴다면?
ㄴ "나도 하잖니. 너도 해라, 그냥 해"라고 말하고 싶다. '트루' 멤버였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극단 백수광부의 이태형, 배우다방의 김봉조, 백수광부 출신 홍기용(현재는 나한테 영향 받아 미국 가서 영어 공부하고 있다), 연극 '라이어' 하고 있는 장지훈, 영화 '국제시장'에서 정주영 역할 맡았던 남진복, 연출가 차민엽, 이번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들어간 김혜영, 김상윤 등 우리 후배들도 현역에서 정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3년 동안 '트루'를 지나간 사람이 백 명이 넘는다. 나 같은 마음을 가진 후배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고 '트루'를 시작했던 거다. 이번 강연도 그런 마음에서 열었다. 개인적으로 'teaching'이라는 말 대신 'sharing'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가르친다는 마음이 아니라 나눈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나의 것들을 나눌 예정이다 (끝) 
 

 

 
(왼쪽부터) 김종만 배우와 강예나 배우

▶ 배테랑 배우들도…"지금껏 이런 식의 연기 교육은 없었다" 감탄

한편, 이번 강연에 참여했던 수강생 강예나 씨와도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가졌다. 강예나 씨는 유니버셜 발레단 최연소 수석무용수이자, 한국인 최초로 미국 American Ballet Theatre 단원이며, 현재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발레학부 강사를 맡고 있는 유명한 발레리나다. 현재 연극에 새롭게 도전하는 신인 배우이자, 뛰어난 무용수인 그녀가 바라본 이번 강연의 솔직한 후기를 들어보자.

이력이 화려하다. 뛰어난 발레리나가 '마이즈너 테크닉'이라는 연기론 강연을 듣게 된 계기는?
ㄴ 연기가 그 동안 내가 해온 것에 연장선이라 생각한다. 발레로서는 많은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래서 은퇴를 한 뒤에도 다들 내가 발레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항상 발레작품을 하면서도 테크닉을 완성도 있게 하는 것보다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것이 더 감동을 준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스토리텔링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발레리나였다. 발레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안무로 소통한다. 무대 인생이 28년이지만, 목소리까지도 연기의 폭 안에 담지는 못했다. 예술가로서 거기까지 가보고 싶었다.

마이즈너 테크닉을 듣게 된 것은, 한국에서 갓 미국으로 간 한 배우가 너무나 용감하게 헐리웃까지 진출하고 한국의 연기와 헐리웃의 테크닉의 차이를 얘기한다고 해서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이력서를 넣었을 때의 팁도 준다고 해서 더욱 흥미로웠다. 더구나 장기간도 아니고 5일 동안의 프로그램이라 선뜻 신청하게 됐다.
 

 

 
 

강연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나?
ㄴ 연기 수업을 정식으로 받은 것은 처음이다. 작년에 김수로프로젝트 10탄 '발레선수'라는 연극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발레와 연극을 접목시켜 무대에 섰던 것이었다. 당시 연출님과 연극을 했던 배테랑 배우들한테 연기를 배웠다.

이번 수업을 같이 들었던 배테랑 배우들이 '지금껏 이런 식의 연기 교육은 없었다'라고 하는 걸 들었다. '매너리즘에 쉽게 걸릴 것 같지 않다'라고도 말하더라. 있는 상태를 포용하는 테크닉인 것 같다. 짜인 컨셉에 우리를 맞추는 게 아니라, 어떤 대사가 있어도, 짜인 컨셉이 다르거나, 상대 배우가 실수했어도 그 실수까지 떠안고 무한대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테크닉이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마이즈너 연기강습이었다.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던 이유도 이번 강연이 내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사 있는 연기에서는 초짜이지만, 28년 동안 무대에 서왔기 때문에 예술 분야 자체에서의 초짜는 아니다. 처음에는 (이 강연에) 시니컬하게 들어왔던 배우들이 나중에는 말랑말랑해져서 눈빛이 다른 배우로 진화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ㄴ 선생님께서 마지막 수업에서 그림을 그려주셨다. 파도가 치는 가운데에서 서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파도'는 사람의 감정이고, '서핑보드 위에 있는 인간'은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서핑보드'는 보이스(목소리)였다. 이 보이스를 잘 사용해야 감정에 안 말리고, 배우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배우들이 보컬 트레이닝을 굉장히 많이 하는 거였다. 감정을 말로, 보컬 코드로, 성대로 나와야 느껴지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오열하는 장면에서 너무 오열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 마디라도 하는 게 더 크다는 거다. 내가 갈증을 느꼈던 게 그 부분이었다. 발레는 대사를 하면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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