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22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히말라야'의 기세가 무섭다. 15년의 마지막 달에 등반을 시작한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이라는 고지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이 영화의 가파른 등정은 뛰어난 연기, 흥행 코드의 영리한 활용, 실화의 감동 등 다양한 요인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이 직설적인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그런데 한 문장이 영화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산쟁이들은 정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글에 담기엔 부담스러운 영화

글로 다루기에 부담스러운 영화가 있다. '히말라야'는 그런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그 실화의 중심에 인간의 '죽음'이 있다는 것은 글쓰기를 민감한 작업으로 만든다. 그래도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미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엄홍길의 등정을 스크린에 소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방식으로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엄홍길이 끝내 이룰 수 없었던 박무택(정우)의 귀환과 그의 장례를 국민이 이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추운 땅에 묻혀있을지라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동료애와 무모하다 할지라도 감행한 엄홍길의 선택. 여기엔 합리적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 있다. '히말라야'는 엄홍길의 등반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뜨거운 마음을 느끼고, 함께 공명해 보라한다. 그리고 수백만의 국민이 거기에 응답했다. 수백만 국민의 호응. 이점도 이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조금 우회해 보려고 했다. 이번 글은 작년 가을에 개봉한 '에베레스트'라는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히말라야'를 더 명확히 바라보려 시도한 작업이 될 것이다.

   
 

두 산악 영화의 공통점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는 실화 바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리고 산에 미친 사람들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인물들 모두 '왜 산을 오르는가?'에 대한 질문에 모호한 답만 내놓는데, 그래서 관객이 그들의 목숨을 건 등정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조지 멜로리의 유명한 말, '산이 거기 있으므로'라는 답이 두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대사로 혹한의 등반을 설득하기엔 무리다. 더불어 두 영화 모두 이 등정에서 목숨을 잃는 인간을 담아냈고, 이 때문에 목숨보다 등정이 중요했느냐는 질문은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등산에 대한 동기, 산이라는 대자연의 벽, 그리고 산을 향한 애정이 만든 비극이 두 산악 영화엔 있었다.

온도의 차이, 카메라의 차이

'산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산에서 재난을 만나고, 안타깝게 죽었다.'라는 사실은 같지만 두 영화가 이를 조명하는 방법은 다르다. '에베레스트'는 상업 등반대를 보여주며, 인간의 비이성적인 선택, 욕망이 부른 참사라는 시선을 취한다. 영화는 등반대의 인물들과 거리를 두며 그들을 담았고, 인물에게 몰입하는 과정이 친절하지 않은, 건조한 영화였다. 이 건조함은 이 영화가 그 당시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하고 각 인물의 상황, 감정을 객관화시켜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에 비해 '히말라야'는 등반을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한다. 박무택의 죽음 이전, 영화의 전반부는은 엄홍길과 박무택의 감정이 쌓이는 과정을 등반으로 표현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쌓인 감정이 동력이 되어 비장한 선택을 하는 엄홍길, 그리고 그의 동료애가 등반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감정적 접근은 이 영화의 목적이 관객에게 숭고한 인간의 선택에서 오는 감동을 전하는 데 있음을 알게 한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과의 거리는 촬영에서도 드러난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없지만 '히말라야'에 있는 카메라 구도가 있다. 1인칭 시점으로 등반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것이다. 카메라의 시선과 인물의 시선과 겹쳐지는 이 장면에서 등산을 실감이 나게 간접 체험하는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이를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카메라는 엄홍길이라는 인물에게 바짝 붙어있고, 그의 위치에 서면서 관객의 위치까지를 지정해준다. 이러한 시점과 함께,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한 '히말라야'는 엄홍길의 위치에서 그의 고민과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수직적 이미지

'에베레스트'는 등반대원들이 크레바스('히말라야'와 '에베레스트'의 구도가 겹치는 부분이 크레바스, 빙산의 균열을 다룬 장면인데, 두 감독이 이 공간을 담는 방법이 유사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 공간이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는 느낌이랄까)를 건너는 장면 외에는 산의 높이를 과시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이 영화가 수평적이라고 했던(김소희의 영화비평) 것에 공감하고 있다. 이에 비해 '히말라야'는 산의 높이를 부각하는 장면이 많았고, 산을 수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수직적, 수평적인 이미지에 대한 언급은 결국 다시 영화의 시점, 관점으로 이어진다. '에베레스트'의 수평적인 이미지는 산을 자연 그 이상, 이하의 존재도 아닌 대상으로 보이게 한다. 산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며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등반대가 할 일은 시간에 주의하며 추위와 싸우는 것이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정상'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열망 때문에 이성은 길을 잃었다.

반대로 '히말라야'의 수직적 이미지는 산을 극복의 대상 혹은 장애물로 인식하게 한다. 이 관점에서 영화 속 산은 대결하고, 이겨 내야 할 적대자인데, 여기서 문제 하나가 생긴다. 이 수직적 이미지는 엄홍길의 대사 '산은 정복이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과 충돌한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히말라야'가 보여주는 산

왜 '히말라야'는 산을 대결의 대상, 장애물로 느끼게 했을까. 그러면서도 엄홍길의 그 대사는 왜 넣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산악인의 등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점에 다시 주목해 봐야 한다. '히말라야'는 정상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박무택 대원을 '산'으로부터 돌려받기 위한 엄홍길의 여정이다. 애초에 정상을 밟을 생각이 없던 독특한 등반, 동료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거는 등반. 이것이 '히말라야'가 다루고 있는 등정이다. 그래서 산은 적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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