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 날에' 중, 일정 스님의 대사

   
 


[문화뉴스]
지난 5월, 어김없이 남산에서는 송창식의 노래 '푸르른 날'이 울려 퍼졌다.

30여 년 전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5월의 광주를 소재로 한 연극 '푸르른 날에'는 2011년 초연 당시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그해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 연출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에 선정됐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재공연해오면서 남산예술센터의 5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눈이 부신 5월의 '푸르른 날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외침과 노래는 더욱이 흥겹고도 구슬프게 들려왔다.

주인공 오민호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을 죽이고 있는 군인들에게 목숨을 구차하게 빌어야 했고, 잔인한 고문도 견뎌야만 했다. 평범한 한 젊은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며 그는 스스로에게 '칼'을 품게 된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마저 절망 속에 빠뜨리는 '칼'을 말이다. 일정 스님은 그런 민호에게 "칼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후 속세의 연을 끊고 절에 들어간 민호는 30여 년이 흐르고 자신 앞에 마주한 친딸의 결혼식을 외면해버린다. 이때, 이미 돌아가신 일정 스님이 무대 뒤편으로 등장해 외친다. "칼을 버리라고 했더니, 꿈마저 버렸느냐"고 말이다.

 

   
 

스스로에게 겨눴던 저주의 칼날을 버린 민호는 꿈마저 버리며 무기력한 세월을 보냈던 것일까. 절망에 빠져 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법, 그것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고통스러운 절망에 빠졌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절망의 근원을 포기하는 데에만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희망의 여지까지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져버리는 데에 익숙하다. 일정스님은 "보고 싶으면 봐야지.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빠져 자야지"라는 대사를 덧붙인다. 고통의 근원을 버려야 하지만, 삶 전체까지 내다버리고 마는 민호, 그리고 관객에게 일정스님은 절망을 잘 딛고 일어서야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렇게 5년간 우리의 5월을 푸르게 적셔주던 연극은 끝이 났다. 이제는 일정스님의 호된 꾸짖음도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연극은 거대한 역사 속에 묻혀있던 보잘 것 없는 낱낱의 개인을 자세히 들여다봐주었다. 그리고 개인의 아픔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보여줬다. 올해 수많은 대사들 중에 일정스님의 외침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다 컸다고, 세상을 알 만큼은 아노라고 자부하고 있는 미숙한 어른인 민호와 관객에게 호된 꾸짖음으로 참된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이다.

  * 연극 정보
   - 연극제목 : 푸르른 날에
   - 공연날짜 : 2015. 4. 29 ~ 5. 31.
   - 공연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 원작, 연출 : 정경진, 고선웅
   - 출연배우 :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이영석, 호산, 이명행, 조영규, 조윤미, 채윤서, 이정훈, 김명기, 손고명, 유병훈, 김성현, 견민성, 강대진, 김영노, 홍의준, 남슬기, 김민서 등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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