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1년생 대회 첫 홈런 기록, 3학년 주장 때에는 타격 4관왕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고교야구 역사상 최초로 70번째 대회를 맞이한 청룡기 야구대회는 많은 이가 ‘청룡 여의주’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고, 그 안에서 좋은 결과를 낸 선수들은 대부분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선수로 성장했다. 그리고 여기, ‘청룡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스타가 있다. 바로 프로야구 통산 1호 타점, 홈런의 주인공, 이만수 前 SK 와이번스 감독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통하는 사나이답게, 이 감독은 여러 분야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타격 트리플 크라운(타율, 타점, 홈런 1위)을 작성한 이도,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불펜 코치가 된 이도 이만수 감독이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동남아 국가인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재능 기부의 형태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만수 감독에게 청룡기의 추억을 직접 들어본다(편집자 주).
 
안녕하십니까? 야구인 이만수입니다. 먼저, 청룡기 70번째 대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도 모교인 대구상고를 다닐 때 유달리 청룡기에 대한 추억이 많아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아무쪼록 후배 선수들 모두 부상 없이,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고교 1년생 대회 첫 홈런’의 주인공
 
사실 제가 모교 3학년이었던 1977년 32회 대회에서 우승을 했었고, 또 4관왕에도 오르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더 기억에 남는 것은 1학년 때 참가했던 30회 대회였습니다. 1회전에 만났던 상대가 대전고였는데, 당시 야간 경기로 치러졌습니다. 저 자신도 야간 경기는 처음이었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당시 청룡기 30년 역사상 고교 1학년생이 대회 1호 홈런을 친 것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참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정말로 달덩이만큼 크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투수 공이 크게 보였던 것은 제 야구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주 : 당시 대구상고는 대전고에 7-2로 완패하며 2회전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1학년이었던 이만수는 선발로 출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4회에 포수로 교체 출전하여 5회 말 추격을 알리는 투런 홈런을 기록했다.)
 
이렇게 1회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경기 전날, 동대문 야구장을 먼저 답사했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야구장 옆 동대문 주경기장도 있었는데, 밤에 조명탑이 켜져 있어 ‘왜 이렇게 밝게 불이 켜져 있지? 무인 일인가?’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경기장에서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표팀 선수로 뛰었던 이가 바로 차범근 선수였습니다.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아, 차범근 선수가 저런 사람이었구나!’라고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경기장 답사도 하고, 차범근이라는 선수도 알게 되어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것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대문 운동장과 청룡기 선수권대회가 제 머릿속에 기억이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패자 부활전이 만든 모교 대구상고의 우승
 
그렇게 1학년 때의 추억을 뒤로 하고 2년 후인 1977년에는 제가 주장으로 청룡기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청룡기에 ‘패자 부활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저희들이 패하면서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가 싶었지만, 패자 부활전이 모교의 우승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시 결승에 미리 올라와 있던 동산고와 두 번을 싸워 모두 이겨야 우리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두 번을 다 이겨서 우승기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패자부활전으로 인해서 저희의 우승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활약으로 저는 타격 4관왕(우수선수상, 타격상, 최다안타상, 최다타점상)을 차지할 수 있었고, 혼자 마운드를 이끌었던 친구 박영진(현 대구상원고 감독)은 우수 투수상을 받았습니다.
 
(주 : 청룡기 선수권의 패자 부활전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선보였던 ‘더블 일리미네이션’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즉, 한 번 패해도 패자 부활전을 통하여 최종 결승전을 치를 수 있었으며, 최종 결승에서 승리한 팀이 비로소 최종 우승팀이 되는 것이다. 1977년에서는 동산고와 광주일고가 승자 결승전에 올라 동산고가 최종 결승에 올랐고, 동산고에 패한 광주일고가 대구상고와 패자 부활전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대구상고가 광주일고에 11-3으로 대승하며 동산고와 다시 맞대결할 기회가 주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패자 부활로 올라 온 학교가 우승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승수는 ‘2승’이었다는 점이다. 동산고가 승자 결승에서 승리하여 +1의 어드밴티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구상고는 동산고와의 첫 경기에서 3-1로 승리한 후,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7-2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사실 청룡기 우승에는 또 다른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청룡기에 앞서 열린 대통령배 때 감독님께서 외출 시간을 줬는데, 제가 늦게 복귀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일고 주장이었던 박종훈(현 NC 다이노스 이사)과 야구장에서 놀면서 밥도 같이 먹다 보니 의도치 않게 복귀 시간이 늦어졌는데, 주장인 제가 없어지다 보니 “이만수 없어졌다. 납치 당한 것 아니냐?”며 숙소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결국 경찰에도 신고했다고 하더군요(웃음). 결국 복귀는 했지만, 정동진 감독님께서는 “주장이 외출 시간도 안 지키고, 뭐하는 짓이냐!”며 “보따리 싸서 대구 내려가자!”고 불호령을 내셨습니다. 그때 정말 ‘아이고 큰일났다!’ 싶더군요. 경기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감독님은 내려가자고 하시고, 정말 난처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동문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감독님을 설득한 끝에, 경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동대문 야구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여파로 대통령배에서는 4강도 못 들어갔습니다. 저 외에도 오대석, 박영진 등 좋은 선수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구상고 하면 우승’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던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대구로 내려온 이후에는 정말로 ‘죽어라’ 연습만 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잡고, 다 같이 뭉쳐서 우승해 보자는 열의로 가득 찼죠. 결국 감독님께서 선수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청룡기 선수권을 위해 첫 대회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 결국은 청룡기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웃음).
 
나의 은사, 정동진 감독님
 
이렇게 모교를 이끄신 정동진 감독님과의 인연은 고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교 1학년 말에 정동진 감독님께서 모교에 취임하셨는데, 취임하시고 나서 저희들에게 장거리 로드 워칭(road walking) 훈련을 지시하셨습니다. 학교에서 대구 앞산까지 한 시간 반 정도면 왕복할 수 있는데, 도중에 3학년 선배들이 “감독님 첫 부임이셔서 몇 시간 걸릴지 모르실거다. 우리 옆길로 새서 놀자!”라고 꼬시더군요. 그래서 몰래 숨어서 노래 부르고 장난도 치면서 천천히 앞산까지 다녀왔습니다. 한 시간 반이면 다녀올 거리를 무려 3시간 걸려 다녀왔지요.
 
그런데 당시 고교야구는 지금의 프로야구를 능가하는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의 모습을 목격한 택시기사 한 분이 학교에 제보를 했습니다. 깜짝 놀란 교장 선생님께서는 정동진 감독님을 불러 야단 치셨고, 감독님께서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몰래 차를 타고 훈련 코스를 살피셨습니다. 감독님께서 직접 그 택시기사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저희를 기다리셨습니다. 저희는 1km 앞두고 전력으로 뛰는 척하며 3시간 만에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감독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얘들아, 한 번만 더 다녀와라!”라고 하시더군요. 감독님의 이 말씀 한마디에 3학년 선배들은 ‘감독님께서 우리가 농땡이 치다 온 것을 알고 계신다’고 눈치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 1시간 반 거리를 단 50분 만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보니, 날은 어둑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감독님께서 엎드려 계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옆에는 펑고할 때 쓰는 야구 방망이를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너희들이 훈련을 하지 않고 농땡이 치는 것은 모두 감독인 내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너희 서른네명 모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 무능한 감독을 때려라!”
 
감독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어떻게 제자가 스승을 때리겠습니까! 그 누구도 감히 방망이를 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해병개 출신인 우리 감독님은 정말로 독종이셨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빌어도 감독님은 “아무도 안 때리면, 내가 밤새 엎드려 있겠다!”라며 요지부동이셨습니다.
 
그때 제가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3학년 선배들이 저를 말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훈련하지 않고 농땡이 피우자고 나섰던 3학년 선배들이 미웠고,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감독님께서 절대 일어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방망이를 들자, 감독님께서는 “만수야, 네가 나를 도와다오. 네가 나를 때려야 내가 일어날 수 있다.”라며 빨리 당신을 때려 줄 것을 재촉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 요령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있는 힘껏 스승을 때린 셈이지요. 더구나 그때는 겨울이라 감독님 살갗이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습에 저도 10번만 방망이를 휘두르고 나서 “잘못했습니다. 감독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빌었습니다. 그러나 감독님께서는 “이놈아! 스물 네 방 남았다!”라며 선수 숫자만큼 본인을 때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결국 34대를 모두 채운 후에야 엉덩이가 피범벅 된 감독님께서 일어나셨고, 그제야 선수들 모두 감독님을 끌어안으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정동진 감독님께서는 “내일부터 열심히 하자”라는 말로 다독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정동진 감독님과의 일화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삼성에서 다시 감독과 선수 관계로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청룡기 선수권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피땀 흘렸던 감독님과 제가 아직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쯤에서 저의 고교 시절과 청룡기 선수권 당시의 추억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70회 청룡기 선수권대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우리 후배 선수들 모두 다치지 말고, 패기 있는 모습으로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하며) 현재 이만수 감독은 여전히 전국 각지를 돌며 야구 재능 기부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수술을 받은 정동진 감독은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하기 위해 재활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정동진 감독의 쾌유를 기원한다.
 
※ 본 글을 편집한 본지 김현희 기자는 2008년 기자 입문 이후 고교 및 프로야구 취재를 중심으로 해 왔으며, 2011년 이후에는 청룡기 책자 집필을 도왔다. 올해도 청룡기 70년을 맞이하여 한국 야구 역사 집필에 한 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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