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만연히 걷기로 작정했을 때, 갖가지의 잡념들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발산되었던 경험이 있다. 기자 개인의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는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경험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각종 모니터를 끄고 생각의 시간을 작정하고 가질 때보다, 의도치 않게 ‘도보’라는 일상 내 구간에서 크고 작은 생각들이 무수한 가지를 쳐나가곤 한다. 이 과정, 즉 걷기라는 행동 양식이 인식과 사유의 기반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연극이 지난 7일 개막했다.

이경성 연출의 신작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는 지난 5월부터 9월 사이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 이하 바키)가 비무장지대인 DMZ(Demilitarized Zone) 일대를 도보로 횡단하며 분단의 풍경을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하며 만들어진 연극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전쟁이 중단된 땅, 군대의 논리가 일상과 밀접히 맞닿아 있는 공간. 가끔 잊어버리게 되는 우리 땅의 정체성을 이들은 ‘걸음’으로써 재인식하고자 한다. 

 

 

이들이 걸음을 극장 안에서 재현하는 방식은 꽤 다채롭다. 무대 위를 쉴 새 없이 걸음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객석 뒤까지 소리를 통해 도보 공간으로 이어나간다. 또한 지난 여름 진행됐던 이들의 도보 횡단을 영상에 담아내어 실제 지역의 의미와 무게감을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무대 중앙의 직사각형 모래판에서는 배우들이 미니어처를 촬영해 라이브로 상영한다. 이는 서사가 삽입돼야 하는 역사적 사건 혹은 정보들을 제한된 프레임을 이용해 구현하기 위함이다. 배우들은 (작업을 통해 다듬어지긴 했지만) 자신의 말을 내뱉는 실연자이자, 공간을 설명하기 위한 서사의 조종자가 된다. 

배우들은 약 110분의 러닝타임 동안 쉴 새 없이 걷는다. 파주, 연천 등을 거쳐 고성에 이르기까지, 또한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을 걸음의 시공간으로 연장시키기까지. 이들의 부지런한 걸음은 사유의 단초와 확장을 이끄는 재료이자 수단이었다. 이들이 걷는 공간은 우리의 ‘중단된’ 전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군인의 안내로 지역적 정보들을 접하고, 잊을만하면 터지는 포탄 소리를 만난다. 특히 38도선 부근에서 듣는 ‘안보’교육은 우리가 아직 ‘반공’을 절대적 신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공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해준다.

‘비포애프터’, ‘그녀를 말해요’ 등 바키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잊어버리기 쉬운 사건과 현상들을 관객들에게 간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 몰각의 과정을 방지하려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이들이 이미 70여 년 동안 지속돼 온 분단이라는 현실을 이야기하기로 작정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하지 않음(혹은 못함)’이 현재 우리의 문제적 시공간을 풀어낼 수 없는 결정적 이유였음을 말하고 싶어서였던 것 아닐까.

 

 

이들이 걸었던 경계의 공간은 해당 지역민들에게는 소박하고 담담한 일상들이 지속되는 공간이다. 바키는 그곳의 평범한 일상 안에 분단의 미묘한 흔적들이 새겨져있음을 발견해간다. 바키 개개 멤버들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이곳을 걸으며 자신의 일상과 이곳의 일상을 결부시키며 연극으로는 모두 담아내지 못할 개인의 난잡한 서사를 생성해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함께 힘주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분단’된 ‘이 땅의 경계선’을 ‘걷는’ 것이다. 

연출가 이경성은 "지난 10년간 동료들과 연극을 만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병폐적 징후들을 대면해왔다"며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의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보면 결국 한반도의 분단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한다.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논의와 사유가 공존하는 지금 여기. 2017년의 대한민국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공간은 20세기의 욕망들이 뒤얽혀 봉합되어 있는 경계의 공간이었다.

 

 

관객들은 110분간 이어지는 바키의 걸음을 통해 자신만의 다양한 잡념들을 진행시킬 자유와 권리가 있다. 난잡한 보폭과 대열들이 결국에는 도착점에 이르러 하나의 가지런한 행렬을 만들기까지, 부디 당신의 잡념의 종점은 우리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귀결되길 바라며.

연극 ‘워킹홀리데이’는 오는 2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서 공연된다.

keyy@mhnew.com 사진ⓒ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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