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 멤버. '화려함'보다는 '꾸준함'

▲ 두산 정재훈. 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늘 꾸준했던 선수였다. 대학시절에도 그러했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문화뉴스 MHN 김현희 기자] 2008년 11월부터 뒤늦게 이 일을 시작, 2009년부터 본격으로 그라운드에 나섰습니다.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도 좋았지만, 미래의 프로야구 선수들을 만나는 것 역시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년째에 접어들면서 전국대회 결승전 등을 통하여 많은 선수들의 웃고 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프로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민을 털어 놓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던 아마야구의 뒷이야기들, '김현희의 야구돌 시트콤'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6편은 동문 선배의 현역 은퇴 소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히, 하지만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켜왔던 그 선배의 이름은 두산의 정재훈(37) 선수입니다. 시간을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1년으로 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2001 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의 추억,
성균관 그리고 두산의 정재훈

당시 본 기자는 대학 2학년생이었습니다. 강의실과 동아리방, 때로는 대학로를 오가며 평소와 다름 없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던 필자에게 눈에 확 띄는 벽보(당시에는 흔히 '대자보'라고 불렀습니다만)가 게시판에 붙어 있었습니다. 모교 야구부가 대학 야구 춘계리그 결승에 올랐으니, 동대문야구장으로 응원 가자는 내용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총학생회에서 버스를 빌렸으니, 재학생 누구라도 공짜로 혜화동에서 동대문까지 갈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학교 야구부 성적에 별 관심이 없던 필자였지만, 그래도 결승까지 올랐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결승 상대가 연세대였습니다. 연세대라면, 예전부터 대학 야구의 강자라고 평가받았음을 잘 알았기에, 모교가 패할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연세대에는 '조라이더‘로 불리는 에이스 조용준(前 현대-넥센. 현 덕수고 코치)과 4번 타자 이현곤(前 KIA-NC)이 버티고 있어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실력에서는 한 수 아래라 해도 응원에서는 절대 패하지 말자!'라는 각오만큼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연세대에 아카라카가 있다면, 성균관대에는 킹고(King-go : 성균관대 상징인 은행나무를 뜻하는 영단어 Ginkgo에서 K와 G를 바꾼 형태)가 있다!"라며 기세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응원에 힘입은 탓인지 모교가 예상을 뒤엎고 연세대에 5-0으로 영봉승했습니다. 대회 MVP에 선정된 현재윤 선배의 적시타, 그리고 동기이기도 했던 사이드암 투수 박강우의 5피안타 완봉 역투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잘 몰랐는데, 그때 우승이 모교의 17년 만의 우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우승의 주역들은 대부분 프로 입단에 성공했습니다. 현재윤(98학번, 삼성-LG), 추승우(98학번, LG-한화), 고동진(00학번, 한화), 박강우(00학번, KIA-LG)등이 당시 동대문야구장을 달구었던 주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에이스도 항시 5분 대기조로 불펜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이가 바로 정재훈이었습니다. 2001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수 투수상은 동기인 박강우 선수(현 도개고 투수코치)가 받았지만, 사실 실질적인 에이스는 99학번 정재훈 선배였습니다. 실제로 추계리그를 진행하면서 3학년 정재훈 선배의 활약 역시 가볍게 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결승전에서 한 차례 위기가 있었다면, 이연수 감독께서는 바로 투수를 교체하셨을 것입니다.

▲ 지난해 4월에는 월간 MVP까지 받을 만큼 건제했다. 이것이 현역 시절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사실 정재훈 선배는 휘문고 졸업을 앞두고 프로 지명을 받았던 상황이었습니다. 1999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두산에 5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그때는 프로에 곧바로 가지 않고 대학 입학을 선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많아 확산되어 있었던 터라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졸업 직전(2002년)에는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으로도 선발, 그 이름값이 헛되지 않음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과묵하고 본인이 할 일이라면 두말없이 하는 스타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 이후에도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던 두산과 그대로 계약, 2003년부터 프로에 입문했습니다. 그 사이에 구원왕(2005년 30세이브)과 홀드왕(2010년 23홀드) 타이틀도 획득해 보고, 초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 멤버로도 선발되는 등 야구 인생에서 몇 차례 불꽃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다른 스타 플레이어들처럼 화려한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팀이 필요한 상황에서 마무리나 롱 릴리프, 셋업맨 등을 오가며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30대 후반으로 가는 길목에서 46경기 1승 5패 2세이브 23홀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한 장면 역시 꽤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마 본인도 2016년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후 정재훈 선배의 1군 등판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2016년 8월, 경기 도중 타구에 오른쪽 팔뚝을 맞아 수술을 진행했지만, 설상가상으로 10월에 오른 어깨 회전근개 부분파열까지 발견됐던 것이 치명타였습니다. 결국 올해 내내 재활에 매달리다가 지난 8일, 공식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4시즌 통산 35승 44패 139세이브 84홀드,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기간 동안 무려 555경기에 출장했다는 점까지 가볍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은퇴 이후 정재훈 선배는 "스스로 우승 반지를 못 끼워 본 것이 아쉽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차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을 때에 두산은 준우승에 머물렀고, 2015년에는 롯데 소속이었기에 친정팀의 우승을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부상으로 중도 이탈되면서 한국시리즈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단에서는 2015, 2016년 우승 반지를 건네면서 베테랑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야구 영웅이 현역에서 물러나게 됐습니다. 2001 춘계리그 우승 주역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이었던 정재훈 선배의 은퇴로 이제 당시의 기억은 한 편의 추억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러고보니, 당시 우승 주역들 대부분 화려하지는 않지만, 꽤 오랜 기간 꾸준하게 그라운드에서 소금 같은 역할을 했다는 공통분모가 있네요. 정재훈 선배를 비롯, 모두 제2의 인생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원합니다.

eugenephil@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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