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08 - 이준익 감독의 '사도'

   
 

※ 영읽남은 기사 특성상 '사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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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서 깨어난 남자가 궁으로 향하며 영화의 시작을 알립니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이 남자의 이야기는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는 SBS의 드라마 '비밀의 문'이 있었죠. 잊힐 만하면 사도세자는 대중문화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관에서 깨어난 사도세자의 등장 장면은 잠들어 있던 역사를 깨워 보여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누가, 왜 사도세자를 깨운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시점으로 이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하려는 것일까요. 영읽남이 가을의 경계에서 준비한 작품은 '사도'입니다.



영화 밖에서 본 '사도'
본격적인 '읽기'에 들어가기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사도'에 얽힌 천만이라는 숫자, 그리고 유아인이라는 배우에 대한 것이죠. '사도'는 천만 감독(이준익. '왕의 남자')과 천만 배우들(송강호, 김해숙, 그리고 유아인)이 뭉쳐 만든 작품입니다. '암살', '도둑들'과 더불어 올 하반기 또 한편의 천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개봉 전부터 고조되고 있고, 충분히 기대할 만한 조합이죠. 주연으로서 한 해에, 두 편을, 연달아 천만 관객 동원한 배우의 탄생을 목격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아인의 필모그래피에 이번 영화와의 연관성을 찾을 만한 작품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유아인은 숙종을 연기했었습니다. 숙종은 영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할아버지이죠. 즉, 유아인은 과거 자신이 맡았던 역의 손자를 연기한 것입니다. '사도'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와 함께 숙종의 묘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요. 유아인은 과거 자신이 연기한 인물의 무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영화의 내용과는 무관하지만, 유아인이라는 배우 덕분에 그 장면이 무척 다양하게 읽혔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이 누구야?
많은 작품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은 붕당정치, 파벌싸움의 참혹한 결과물로 그려집니다. 당과 파벌의 싸움 속에서 미쳐가는 혹은 고립되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다룸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오버랩할 수도 있죠. '사도' 역시 정치의 역학관계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 주목한 부분은 가장이라는 자리를 지키려는 아버지와 이를 위협하게 되는 아들 간의 갈등입니다. 그래서인지 방황하는 사도세자만큼, 꺼질지 모르는 왕좌를 지키기 위한 영조의 고독도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가부장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외면 한 왕, 그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가장을 물려받고 싶었던 아들의 서러움. 관객이 누구에게 이입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다양하게 읽힐 수 있겠네요.

영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다양하듯, '사도'의 관람객도 영조를 보는 시선도 다양할 것 같습니다. 그가 사도세자를 경계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말할 수 있죠. 나라를 위해 유지하고 있던 탕평책의 붕괴를 우려한 정치적 선택인가, 권력을 뺏기고 싶지 않던 왕의 욕심인가, 가장이라는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은 한 남자의 견제인가, 혹은 아들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훈육의 과정이었던가. 이번 글에서 조명하고 싶은 부분은 영조의 불안감입니다. '사도' 안에는 영조가 가진 불안감이 강박적인 행동들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귀를 씻고, 입을 게워내는 등 영조는 집착하던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거세될 뻔했던 남자, 그리고 거세될 리 없던 남자
그는 왜 불안했는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영조가 느꼈을 고립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보장받았던 왕이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흠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도전할 세력이 없었죠. 이에 비해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형인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 등에서 오는 의심(영조가 형을 죽였다는 의심이 따라다녔습니다) 등 왕의 아들이었지만 권력에서 배제될 위험 속에 성장했습니다. 영화에서도 이 시기가 매우 괴로웠음을 말하는 부분이 있죠. 이는 영조가 가진 일종의 콤플렉스였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일찍 세자로 선택된 덕분에 (영조보다) 안정된 권력을 보장받은 상황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 성장환경의 차이가 결국 부자간의 간격을 더 벌려놓았을 것입니다. 권력을 잃을 위기 속에 성장한 영조와 권력을 잃을 리 없는 환경 속에 자란 사도세자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 숙종 혹은 아들인 사도세자 모두 자신과 같은 고민을 겪지 않았다는 차이. 궁궐 내에 그의 공포를 이해해줄 사람은 한 명도 없던 것입니다.

결국, 영조만 경험한 권력배제의 두려움이 그를 더 고립시켜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 불안감이 결국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이어진 거죠. 영읽남은 '사도'를 숙종·정조라는 권력을 잃을 리 없던 남자, 그리고 영조라는 권력을 잃어봤던 남자 간의 간격을 보여준 영화라 정리하고 싶습니다. 좀 더 있어 보이게(?) 표현한다면 '거세당할 리 없던 남자'와 '거세당할 뻔했던 남자'의 간격이 낳은 비극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정조의 죄책감, 그리고 영화와 역사
관에서 깨어난 사도세자로 시작한 영화는, 그를 기억하며 춤을 추는 정조의 모습으로 막을 닫습니다. 역사 속에 잠든 사도세자에게 바치는 제사와 같은 마무리, 동시에 아들의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엔딩입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 춤사위를 통해 영화에 등장했던 한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활을 쏘며, 억압받지 않고 날아가는 화살을 부러워하는 장면이 있었죠. 정조는 그런 사도세자의 모습을 동정, 동경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 춤사위에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 외에도 숨겨진 감정이 하나 더 있습니다. 대사를 통해 언급되지만, '사도'는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가졌던 마음을 '죄책감'이라 표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 속의 정조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도세자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하죠. 자신이 태어남으로써 영조는 대안이 생겼고, 그 때문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더 멀리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국사 시간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을 보며, 정조의 '유년기 기억이 참 강렬했었나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에서 보여준 죄책감이라는 감정으로 그 기록을 바라보면 새롭게 보이면서 설득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읽남은 이런 측면이 영화가 역사를 다룰 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편적인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인간 개개인의 시점과 감정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암기로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이입을 통해 다양하고 풍부하게 체험되는 것.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고정하려는 현재의 교육정책에 반하지만, 영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사람을 연결하는 영화의 능력, 가치를 믿고 싶습니다.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서 프로이트
역사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이번 글은 영읽남이 아닌 역읽남(역사책 읽어주는 남자)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번 소재가 조선 시대의 왕권, 가부장제에 관련된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남근'과 관련된 이론들을 가져오면 어떨까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다룰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더군요. 프로이트의 이론들로 현시대의 인물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많은 한계와 비판과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성을 중심에 둔 이론이라 비판받기도 했던 그의 이론은 올해의 글쓰기 경향과는 잘 맞지 않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신화가 흔들리는 것은 과거보다 사회가 복잡해졌고, 덕분에 인간의 심리도 더 복잡해졌음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는 사회가 고전적 가부장제로부터 탈출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부쩍 많이 주목받는 여성학, 페미니즘에서의 논의들이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더 다양한 관점의 영화가 등장하고,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영화 읽기를 시도해 보기를 바라며, '사도'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글]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movitmov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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