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문화 人] 연극 '20세기 건담기'의 안병식 배우가 그리는 천재 작가 이상은? ①에서 이어집니다.

어떻게 '배우'를 하게 됐는지, 어쩌다 '연극'을 택하게 됐는지?

└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 청소년연극서클과 극예술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연극을 해 왔다. 연극은 친구들과 재미있게 소통할 수 있는 놀이였고 사람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도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연극은 '장자'에 나오는 '어데 가져가 쓸 데라곤 없는 구부러진 나무'였다. 나중에야 커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도 만들어 주는 신목도 될 수 있겠지만 정말 내가 계속 갈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법학도가 그러하듯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사법시험이 아니라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있더라. 그렇게 되더라.
 

 

 

전도유망한 법학도가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많이 염려했을 것 같다

└ 오랫동안 연극과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으로 장래 진로를 결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해 법학과에 진학한 후 판사·검사가 되는,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가 통용되는 때였기 때문이다. 

나도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 공부해 법학과에 갔다. 이후 '연극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는데, 자꾸 밤 10시만 되면 고시실을 나오게 되더라. 캠퍼스에 앉아 달을 보며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안 잡혔던 것이다. 그즈음 아버지가 불치병에 걸리셨다. 사법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정말 안 잡히더라. 

그래서 결심했다. 한예종 시험과 금융감독원 시험을 같이 보기로. 만약 금융감독원에 합격하면 직장생활 하다가 로스쿨 다닐 생각이었다. 만약 금융감독원에 떨어지고 한예종에 합격하면 그냥 연극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건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금융감독원은 마지막 면접에서 기분 좋게 떨어졌고, 한예종은 합격하게 됐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하는데 병상에 계시니 도저히 못 하겠더라. 아버지 병원비와 등록금도 벌기 위해 학교에 바로 다니지 않고 사회생활을 잠시 했다. 1년 휴학하고 재학할 시간이 닥쳐왔는데, 이제는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야겠더라. 결국에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드렸다. 그렇게 30세에 학교에 들어갔고, 대학로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은 31세부터였다.

후회는 없나?

└ 가끔 그런 생각은 한다. 사법연수원 다니고 와서 연극을 했어도 30세에는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웃음). 연극을 직업으로 가지면 무대가 직장이 된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하는 것은 굉장히 달랐다. 연극을 동경하며 바라봤던 것과 직업으로서 대해야 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연극계에서 꾸준히 작업 기회를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 30대 중후반이 고비인 것 같다.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지금은 작업을 오래 쉬지 않고 하는 축에 속해 감사하지만, 고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작품 중 아직도 본인의 머리와 가슴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 알려진 작품은 아닌데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페스티벌에서 했던 '쉬트'라는 1인극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까뮈의 '전락'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 대본화 과정이 너무 늦게 돼 공연 일주일 전에야 초본이 나왔다. 1시간이 넘는 1인극을 준비하기엔 불가능한 시간이었고 배우로서 매우 폭력적인 상황이었다. 첫 공연 이틀 전에는 '제작비를 내가 물어줄 테니 엎자'라는 얘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공을 시작하는데 무대에 대한 공포가 별로 없는 축인데도 지옥에 입장하는 기분이었다. 연기하기는커녕 대본을 외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관객들의 눈을 보았고 입을 여는데 나도 모르게 말을 하고 있더라. 

공연 내내 천 길 낭떠러지 끝에서 배부른 숫사자를 마주하며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첫공이 끝나고 안도했고 허탈했고 아주 조금은 기뻤다.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지만 당시에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느꼈던 목덜미의 서늘함은 잊지 않고 싶다.


 

▲ 지난 6월 남산예술센터서 공연된 '국부' ⓒ 남산예술센터

지난 작품 '국부'는 논란이 참 많았다. 참여 배우로서 격렬했던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 그 작품에서 10·26 사건 때 총에 맞지만 계속 부활하는 초인 박정희 역할을 맡았었다. 박정희를 소재로 하는 만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통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했고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에게 항의받는 연출을 보며 '그럴 수도 있지'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분들이 박정희를 비꼬아서 항의하는 관객들이 아니라 왜 시민극장에서 박정희를 찬양하느냐고 항의하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솔직히 놀랐다. 나는 그분들이 박정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 당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라는 테마는 현재 진행형이고 우리 속에 정말 여러 형태로 남아 여러 색깔의 안경으로 기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건담기'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극에 치닫는 과정과 이상의 죽음의 과정이 맞물려 간다

└ 성기웅 연출가 특성상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뉘앙스로 얘기한다. 이상은 죽기 전에 '라쿠고'라는 형식으로 말놀이를 한다. 역사적으로 이상은 불령선인으로 끌려가 옥에 갇히고 건강이 악화돼 결국 출소한 다음에 죽는다. 그러나 극에서는 그가 불령선인으로 끌려가면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또한 '너는 조선인이 맞느냐', '정체가 뭐냐' 등의 질문에 대면함을 그리는데,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누군지 온전히 말할 수 없었던 이상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 우리 작품에 '수영'이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이상이 경영했던 제비다방에서 일했던 아이다. 그가 점점 일본 제국주의 교육받으면서 마지막에는 자원해서 군인이 된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쟁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추도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스케치들이 당시 상황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 연극 '20세기 건담기' 연습사진

연습실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 '말'을 중시하는 분이니 초반부터 그 부분에 신경 쓰셨다. 말의 장·단음, 부사어, 지시어 등을 디테일하게 잡으신다. 배우로서 정말 오랜만에 잡힌 부분들이었다(웃음).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답답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장·단음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1930-40년대에는 중요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성 연출님은 아직까지 우리말의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분이다. 이번 작품이 시대극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현대극에서도 철저하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익숙해지고 나니 간만에 말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연습한다는 생각이 들어 배우로서 꽤 재밌기도 하다. 

어려운 점은 대본이 계속 수정됐다는 점이다. 말에 신경 쓰며 연기하려면 대본이 악보처럼 몸에 붙어야 한다. 대사가 조금씩 바뀌면 악보도 바뀐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뀔 때마다 악보를 새로 외워야하는 애로사항이 있다(웃음). 이상은 '참'이라는 부사를 많이 쓰는 사람인데, 대본이 변경되며 '참'의 위치도 '참' 많이 바뀌었다. 오늘도 인터뷰 나오다가 수정된 대본을 확인했다. '어떡하지' 싶다.

대사 암기가 쉽지 않았겠다

└ 대사 분량 자체도 굉장히 길다. 개인적으로 한 문장 당 100~200번 연습해야 자연스레 나온다. 성 연출님은 구체적으로 장·단음과 강조점 생각하며 대본을 작성하신다. 배우로서 납득되는 부분이니 최대한 잘 따라가고자 무지 노력한다. 쉼표 하나가 딴 데 가 있어도 다시 외워야하는. 재밌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웃음). 계속 수정되니 연습량이 늘어나긴 하지만, 연습 과정에서 배우의 제안을 잘 수용해주시는 분인지라 답답하기보단 즐겁게 임하고 있다.

 

 

▲ 현재 공연 중인 연극 '20세기 건담기'

'20세기 건담기' 관객들에게

└ 30년대 모던과 전근대가 뒤섞인 그 이상한 느낌의 경성을 느끼고픈 분들께, 그리고 이상과 구보, 유정킴, 구본웅과 같은 당대의 예술인들의 얼굴을 보고픈 분들께, '당시 청년들의 고민이 지금 청년들의 고민이 과연 달랐을까' 라는 궁금증이 있는 분들께, 또한 연극 내에서의 말맛이 사라지고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경향 가운데 말맛의 힘으로 긴 시간을 들어보려는 생각을 가진 분들께, 그리고 일제시대의 음악과 옛말의 뉘앙스를 들어보고픈 분들께 '보러 오시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후 어떤 연극을 하고픈지? 어떤 배우가 되고픈지?

└ 극단 돌파구를 2015년 여름에 만들었다. 창단하면서 '10년 후에는 해체하자'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일단 2025년까지는 충실히 극단 작업을 잘 해내고 싶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쉬이 답하기 어렵다.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매번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좋은 연기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쓸모없는 연극을 쓸모없게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지나봐야 알겠다. 1년 지난 후, '1년 전 어떻게 생각했었냐'고 물어보면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어느 무대서 다시 안 배우를 만날 수 있을까?

└ 전인철 연출의 연극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에 출연한다. 삼연하는 작품인데, 대중성 갖춘 공연이다. 2015년도에는 'B성년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이후 극단에서 서울 공연을 치렀다. 이번 세 번째 공연은 두산아트센터에서 하고 이어 안산예술의전당에서 만날 수 있다. 

key000@mhns.co.kr 사진ⓒ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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