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MHN 박리디아 부사장]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이 처음으로 패션모델을 만났다.

1999년 국내최초로 모델과를 설립하고, 2004년 모델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설립한 동덕여자대학교의 김동수 모델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김동수는 1979년 LA국제 모델 선발대회 동양인 최초 수상을 통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돌며 '한국의 미'를 알렸다. 패션쇼만 1,000회 이상 출연한 가운데, 모델 최초로 MBC 교양프로그램 '생방송 새아침'의 MC를 맡았으며, 다양한 명사 특강도 진행했다.

김동수 교수는 이러한 공을 인정받으며, 2012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매해 주최하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은 가수, 배우, 희극인, 성우, 모델, 만화가, 드라마 작가 등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제 모델도 '예술가'로 인정을 받는 가운데, 김동수 교수를 만나 모델 김동수와 국내 모델 시장의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축하하며, 근황을 들려 달라.
ㄴ 영광이다.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들어갔고 '패션모델'로는 1호로 알고 있다. 항상 1호는 기분 좋은 영광이 뒤따르는데, 부담도 있다. 무엇보다 예전에 잘나가는 모델로 활동하셨던 박리디아 씨가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해, 엄선해주니 기쁘다.

문화체육관광부에 '패션모델'이 예술가 분야에 들어갔다. '패션모델'도 예술가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ㄴ 모델은 다른 대중문화 예술이나 순수 예술 분야보다 상당히 늦게 시작됐다. 언제든지 그런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성악, 기악, 연극, 무용 등은 국내외로 역사가 깊다. 그런데 모델은 1956년 노라노 선생님이 척박한 시대에 처음 패션쇼를 열었다. 우리가 의식주라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벗고 살 수는 없다. 대부분 사람이 옷을 입지만, '옷'이라 한다면 괜히 사치스럽고 거부 반응이 있는 사회 정서가 있었다.

그리고 모델이라는 직업이 일반인보다 외형적인 조건이 다르다. 오늘날엔 미에 대한 기준이 모델이 됐고, '워너비'가 됐다. 그 다름에 대한 인정을 못 한다.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한다.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여기에 4년제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가 생겼다는 것은 충분히 학문적으로 공부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모델은 웹스터 사전에서 보면 '닮을만한 가치가 있는'이라는 뜻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콘텐츠진흥원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도 비보이, 대중음악가, 모델 등을 기리면서 상을 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순재 선생님, 대한민국 최고 극작가분들도 오신다. 말 그대로 대중들에게 대중문화예술을 알리는 역할이다. 이야기하자면 길겠지만, 모델 역사가 그만큼 짧고, 대부분 옷을 입고 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데 조금 인색했다. 인간은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이 누구나 있다. 이제는 그 미의 대명사가 모델이 됐다.

 

척박했던 상황에서 모델을 시작하고, 오늘날 학계에서 모델을 인정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ㄴ 누구든지 제일 앞서가는 사람은 힘들다. 길이 없기 때문이다. 힘든 만큼 함부로 이야기하면 쉽다. 내가 길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많은 고뇌가 따른다. 내가 가는 길이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나는 미국에서 모델을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 프랑스 등 7개국을 다니며 일하다 보니 그들이 바라보는 모델이라는 인격과 경제적인 인정, 존중, 대우를 먼저 배웠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가 이뤄지다 보니 소수 정예만 누리는 패션 문화였었다.

당연히 인식이 닫혀 있었다. 첫 번째로, 모델은 외모나 키, 아무 옷이나 입어도 척척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그것이 왜곡되어 사치로 받아들여지는데 너무 놀랐다. 그래서 고국에 들어와 놀란 것은 모델과 패션에 대한 편견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좋아하는 내 직업을 남들이 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 1980년대 초 모델 김동수의 미국 활동 모습 ⓒ 김동수

이후 내가 방송이나 책을 통해 모델 외에 돈 많이 안 들여도 멋을 낼 수 있다는 엄청나게 칼럼과 강의를 했다. KBS, MBC TV나 라디오 출연을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깼다. "무대에 서면 저 친구는 굉장히 터프하고 말 한마디 안 할 것 같은데, 친근감 가게 한다"라는 반응이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가 한국의 아름다운 미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나는 톱 모델인데 못생겼어요"라고 말하며 친근감이 가게끔 전략을 세웠다. 도와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는데, 한 가지 원칙이 있던 것은 나에 대한 자부심, 내가 하고자 하는 열정은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너무나 두렵고 힘들었다.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구도 나를 안 믿어주기 때문이다. 또, 나는 힘든데 남들이 나보고 잘한다고 해줘서, 진짜인가 해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칼럼과 책으로 쓰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출판사도 인문학에서 최고라는 민음사, 까치글방 쪽에서 출판해 주셔서 소위 말하는 지식인분들이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지상파 뉴스에 나와 모델에 관해 이야기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칼럼도 쓰고, 기자 대상 강연도 했다. 논리적으로 무장된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진정성을 읽었고,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게 20년 전이다. 아이고, 수고했다. (웃음)

▶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 28. 모델 김동수 "20대 美·유럽 진출, 찬란했다" ② 에서 계속됩니다.

golydia@mhns.co.kr 정리·사진ⓒ문화뉴스 MHN 양미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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