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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이라는 단어는 항상 나와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내가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전시중 가장 인상적인 전시였다.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이라는 전시 제목의 의미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세개로 나누어 각 시대별로 의미를 찾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에게 좋은 전시가 될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한국전쟁을 갓 치러낸 1950,60년대 사람들에게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미친 생각일지 모른다. 지나가는 거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수레에 짓이겨진 시체가 놓인 거리를 걸어다니는 삶은 미치는 것이 더 정상적인 시대였다.

   
 

세계 2차대전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앵포르멜 스타일의 미술작품이 발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앵포르멜이란 전전(戰前)의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이다.

죽음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고 살기 위해 그 앞을 걸어가야만 했던 시기, 이념보다도 생존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시기에 무언가를 따라 그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주위에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리는 구상화를 그리기에 세상은 너무 참혹했던 것이다.

   
 

전쟁 전과 후의 가족을 초상화로 임옥상 화백의 6.25 전의 김씨일가와 6.25후의 김씨일가 작품을 보면 가족의 죽음으로 비워진 공간에 그 무엇도 채워질 수 없음을,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전쟁 앞에서 난자리는 너무나 아픈 자리였을 것이다.

   
 

집념은 뜨거웠다

1960년대는 무엇이든 새로 만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었기 때문이다. 건설과 제조보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이 시대의 작품들을 보니 시대간의 갈등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추측하게 되었다.

   
 

아버지 세대의 삶은 사칙연산 같은 것이었다. 고속성장이 이루어질 때 20대였던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 어제보다 내일 더 잘' 살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개인의 성공과 기업의 성공이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상황에서 기업의 발전은 곧 개인의 행복이 되던 시기였다.

   
 

우리 세대의 삶은 확률 같았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무조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서울대에 들어간다고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목표 달성에는 조건 없는 노력뿐 아니라 운 또한 조건에 포함된 것이다. 우리가 다니는 회사가 발전한다고 해서 회사원인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의 법인세율보다 개인의 소득세율이 높은 세상에서 야근과 주말근무를 바치며 돌아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가까웠다.

지금 가장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대통령이 아니라 연예인이 되는 것, 혹은 인터넷 기업을 만들어 성공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성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성공을 원하는 사람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러니까 무슨 길을 선택하든 노력하면 당연히 성공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세대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자식들의 취업포기현상은 열심히 하지 않은 루저들의 변명처럼 보일 것이다.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성공의 반대편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해당 산업에 종사를 하고 일을 한 작가이기에 산업단지 사진을 찍어도 이토록 찬란하고 영롱하게 찍는 조춘만 작가의 '인더스트리 코리아'를 보면서 그 사람들이 일구어낸 '만들어낸' 가시적인 물건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들이 지어냈던 수많은 도로와 아파트와 공장들은 그들의 훈장이었다.

 

   
 

모든 것이 넘쳤다

넘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자살문제는 사회가 발전할 때보다, 이미 발전했을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10년째 1위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1990년대를 지나 사람들이 이 이상의 물질적 풍요를 상상할 수 없을 때, 그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자연스럽게 '삐뚤어진다'. 이게 당연한 걸까? 이게 옳은 걸까? 그전에는 맹목적으로 행하였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생긴다. 그래서 예술작품도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비틀거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데비한의 '존재의 계절' 시리즈는 그리스 조각들이 현대 광고모델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닌 조금 더 고상해져야 할 것 같은 조각상들은 조각된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찍혀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밀로의 비너스 조각이 아닌 자본주의적 포즈를 한 프린트된-심지어 그 중 몇은 유색인- 고전 여신들의 모습은 나의 고정관념을 두드리기에 충분했다.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한걸음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자기가 인식한 세상을 남들에게 보여주며 당신이 바라본 세상이 내가 바라본 세상과 같은 것인지를 물을 때 예술가도 즐기는 사람도 세상 속에서 한걸음 벗어난 사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아띠에터 김현정 victorjay@mhns.co.kr인문학도치고는 경영학적이고 회계사치고는 문학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관심은 높으나 깊이는 얕은 문화에 대한 지식을 넓고 깊게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문화뉴스·문화체육관광부_문화포털에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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