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에는 노년이 된 하루키의 삶이 투영돼 보인다

[주의: 소설 내용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거짓말의거짓말]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1권과 2권을 다 읽었다.

소설의 형태로 국내에 출시된 하루키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개인적으로 총평하자면 '노르웨이의 숲',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이어 하루키의 장편 중 세 번째로 좋다. 하루키가 50이 넘고 중년 이후에 쓴 책 중에는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이전의 장편과 비교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큰 차이는 형식의 단순함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등 호흡이 긴 장편에서 하루키는 대부분 교차 방식의 이야기 구성을 사용해 썼다. 소설의 핵심 이야기 줄기를 2개로 나눠 주인공과 상황을 교차로 구성해 전개해 나가는 식이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는 '나'라는 1인칭 시점을 사용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집중력이 약간 흐트러져도 따라가기 쉬운 구성이다. 

 

내용적으로는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결말의 처리가 인상적이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결말의 느낌은 하루키의 소설 치고는 이례적으로 해피 엔딩에 가까웠다. 어쨌든 하루키인 만큼 '그리고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 회색과 같은 무채색의 온도 대신 노랑, 혹은 주황색의 따뜻한 기운이 남는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하루키의 책은 대체로 책을 덮은 후에 3개월, 혹은 6개월쯤 지나면 이상하리만치 결말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 모든 하루키의 소설이 그랬다. 지금도 결말이 어느 정도라도 기억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3번 이상 읽은 노르웨이의 숲 정도밖에 없다. 

신기한 것은 책을 지난주에 다 읽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기사단장 죽이기의 결말 문장이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나는 지난주에 책을 다 읽었을 때 서평을 쓰게 되면 "어쩐지 기사단장 죽이기는 3개월 혹은 1년이 지나도 결말이 기억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결말이었다"라고 쓸 작정이었다. 하여간 신기한 하루키 효과다. 이번에는 일주일도 안 돼 결말을 까먹어 버렸다.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주제의식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하나의 막연한 풍경 혹은 어떤 느낌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도 책을 다 읽은 지 일주일 만에 결말을 잊어버리게 됐지만 어쨌든 결말의 느낌은 온화하다. 노년에 접어든 하루키에게 인생을 보는 방식, 혹은 소설의 매듭을 짓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대체로 책 자체에 대한 내 서평은 이 정도다. 

하지만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어쩐지 인간 하루키의 일면을 그 어떤 소설보다 많이 엿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나도 소설을 쓰는 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소설을 읽을 때 독자의 입장에서 읽기도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 본다. 

소설이란 굉장히 재미있는 장르다. 처음부터 거짓말(허구)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안에 진실을 담아내기 수월하다. 때때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놓고 '이것은 소설입니다'하고 도망갈 수도 있고, 번드르르한 거짓말로 원고지를 채우고는 '이것은 어느 정도 나의 이야기입니다'하고 시침을 땔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해봐서 안다.) 훌륭한 작가는 거짓과 진실의 줄타기에 능하다.

알랭 드 보통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연애 상대는 너무 쉽게 입술을 허락하는 상대(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도 아니고 절대로 입술을 열지 않는 이도 아니다. 적당히 줄타기를 하는 것.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진실과 거짓의 줄타기를 하고 있다. 

책 속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결국 그의 작품을 통해 거짓도 진실일 수 있고 진실도 거짓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하루키는 한 번 더 자신을 지킬 보호막을 얻게 된다. 

"여러분 소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도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모호한데 하물며 거짓을 전제로한 소설이라면 현실과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하고 도망가는 거다. 

그럼에도 내가 발견한, 혹은 책을 읽고 느낀 하루키의 진실이 좀 있다. 물론 진실이란 말을 썼지만 팩트라는 뜻은 아니고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내가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의 가설이라는 말이다. 

아마 하루키는 인생이 저물어가는 말년에서 '자식이 없음'에 대해 젊은 시절과는 다른 감상을 갖게 된 것 같다. '늙어서 자식을 원하게 된 것 같다'라고 단정해 말할 순 없지만 자신과 피를 나눈 혈육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자신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도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아마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통해 절대로 세상에 공표할 수 없는 사실을 하나의 작품으로 암시한 것처럼 하루키 역시 자신의 책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속 멘시키라는 인물은 하루키의 반영 혹은 의도적으로 하루키의 반영처럼 보이도록 창조된 인물이다. 소설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멘시키는 한 여성과의 한 번의 정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 여성은 한 번의 정사 후에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슬하에 딸아이를 하나 둔다. 멘시키는 그 여자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믿는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도 있지만 그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 여자아이가 자신의 딸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멘시키는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인용되는 위대한 게츠비의 게츠비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딸아이를 관찰하기 위해 딸아이의 집과 떨어진 산에 거대한 주택을 사고 딸아이를 군사용 망원경으로 훔쳐본다.  

아마 하루키는 멘시키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불륜을 암시하거나(이건 확률이 희박하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처럼 한 여성과 현실을 넘어선 어떤 상징적인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런 희망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 희망이란 것의 방향은 아마 지금의 아내에게 향해있는 것 같다.

그의 아내와 현실에서의 밍밍한 부부관계와 달리 은유의 세계에서는 행복한 부부이길 바랐던 것인지, 아니면 아내에게 제3의 여인의 존재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20대 중반 현재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레코드를 틀어주는 카페인지 펍인지를 몇 년 운영했다고 수필 등에서 읽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읽은 인터뷰와 하루키의 에세이 등을 통해 짐작해 보건대 아내와의 금슬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어떤 자식도 없다. 

하루키가 "자신에게 형제나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한적도 있다고 인터넷에 나와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출간에 즈음해 하루키는 국내 판권을 보유한 문학동네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첫 소설을 썼을 때가 29세였는데 지금은 68세가 되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합니다. 스물아홉 때는 '소설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순여덟이 되고 보니 '남은 인생에서 소설을 몇 편이나 더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라고 말했다. 

예순여덟이 된 하루키는 어쩌면 자기에게도 자식, 즉 혈육이 있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전보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 같다. 소설의 말미에 나(하루키)는 곤히 잠든 자신의 딸아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소설의 내용을 일부 옮기자면 

나는 아마 그들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그리고 무로는, 내 어린 딸은,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은총의 한 형태로,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무로는 소설 속에서 멘시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자인 '나'와의 실제 친자 여부가 불확실하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무로는 나를 버리고 떠난 아내가 바람을 핀 남자와의 사이에서 가진 아이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나의 아내 유즈는 임신을 즈음해서는 그(불륜남)와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아내가 임신을 한 시점에는 아내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행 중 아내와 꿈속에서 단 한번 격렬한 성관계를 맺는데 그 꿈을 꾼 날과 아내의 임신 날짜는 공교롭게도 정확히 일치한다. 다시 한번 현실과 꿈, 현실과 비현실이 섞인다. 

이 부분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써보자면 하루키는 젊은 시절, 혹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소설에서처럼 아내의 외도였을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내의 정신적인 외도, 물리적 증거가 남지 않는 어떤 행동에 대해 깊이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순여덟이 된 하루키는 이번 작품을 통해 아마 아내에게 어떤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서 나(하루키)는 자신의 딸이면서 딸이 아닌 무로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어쩌면 하루키는 자신의 받은 상처 이상을 하루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내에게 더 자주, 깊게 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어찌 됐든 그는 전 세계에 수백만에 달하는 독자와 팬을 보유한 인기 작가이고, 그 팬들 중에는 여성도 많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아무리 짐짓 태연하고 시침을 떼며 '독자는 독자일 뿐으로 그들과 나는 단지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만납니다'라고 해도 하루키식으로 쓰자면 '여자의 마음이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 거짓말의거짓말. talk·play·love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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