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에서 온 국악"…보두엥 드 제 인터뷰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낯익은 가야금과 거문고, 대금의 소리가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마지막 연주에 우리가 생각한 것과 낯선 풍경이 이어졌다. 국악 관현악곡 연주를 위해 서양인 한 명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지휘를 하는 것이었다.

벨기에에서 온 국악인이자 작곡가, 그의 이름은 보두엥 드 제(Baudouin de Jaer)다. 지난 7일 열린 '보두엥 드 제와 산조' 공연에서 그는 직접 가야금을 위해 만든 첫 산조곡, 대금 독주곡 '마흔 두 가지 풍경', 북청사자놀음의 장단을 다시 구성한 거문고 독주곡 'Lion Dance', 시나위 장단의 혼란스러움을 절제로 풀어낸 '시나위, 음과 형상', 관현악 편성을 위해 창작한 '잠시 눈을 감으면'을 소개했다. 국내에선 아직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은 그의 음악 세계에 빠져볼 기회였다.

서양악과 국악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보두엥 드 제를 만나 그의 음악 열정에 빠져봤다. 보두엥 드 제는 1962년 벨기에 알스트에서 출생, 리에주 왕립음악원을 졸업한 수재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작곡가로 현지 언론과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실험적인 오케스트라 곡 등 여러 작품을 만들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벨기에 브뤼셀 복합 예술문화센터를 만들고 센터장으로 11년간 활동했다. 인터뷰 장소에서 "안녕하세요"라며 첫인사를 받은 그에게서 음악과 국악에 심취하게 된 계기와 매력,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어봤다.

   
▲ 지난 7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기획공연인 '금요공감'에서 보드엥 드 제(가운데)가 '잠시 눈을 감으면' 곡을 지휘하고 있다. ⓒ 국립국악원

음악에 빠지게 된 과정과 국악에 심취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ㄴ 어린 시절, 가족들이 음악을 많이 감상했다. 그래서 항상 집엔 음악이 있었는데, 주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곡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모님들이 곡도 많이 연주하셨다. 또한, 부모님의 친구 두 분이 항상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셨다. 그 때 바이올린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편, 조부모님을 뵈러 갔을 때, 조부모님 집엔 내가 들어갈 수 없었던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은 상당히 신비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방은 온통 흰 천으로 덮여있었다. 그 천 아래를 들어봤는데 검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검은 상자를 열어보니 바이올린이 하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에게 "바이올린을 배워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바이올린에 끌린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낡은 바이올린을 찾았는데, 그 바이올린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17살 때는 실험 정신과 새로운 음악에 끌렸다.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었는데, 그때 키보드를 맡았었다. 밴드를 위해 작곡을 했는데, 곡들이 점점 어려워져서 친구들이 "이 음악에 록이 충분히 있지 않다"고 전했다. 그래서 나는 벨기에 있는 훌륭한 작곡가들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존 케이지의 친구인 유명한 미국 작곡가 프레데릭 제프스키(Frederic Rzewski)에게도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 음악을 실험할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현악 4중주와 오케스트라 앙상블을 작곡했다. 그러다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에 와서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 예술문화센터를 설립했다. 일반인들은 음악을 창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는 "택시 기사는 택시만 운전만 하면 되고, 작곡가는 작곡가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니다. 누구나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예술문화센터를 설립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일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택시를 타고 퇴근을 하는 건 다반사고,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센터를 시작하는데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나는 내 일인 작곡을 했다. 퇴근하고 피곤해서 집에 오면 작곡을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작곡하는 동안, 내 친구가 황병기의 가야금 CD를 줬다. 그렇게 국악을 접했다. CD를 받기 전에 나는 바이올린 곡을 만들고 있었는데, 너무 우울했었다. 음절들을 새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작에서 나오는 한 음 한 음을 쓰고 있어서였다. 그러다 내 친구가 그래서 '어떻게 할까? 내가 느끼고 있는 음악이 뭘까?'라고 고민하면서 바이올린을 늘어놓고, 음을 켜고, 실을 눌렀다. 이건 마치 짧은 가야금처럼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가야금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었다.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를 들었을 때 "어, 이 음악이 뭐지?"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놀라웠다. 그래서 황병기를 만나고 싶어서, 마침 벨기에에 있던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그땐 황병기가 유명한지 몰랐다. 지금의 아내가 황병기와의 만남을 주선해줬다.

황병기와 짧은 만남을 가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황병기에게 나의 바이올린 작품을 들려줬고, 다음날 그는 나에게 그의 앨범 전체를 줬다. 그렇게 나는 가야금 곡을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한국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벨기에로 가야금을 보내줘서 연습하게 됐다. 이후 나는 많은 가야금 곡들을 작곡했다.

그러다 서울대 김승근 교수가 나의 작품을 듣고는 "왜 벨기에 사람이 가야금 곡을 작곡했지?"라 하면서 서울대로 나를 초청했다. 거기서 가야금 연주자인 이지영 교수의 많은 제자에게 나의 작품이 소개됐다. 한 학생마다 내 작품의 한 부분을 배웠다. 나는 너무 행복한 작곡가라고 생각했다. 그 후 학생들과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학생이 거문고를 아느냐고 물어서, 거문고를 켜는 친구를 소개해줬다. 현재 KBS 국악관현악단의 거문고 연주자인 이정아였다. 거문고를 켜는 것을 보고, 한눈에 반해 평생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거문고 곡들도 많이 만들고 있고, 거문고를 위한 프로젝트도 많이 진행하고 있다.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울 때, 외국인으로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ㄴ 가야금은 나에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야금은 음이 상당히 또렷하다. 줄 튕기기와 음을 이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이후로 줄을 눌러가면서 연주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가야금 곡을 작곡할 때, 음절을 작곡한 다음 줄을 누르면 음의 표현이 더 다양해졌다. 그렇게 가야금을 이해하게 됐고, 난도가 높은 가야금 곡들을 작곡했다. 심지어 가야금 연주자들이 연주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곡도 만들었는데,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연주가 점점 가능해졌다. 내가 작곡한 가야금 곡 중에 줄을 많이 눌러야 하는 곡이 있는데, 곡을 연구하고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거문고의 어려운 점은 가야금보다 줄이 적고 나올 수 있는 음역이 적었다. 첫째 줄은 아무리 튕겨도 같은 음인 F음이 났고, 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문고는 중간에 있는 두 줄을 손가락으로만 연주했는데, 그것마저도 줄이 팽팽하지 않아서 내가 튕기는 것이 어려웠다. 두 줄은 꾹꾹 눌러야 연주되고, 두 줄은 팽팽하지 않아서 소리가 잘 안 나는데, 그런 악기는 서양 오케스트라엔 없다. 바이올린은 줄이 상당히 팽팽해서 소리가 선명하게 나는데, 거문고는 팽팽하지 않아서 소리가 둔하게 난다. 그래서 일단은 거문고와 장구 곡을 작곡해서 김영재(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 명인에게 보냈는데, 그가 곡을 보더니 연주할 수 없다고 좋지 않다(It's no good)고 했다.

그는 곡은 F와 B 플랫으로만 작곡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음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첼로는 다른 음을 연주하는 게 괜찮은데, 거문고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음들을 꼭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작업했다. 그 과정을 모두 말하기에 너무 길지만, 일단 실험을 많이 해보고 김영재 명인의 음악을 많이 연구해봤다. 그의 음악을 듣고 종이에 적고 보니 F와 B플랫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왜 그가 나에게 F와 B플랫만 써야 한다고 했는지 생각해보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나에겐 악기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화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과 다른 문화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등의 국악을 10년 동안 해왔는데, 내가 인지한 문화에서 시작할 때는 매우 어려웠다. 서양음악은 음이 상당히 또렷한데, 국악은 꺾는 음이 상당히 많아서 다르다. 이 두 가지의 문화를 어디선가 만나게 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

국악의 매력은 무엇인가?

ㄴ 언급은 했지만, 국악기의 소리는 놀랍다. 마치 나에게 하나의 큰 문이 열리는 듯했다.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작곡을 하다 보면 살짝 지루해질 때가 있다. 첼로나 바이올린은 비브라토(편집자 주 : 현악기의 비브라토는 현 위에 놓인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에 의해 이뤄진다)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가야금은 비브라토가 요점이다. 거문고는 소리가 상당히 깊고, 나는 그 깊은 소리를 좋아한다. 마치 베이스 같다. 그리고 술대(편집자 주 : 거문고나 향비파를 타는 데 이용하는 단단한 대나무로 만든 채)로 만드는 비브라토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 음색이 좋다. 대금에서 나는 종이를 부는 듯한 음색이 좋다. 상당히 표현적이다. 이처럼 국악의 매력은 비브라토와 음색이다.

   
▲ ⓒ 국립국악원

벨기에에서 가야금과 거문고 산조 음반을 발매했다. 음반 발매과정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ㄴ 앞서 설명했듯이 악기를 새로 공부해야 하고 연주자들을 만나봐야 한다. 음악엔 악기만 있는 게 아니라 지휘자와 연주자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처음엔 연주자들이 내가 쓴 곡을 보고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같이 작업을 하니까 가능해졌다. 연주자들이 나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노력도 많이 해주셨다. 그게 내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데, 잘해주셨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악보를 보내면 연주자들이 MP3 파일로 녹음하고, 나에게 보낸다. 그걸 계속 반복해서 하는데, 이 작업을 처음 했을 때는 상당히 어려웠지만, 점점 하다 보니 괜찮아졌다.

음반을 제작할 때는 그것보다 살짝 더 어려웠다. 녹음할 음반사를 찾아야 하는데, 이들은 가야금이나 거문고에 대해서 몰랐다. 한국 사람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바순 등의 서양악기를 아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피아노와 같은 서양음악, 서양문화, 악기만 안다. 음반사 높은 분들에게 음악을 더 알아야 한다고 설득해봤지만, 그분들은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녹음을 할 음반사를 찾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아는 음반사(Noodik Productions)에 전화했다. 이 음반사는 내 음악을 모두 녹음해줄 만한 곳이었고, 우리는 많은 프로젝트를 했다. 이들들과 4장의 앨범을 만들었고, 거문고 연주자인 이정아에게 연락해서 4~5년 안에 새로운 작품들로 거문고 앨범을 만들 거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벨기에에서 거문고와 가야금 작품으로 콘서트를 열었고, 벨기에 사람들이 국악을 매우 좋아했다. 나의 여자 형제도 매일 출근길에 차에서 CD를 듣는다. 내 친구들도 여러 국악 장르를 선호하게 됐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등 다양했다. 작곡가 친구인 그리말드는 대금을 좋아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좋다고 한다.

나의 앨범을 전 세계에 판매하고 싶다. 호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CD를 판매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판매할 방법을 아직 못 찾았다. 음반사가 한국에서 앨범을 판매하고 싶지만, 아직은 한국의 음반가게에 들어가면 앨범을 찾을 수 없다. 물론, 한국 음반가게에서 내 음반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비용문제도 있다. 앨범을 제작하는데 확실한 예산이 필요하고, 그 예산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린다.

   
 

외국인 국악인으로 국악보다 K팝이 조금 더 활성화된 요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ㄴ 먼저 나는 벨기에 한국대사관이 있는 브뤼셀에서 콘서트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대사관에 판소리나 산조 공연을 하는 게 좋다고 몇 번 정도 말했다. 사람들은 산조와 판소리, 대금, 가야금을 좋아할 거라고 몇 번 말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국악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을 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브뤼셀에 와서 쇼 음악과 공연을 하고 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음악과 공연이 지루하다. 나는 어머니,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살풀이와 판소리가 있는 산조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브뤼셀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국악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추천을 해준다. 예를 들어, 식기구를 이용해서 박자를 치는 '난타'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난타'보다 아름다운 국악이 좋다. 쇼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예를 들어 벨기에에 있는 고등학교에 1주일 동안 한국 음악을 공연하는 것인데, 그런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알기로 국립국악원에서 올해 9월에 150명의 규모의 국악 공연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올릴 것으로 알고 있다. (편집자 주 : 9월 18일부터 19일까지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종묘제례악'이 프랑스 국립사이오극장에서 열린다)

그런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하게 되는데, 그걸 줄여서 5명의 규모로 프로젝트를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김영재와 다른 4명의 연주자가 일주일 동안 하루는 브뤼셀에서 다음 날은 벨기에의 다른 도시나 유럽의 다른 도시를 방문해 고등학교에서 연주하고 학생들이 모두 그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다. 사실 내 고등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국악인을 초청해서 공연을 했는데 학생들이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왜 무형문화재를 브뤼셀에 초청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영재가 해금, 가야금, 거문고를 연주한다면 학생들은 결코 그 공연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쇼맨십이 큰 공연들로 하는 교육을 말하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말고도 대학교에서 공연하는 것도 좋다.

   
▲ ⓒ 국립국악원

본인에게 영감을 준 국악인들은 누가 있는가?

ㄴ 황병기, 김영재, 서울대 교수인 이지영과 김승근, 이준아(한국정가단 단장), 이화영(가야금앙상블 '사계' 멤버) 등 수 많은 음악가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언급했듯이 내가 처음 들은 가야금 국악 음반이 황병기의 음반이다. 음악이 매우 아름다워서 아내가 나와 그의 만남을 주선해줬고, 나는 그와 친구가 됐다. 매해 만나서 식사도 하고, 그에게 내가 작곡한 오직 국악 악기로만 된 오케스트라 작품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가 가야금 작품을 어떻게 부를지 모르고 있었을 때 그가 나에게 '산조'라고 부르면 된다고 말해줬다. 그는 상당히 친절한 사람이고 그와 대화를 나눌 때 상당히 즐겁다.

김영재는 조금 다르다. 나는 그의 거문고 소리에 한순간에 반했다. 그래서 그도 만났는데,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내가 한국말을 못해서 언어로 소통이 안 되는데도 어떻게 소통이 되어서 많이 웃었다. 그를 벨기에로 초청하는 게 내 꿈인데 그는 내게 "(한글로) 아파요. 아파요"라며 너무 나이가 들어서 갈 수 없다고 했다. 황병기의 음반은 나의 가야금 교과서고, 김영재의 음반은 나의 거문고 교과서다. 그래서 그 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 공연이 열리기 전, 보두엥 드 제(오른쪽)가 본인이 만든 곡을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 국립국악원

아내가 한국인 무용가인 류경아다. 아내가 주는 영향이 있다면?

ㄴ 아내는 현재 브뤼셀에 있는 정말 끼가 많은 한국무용 무용가이자 안무가다. 브뤼셀에 있는 유일한 한국무용 무용가이기도 하다. 아내는 한국에서 브뤼셀에 올 정도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하다. 또 아내는 진정을 시키는 사람이다. 사실 나는 아내가 브뤼셀에 있는 유일한 한국무용 무용가이고 안무가여서 만나게 됐다. 그래서 아내가 처음으로 브뤼셀에서 춤을 췄을 때, 나는 '살풀이'에 대해서 알게 됐다. '살풀이'도 나에게 충격적(Shock)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나에게 항상 공부를 많이 한다고 말하지만, 아내의 춤엔 움직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오랫동안 적게 움직인다는 것이 나에겐 새로웠다. 그러면서 집중과 신중함에 대해 배우게 된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에 대해 말해달라.

ㄴ 가장 핵심적인 계획은 거문고 협주곡이며, 이미 작업에 돌입했다. 협주곡엔 세 부분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아돌프 울플리(Adolf Wolfli)라는 미술가의 음악을 넣을 생각이다. 울플리는 스위스 미술가인데 방 안에서 30년 동안 갇혀 살았다. 정신과 의사가 그에게 종이와 펜을 줬고, 매일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 하나가 상당히 큰데, 그는 죽기 전까지 25,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 중 5,000점에 악보가 그려져 있는데, 한 협회에서 나에게 이 악보를 읽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고 비밀을 찾아냈다. 그 음악을 협주곡의 마지막 부분에 넣을 생각이다. 그래서 이 협주곡은 아주 큰 프로젝트다. 또한, 거문고 협주곡엔 거문고 솔로곡도 있고 대금곡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서양음악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이번에 새로운 현악4중주 음반 2개를 낼 것이고, 스위스에서 울플리에 대한 콘셉트도 잡고 동시에 내 악보 전시도 열릴 예정이다.

나에게 국악이란 무엇인가? 

ㄴ 10년 동안 느리게 국악을 하면서 나에게 국악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나에겐 오히려 더 미래의(Futurisitic) 것이다. 사람들은 살풀이를 옛날 무용으로 생각하겠지만, 나에겐 최고의 현대예술이다. 그래서 노력하고 싶다. 나는 작곡할 때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한다. 내가 사는 세상은 현대예술의 세상이다. 브뤼셀 현대예술 위원회에 음악을 제출할 때 몇몇 회원들은 국악의 단조로움이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고 하며 웅장한 음악을 기대하지만, 나에게 이 단조로움은 새로운 예술이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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