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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왔다. 참 고왔다. 연극 '햇빛샤워'는 참 곱다.

영화의 미세한 숨결, 드라마의 긴밀한 호흡. 과연 '연극'은 섬세할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와 친숙한 매체들이 가져다주는 서사의 치밀함과 세심함을, 과연 연극이 소화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걱정스런 의심은 단번에 해결됐다. 바로 장우재의 연극 '햇빛샤워'를 봄으로써 말이다.

연극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리얼리티를 유감없이 뽐냈다. 정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비극이었다. 아니, '비극'이라기보다는 '현실'이었다. 고아 출신 광자는 돈도 빽도 없이 젊고 예쁜 몸으로 먹고 살아간다. 또한 고아 출신 동교는 돈도 빽도 없지만 나누는 마음 하나로 살아간다. 너무 달랐던 이들은, 극명한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관객들의 기대를 비웃는다.

입양된 가정에서 동교는 여전히 '남'이었고, 오히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외되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그래도 동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산다. 어눌한 말투, 순박한 외모의 동교는 '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동교의 자살 소식은 당연했다. 이 연극이 '현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면 응당 '착하기만 한' 동교에게는 비극적 결말이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리얼(real)을 어쭙잖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광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가장 현실답게 살아가는 광자가 죽는다. 현실을 '이상'이라는 허구에 가려 왜곡되게 바라보지 않았던 광자는, 현실에 철저히 복종했다. 그러나 작품은, 아니, 현실은 광자를 죽인다. 왜? 그녀는 '광자'이기 때문이다. 돈 없고, 배운 것 없고, 가족도 없고, 출중한 능력도 없고……. 평범하게 불행했던 광자는 끝까지 불행해야 했다. 반전은 없었으며, 기적도 없었다. 그러나 작품이 놀라운 것은, 응당 전제되어야 할 반전과 기적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 관객은 그저 놀랄 수밖에.

   
 

'광자'라는 이름이 참 오묘하다. 그녀는 '光(빛날 광)'과 '狂(미칠 광)' 사이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했다. 110분의 광자를 보며 나는 알았다. 그녀의 '광'은 '光'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말한다. 그녀는 '미쳤다(狂)'고. 또한, 모든 등장인물이 말하는 광자는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도를 알고, 수준을 알고,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잘 알고, 적응했던 광자였지만, 동교의 자살 소식 이후, 그녀는 光과 狂을 드러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 아이 동교의 죽음이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녀가 동교의 부모에게 칼을 휘두른 것일까. 세상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내가 이 일에 '관계있음'을 증명해야 어떤 일에든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교와 아무 관계도 없는 광자가 동교의 자살 소식에 광기를 보인다. 동교의 양부모마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동교의 죽음을, 그저 오다가다 몇 번 말 섞었을 뿐인 광자가 슬퍼하며 울분을 토하다니.

   
 

동교는 이 세상에 아무 '관계없이' 왔다가 관계없이 가기를 원했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는 결코 "누가 더 착하고, 덜 착한지"에 대한 판단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어느 부모, 자식도 처음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이 세상에, 가혹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개개의 실존들이었다. 동교는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아무 상관없이 남들을 도왔다.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관계에는 서로 오고 가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동교는 그저 주기만 했다. 그가 받은 것은 없었다.

동교는 광자에게 외친다. "누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뭐가 나빠요. 누나가 원한 것도 아닌데, 그게 왜 누나 잘못이에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동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이다. 어찌나 눈물이 솟구치던지, 바보 같았던 동교를 극 내내 마음속으로 비웃어왔던 내가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바보같이 주기만 하고, 당하기만 했던 동교였는데, 그가 그동안 이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지 짐작해보니 눈물이 그치지를 않았다.

   
 

            "누나! 생각해보니, 생선가게 옆에 있는 아줌마가 더 고통스러웠을 것 같아요."

죽은 동교는 광자의 고통을 이해한다. 광자는 생선가게 아줌마가 연탄 기부에 낼 돈이 없자, 고등어를 동교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고통스러운 사람은 바로 '생선가게 옆 아줌마'라고 말한다. 기부하고 싶은데 기부할 수조차 없는 사정에, 뭐라도 기부할 수 있는 생선가게 아줌마를 보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냐고 말이다. 광자와 동교는 '관계없는' 것들에 주목한다. 이 세상에 아무런 관계없이 던져진 고아들이, 세상에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갔기 때문일까. 동교와 광자의 '무관(無關)'은 그 어떤 '상관(相關)'보다 더 긴밀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광자의 칼부림이 이해가 간다.

관객들은 숨죽이며 기나긴 110분을 단숨에 보냈다. 배우들, 특히 광자라는 배우의 목소리에서는 극적이고 과장된 발성으로 꾸며지지 않았다. 또한 연극적 오브제 하나하나가 매우 세밀하고 섬세했다. 작가이자 연출인 장우재가 관객에게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대사라는 직접적인 수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재 하나하나가 메시지였고, 장우재가 던지는 메시지의 실존이었다. 연극 중간에 언급됐던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 그냥 지나칠 단어가 아니었다. 극 자체가 '시뮬라시옹'적이었다. 더 이상 원본은 없고 어느 의미에서는 원본과 모사물의 구별도 없는 이 세계. 마치 연극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그 무엇이 원본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극렬히 얘기하고 있었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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