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석재현 기자] [문화 人] '박열' 이제훈 "촉박했던 '박열' 준비, 인생 연기 나왔다" ① 에서 이어집니다.

같이 출연한 최희서는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보고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열은 별도 평전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연구했는지 궁금하다.
└ 박열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나 또한 가네코 후미코 평전을 읽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살았고, 묘지에 묻히게 되었는지 등 역사적 사실로만 배운 정도였다. 박열이 기개와 용맹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기하는 데 있어 무겁고 진중함보다도, 사람들이 어렵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웃고 싶어하는 면이 있었고, 그걸 박열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감독님 또한 해학적이고 익살적인 표현을 하는 데 동의하셨다.

박열의 아내였던 후미코에게 끌렸던 점이, 죽으러 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게 상당히 멋있었다.
└ 맞다. 그 외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을 변호했던 '후세 다츠지'도 있다. 그 분은 일본인임에도 조선인을 변호했던 변호사였고, 인권을 먼저 생각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의 뜻이 인상 깊었다. 이 분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비록 박열과 후미코가 그를 당황케 하는 요구를 하기도 했지만, 다츠지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두 사람이 재판하는 과정에 있어 힘을 얻지 않았나 싶다.

▲ 영화 '박열' 스틸컷

극 중 등장했던 법정 예복이 상당히 웃겼다. 이도 고증한 것인가?
└ 맞다. 색깔까지 그대로 고증했다. 그것 역시 당시 화제가 되었다. 박열은 자기 자신이 튀게 하여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아야 했고, 그래서 그를 찾아온 기자 '이석'이 "이 재판과정에서 조선에 화제가 될 수 있겠냐"고 부탁해서, 박열이 보여주었다. 그 나잇대에 보여준 기개와 용맹함, 그리고 당돌한 거래는 웬만해선 시도조차 못할 일이다.

일본은 박열을 재판정에 세워 제국주의 문명국가로서 뭔가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서 사법체계에 따라 변호사도 붙이고 재판과정도 기록하는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민의식을 보여주려고 했었다. 박열은 오히려 일본의 이러한 면을 역이용했다.

 

당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그 재판정 씬일 것 같다.
└ 그렇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내 마음이 굉장히 뜨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대본으로만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송함을 느꼈다.

재판 씬 촬영은 얼마나 걸렸는지?
└ 처음 생각했을 때에는 오래 걸리겠다 싶었는데, 긴 일본어 대사 때문에 한 번에 못갈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도 많이 나오지만, 6주 만에 많은 씬들을 소화해야 했다. 그 중에서 최종공판이 매우 중요했기에 세 차례 공판을 하루마다 나눠서 찍기로 정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 차례 이어진 공판, 그리고 최종공판까지 3일 만에 찍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오히려 막바지에는 호흡이 잘 맞았고, 촬영 중에 일본어를 빠르게 습득해가면서 임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6주 만에 촬영을 끝낸다는 건 엄청 힘들었을 텐데?
└ 나보다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촬영감독님과 조명감독님은 그 전에도 이준익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지만, 이번 '박열'이 데뷔작이어서 한 컷 한 컷에 상당히 공들이셨다. 배우 입장에선 고마웠다. 이준익 감독님 또한 스태프들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잘 따라와 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셨다. 그런데 감독님이 "다 좋은데 하나 실수한 게 있다. 촬영 기간에 놀 시간이 없었다. 너무 빡빡하게 찍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완성본을 보고 나서 함께 고생했던 스태프들이 한 명 한 명 생각났다. 이 작품에 참여하면서 개인적으로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떠오르면서 이 분들 덕분에 내가 연기할 수 있었다는 걸 감사함을 느꼈다. 같이 만드는 사람의 위대함을 '박열'을 통해 여실히 느꼈던 것 같다.

▲ 영화 '박열' 스틸컷

당신은 이전에 이준익 감독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어떤 점 때문인가?
└ '왕의 남자'나 '사도', '동주'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고, 감독님의 작품세계에 나도 쓰이길 줄곧 바라왔다. 이번에 참여하기 전에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전에 같이 작업했었던 분들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하나같이 작업한 감독 중에서 촬영현장이 제일 즐겁고 재밌으며, 치열한 순간에도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해서 흥미로웠다. 이번에 같이 경험해본 결과, 그 말에 200% 동의했다. 왜 이준익 감독님과 함께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계속 같이하려고 하는지 이제서야 알았다.

이준익 감독 데뷔작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가? (웃음)
└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웃음) 감독님은 데뷔작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야, 그런 건 잊어버려도 돼"라고 말씀하셨다. (웃음)

이준익 감독은 배우가 연기에서 막힐 때, 어떻게 도움을 줬는지?
└ "그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은 너고, 그저 너 자신을 보여주면 되니까 흔들릴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봐줄게"라고 말씀하시면서 배우에게 자신감 심어주시면서 더 많은 걸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 있게 장을 열어주신다. 연기의 재미를 계속 북돋아주시고 그 부분에서 탁월하신 분 같다.

그런 점에서 이전에 같이 했던 '시그널' 김원석 감독은?
└ 그 분도 역시 배우가 연기하는 데 해석이나 표현에 대해 많이 도와주신다. 다른 감독님은 이미 그림을 그려놓고 배우가 이렇게 연기하고 행동하고 보여야 하는 해답지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김원석 감독님은 "이런 방향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방향을 선택할 것 같은데요" 식으로 배우와 끊임없이 소통하시면서 방향을 같이 찾아나간다. 그런 면에서 이준익 감독님과 김원석 감독님은 열린 생각을 가지셨다.

'시그널'을 보면 김원석 감독은 감정선 연기를 잡아내는 데 탁월하신 것 같다.
└ 맞다. 귀신같이 포착하시는데, 그걸 끌어내기 위한 과정에서 계속 배우와 이야기하고, 배우의 의견을 존중해주신다.

 

'박열' 공부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패기나 용기 등에선 실제 본인의 모습과는 다른가?
└ 아니다. 박열과 같은 기질을 나 또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다. 그랬기에 데뷔 후 초창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파수꾼'이나 '고지전'에서 표현에 대한 에너지 등을 표출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부분 때문에 감독님이 나를 봐주시고 캐스팅하셨을 것이다.

박열과 당신의 20대가 비교되지 않았나?
└ 비교된다. 박열이라는 인물은 대의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걸어갔다면, 나는 연기를 하겠다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걸어갔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접하면서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자연스럽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동경, 그리고 배우가 되고자 했던 꿈을 가졌다. 그래서 20대 초반에는 학원에서 연기를 배웠고, 무대에 올랐거나, 오디션이나 뮤지컬 등을 경험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함과 동시에 현실과 많이 부딪쳤다. 첫 번째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이걸로 삶을 영위해갈 수 있을까?'며 효도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과 주변 내 또래 남자들은 군대 다녀온 후 취업하는데 나는 배우라는 꿈을 좇는데 청춘이라는 기회비용을 엉뚱한 데 쓰지 않는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꿈을 포기했을 때 사회의 일원으로 뒤처지지 않았을까 혹은 낙오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그래서 되돌아갈 곳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1, 2년 하고 그만두겠다는 건 당치도 않았다. 연차가 쌓일수록 큰 결단이 필요했고, 결국 모든 걸 버리고 연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연기의 배움이 부족해서 2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어떤 배우로 살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칼을 뽑았으니 뭐라도 썰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늦게 선택한 만큼, 배우를 향한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는지?
└ 아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못 따라갔을 것이다. 예술가의 삶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때 혼란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단단해진 시기였다. 데뷔도 또래에 비해 늦은 감도 있지만, 이런 과정이 있기에 현재까지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이전에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한예종으로 진학했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 진작에 시킬 걸 그랬다고 말씀하시더라. (웃음)

듣자하니, 한예종에 다니는 동안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규율이 있는데, 그 규율을 바꾸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게 사실인가?
└ 이 부분에 대해 후배들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 (웃음) 학교도 각자 규율이 있고, 공부해야 하는 시간에 있어 외부활동이 제한되는 게 맞다. 그런데도 나는 영상원에서 다른 감독들과 단편영화를 몰래 찍고, 면학 분위기 흐릴까 봐 조용히 다녔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두각 될 줄은 몰랐다.

평소 이제훈은 어떤 사람인가? 인터뷰를 하다보면 매사에 진지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웃음)
└ 재미없는 편인 것 같다. 예전에는 진지를 넘어 심각했었다. (웃음) 특히, 영화나 궁금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꾸 무거워졌다. 지금은 웃으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데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신 분들은 '애늙은이'나 '할배' 같다고 하더라. (웃음)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는건가? (웃음)
└ 그런 것 같다. (웃음) 약간 걱정이 드는 게 나의 20대를 되돌아보면 연기가 전부 차지하고 있어, 누군가를 만날 때 영화 말고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넓어졌으면 좋겠다. 또한, 내가 재밌어졌으면 좋겠다, 연애할 때도 재밌었으면 한다. (웃음)

 

최근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차기작 '아이 캔 스피크'는 어떤 영화인가?
└ 휴먼 영화이며, 재밌다. 아직 개봉 전이라 영화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겠지만, 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있어 '박열'이 영향을 끼쳤다. 추석에 개봉한다.

이제훈은 앞으로 어떤 배우로 불리고 싶은지?
└ 한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고 그게 계속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작품들이 시간이 지나서도 꺼내볼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데 해답이 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다. 아직까지 나는 꺼내서 보여줄 게 많고, 지금보다 더 잘 해나가고 싶다. 큰 신뢰를 받고 현재까지 활동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한편, 이제훈이 출연하는 영화 '박열'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되는 와중,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내각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로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이제훈)'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함으로써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28일 개봉이다.

syrano@mhns.co.kr 사진제공=ⓒ 메가박스(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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