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떠한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가?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송수진 artietor@mhns.co.kr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연극인, 연출 송수진입니다. 극단 묘화 대표.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송수진] 초등학교 4학년 쯤이었을까? 그때 봤던 어떤 사람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유인즉슨 친구 집에서 놀다가 라면을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순간 매우 긴장했다. 왜냐하면 친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친구의 아버지는 타인에게는 더 없이 친절한 분이시지만 집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으로 가족을 대하는 분이었다. 

흔히 끝장 드라마에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어른의 표본이랄까? 외도와 폭력, 폭언…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들었을 때 그 나이에 보듬어 주기엔 너무 거대한 슬픔과 아픔이기에 도무지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여튼 그 무시무시한 어른과의 라면 먹는 자리라니…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이것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TV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불륜을 다루고 있었던 드라마로 기억된다. 조강지처와 자식에게 못 할 짓을 하며 새로 생긴 여자에게 가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럽게 젓가락을 상 위에 탁! 하니 놓으시더니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저런 나쁜 새끼들은 다 잡아다가 교도소에 처넣어야 한다며 저런 것들은 절대정신 못 차린다며… 사람이 저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시는데 친구의 어머니는 초점을 놓은 공허한 눈빛으로 그냥 라면을 들고 계셨고 너무나도 같은 표정으로 친구도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뒤로 얼마 전에 아버님이 잘라놓았다는 전기선이 절연테이프에 돌돌 말려 벽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고 부엌 싱크대 찬장은 한쪽이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하고 웃어버렸지만 내 표정은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거기 있던 친구의 가족들이 다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으니 말이다. 

'이게 뭘까? 난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라면은 우리 집에도 있다… 그만 웃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타인이 바라보는 또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경험했다.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삶에 대한 시선은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책장의 책 같은 것이었지만 타인이 바라보는 또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 어린 나이에 굉장한 충격이었다. 

"생각건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왜,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이따금 이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예술은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연민 뒤에는 반드시 인간을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

이탈리아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 자신의 예술에 대한 평가이다. 서두가 이렇게 장황했던 것은 피란델로의 작품 중 하나인 '뜻대로 생각하세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도 장황한 경험담을 적어보았다. 

마을로 이사 온 새로운 가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서로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언어로서 표현되어 어찌 보면 아무 말 대잔치에 초대받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두고 서로 음모론을 펼치며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피란델로가 자신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요즘 SNS에 떠도는 이야기를 가지고 과도한 감정표현을 해대는 사람들의 모습도 겹쳐지기 시작했다.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어째서 그들은 타인의 삶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일까? 나 역시도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그 정보들은 하루를 멀다고 늙어가고 있다. 오늘의 정보는 내일의 지루함이 되어버리고, 그 정보들 속 타인의 삶들은 오늘의 내가 또 다른 타인과 나누는 씹기 좋은 오징어가 되어 잘근잘근 씹힌다. 

그 사이 우리의 턱은 점점 강인해져 가고 두 개의 콧구멍은 그 턱의 욕망에 순응해 또 다른 오징어를 찾아 계속해서 타인의 삶을 찾아낸다. 그 주제는 결코 행복하거나 즐거운 주제들은 아니다 이것들은 싱겁고 부드러워 씹는 맛이 안 나기 때문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장 좋은 안줏거리는 누군가의 불행이고 슬픔이며 번지기 쉬운 우울함이다.  누구도 그 행태에 대해 쉽게 지적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그 두 개의 콧구멍이 지적하는 손가락 끝을 향해 킁킁거릴 테니 말이다. 

'뜻대로 생각하시라'는 희곡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피란델로 작품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또 다른 입장에서의 '지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이지 않을까?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평가하며 판단하고 또 다른 타인과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삶에 대해 아무런 목적 없이, 무작정, 과도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학습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피란델로의 경계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 자신이 타인의 삶을 대할 때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피란델로의 글은 어쩌면 앞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한 번쯤은 꼭 무대에서 만나보고, 책으로 접해보는 것을 권해본다.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라는 피란델로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내 삶이 보이지 않고 타인의 시선들로 이뤄져 있는 듯하여 모든 것이 허무해지며 감정적으로 되었을 때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감성적 시선들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꿔줄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한 목적 없는 눈먼 관심보다 현실의 나에게 삶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