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서 故 윤소정 영결식이 엄수됐다. 참석한 연극인과 유족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문화뉴스 MHN 양미르 기자]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건 좀 심한 것 같다. 나는 연극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곧 같이 웃고 슬플 수 있는 몇 장면을 건진다면 공연을 보기 위해 하루를 투자한다는 것에 대한 보답이 충분히 될 거로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가려고 한다면, 그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지난해 6월 27일, 故 윤소정 배우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연극 '어머니'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했을 당시 나온 육성이 영결식 중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울려 퍼졌다.

 

▲ [문화뉴스TV] 연극 '어머니' 윤소정…"이호재와의 호흡, 물어볼 필요 없어요" (1분 15초부터 영결식에 나온 윤소정 배우 육성 음성)

20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배우 윤소정의 영결식이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엄수됐다. 고인은 지난 16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55년의 연기 인생을 보낸 배우 윤소정은 '초분', '신의 아그네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이미', '어머니'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 연극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오랜 연기 내공과 함께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1979년 연극 '부도덕행위로 체포된 어느 여인의 증언'에 '프리다' 역으로 출연하여 대담한 연기를 펼쳐 제16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이어 1982년에는 테네시 윌리엄스 작품 '올페'에서 주인공 '레이디 토란스' 역을 맡아 열연하며, 제19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2003년 '졸업'에 출연해 2003년 서울공연예술제 연기상을 받았다. 이어 2006년 출연한 연극 '강철'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이후, 2007년 4월 제17회 이해랑 연극상을 받았다. 2010년에는 미디어를 혐오하는 완벽주의 여배우와 미디어의 힘을 맹신하는 젊은 영화감독 사위의 갈등을 그린 작품 '에이미', 같은 해 10월, 베토벤의 왈츠 변주곡인 '디아벨리 변주곡' 연구에 몰두하며 루게릭병과 싸우는 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33개의 변주곡'으로 제15회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상과 제3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사회를 맡은 배우 이대연은 "윤소정 선배님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 연극사에 큰 업적을 남기셨다"라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선배님이 우리를 품에 이렇게 황량하게 떠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선배님의 연극 정신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이대연 배우는 눈물로 말을 온전히 잇지 못했다. 이어 '어머니' 연극에 같이 아들 역할로 출연한 배우 박윤희가 약력을 낭독했다.

▲ 이대연 배우가 사회를 맡았다.

추도사 낭독은 2010년 윤소정 배우와 함께 '33개의 변주곡'에 출연한 배우 길해연이 진행했다. 길해연 배우는 "윤소정 선생님을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멋지다', '아름답다', '당당하다', '정의롭다', '마음이 넓다'라는 좋은 말이 쏟아져 나온다"라면서, "그 중 '쿨하신 분이잖아요'가 있다. 우리말로 대체할 수 없어서 선생님을 '쿨하다'라고 기억하려 한다"라고 입을 열었다.

길해연은 "만남의 자리에서 헤어지는 순간이 되면,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신다"라면서, "항상 '작별 인사 길게 말하는 거 싫어'라면서, 뒤돌아서 손을 두어 번 까딱 까닥하시고 저희 곁에서 사라지시곤 합니다. 이 세상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갑자기 '쿨하게' 떠나셨다. 손숙 선생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윤소정답다'라고 하셨다. 소식을 듣고 황망하고, 슬프다 못해, 원망스럽기도 했다"라고 이어갔다.

"선생님이 '무대에서 내가 뛰는데, 무대가, 객석이, 극장 전체가 흔들려.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뛰는 그 순간을 느껴본 적이 있니?'라고 말씀하실 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라면서, 길해연은 "선생님이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그렇게도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앞으로 꽤 오랜 시간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다. 선생님 추억은 밤이 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순간 선생님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드리려 한다. 선생님은 정말 멋진 생을 사셨다. 귀한 이별 시간을 내어주신 유가족 분들께 이 자리로 감사 인사드린다"라고 추도사를 마무리했다.

▲ 길해연 배우가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1997년 연극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에 함께 출연한 바 있으며, 윤소정 배우와는 절친한 사이인 배우 손숙은 "친구를 보내면서 조사를 읽기엔 아름다운 날이다. 조사라기 보다 이별사라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라면서, "소정아, 친구야.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편안하게 관 속에 누워 있는 너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지금 이 친구가 맡은 배역이 '줄리엣'인지, '오필리어'인지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조사를 읽기 시작했다.

손숙은 "우아한 은백색 관 뚜껑이 닫히고, 네 관이 유리벽 저쪽으로 가는 것을 넋 놓고 보면서, 이제 곧 막이 내리고 네가 무대인사를 하러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주저 없이 '기립박수를 쳐야지'라면서 유리벽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하지만 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이게 현실이었구나' 하면서 주저앉았다. 너는 떠나는 순간까지 너답게, 윤소정답게 가고 있구나 생각했고, 나는 솔직히 네가 샘나고 부럽다. 70년 넘게 살면서 끝까지 섹시하고, 시크하고, 당당하게 살아갔다"라고 말했다.

이어 손숙은 "무대에서는 늘 빛나는 배우였고, 오현경 선생님한테는 다시없는 좋은 아내였고, 아이들에겐 좋은 엄아였고, 친구한테는 든든한 동지였고, 후배한테는 따뜻한 선배였다. 특히 나한테는 특별한 친구였다. 언제나 힘들때 내 편이 되어주었고, 싱거운 소리를 할 때도 웃어주면서 날 행복하게 해줬다. 표현에 서툴러서 '고맙다.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라는 표현도 못해보고 보내는 못난 친구가 되었구나. 소정아, 너를 떠나고 마음이 당황스럽고 막막하다. 이제 나는 삶이 팍팍하고 힘들면 누구한테 하소연하고 울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했다.

▲ 손숙 배우가 헌화를 하고 있다.

손숙은 "'그렇게 일만 하면 죽는다'라는 애정 어린 소리를 누구한테 들 수 있을까? 당황스럽고 막막한데, 자동차를 타고 가다 울고, 잠자다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보고 있니? 너를 영원히 보내주기 위해 이 자리에 동료 선후배들이 하던 연습도 접고, 일정도 미뤄가면서 너를 보내려고 이렇게 모였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발도 동동 구르며 아파하는 후배들을 보며 '나 죽을 때도 이럴 거니'라는 심술도 부려본다"라고 전했다.

끝으로 손숙은 "너 참 잘 살고 가는 거야. 나도 이제 곧 너한테 가고 싶다"라면서, "그 쪽 동내에서 다시 만나면, '정말 고마웠다', '내가 많이 좋아했다'고 말하겠다. 그땐 영원히 헤어지지 말고, 좋아하는 운동도 함께 하자. 추신, 오 선생님이 나한테 울면서 그랬다. '나 소정이 많이 사랑했다'라고. 딸 오지혜도 '엄마 딸이어서 행복했고,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하겠다"라고 했다"라며 조사를 마무리했다.

헌화 이후, 유족 대표로 딸인 오지혜 배우가 감사 인사를 남겼다. 오지혜 배우는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자리에 모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가족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 분인지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참 괜찮고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앞으로 어머니가 받으신 큰 사랑을 나머지 가족들이 갚으며 살아가겠다. 배우의 마지막 길이 이보다 더 근사할 수 없을 것 같다. 근사하게 꾸며주신 연극인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명계남 배우(오른쪽)가 오현경 배우(왼쪽)를 위로하고 있다.

영결식이 끝난 후, 장례위원장인 정대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 고인의 영정을 든 가운데 유족과 연극인들이 대학로를 한 바퀴 돌았다. 특히 영정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백스테이지로 향했고, 고인은 이렇게 마지막 대학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한편, 이날 영결식에는 앞서 언급한 인사들을 비롯해 배우 전무송, 윤석화, 정동환, 박웅, 최종원, 최일화, 명계남, 양희경, 신은정, 이승준, 오광록, 오달수, 추수현, 신소율,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에이콤 윤호진 대표, 박계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 한태숙 연출,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 등이 참석했다.

국립극단 김윤철 예술감독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예술가 아버님 밑에서 태어나셔서 유전자적으로도 타고난 재능을 갖고 계셨지만, 연극을 하시면서 뵌 모습은 너무나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준비하셔서 아름다우셨다"라면서, "인간적으로도 훌륭하시고 따뜻한 인간미를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저희 국립극단 '어머니' 공연이 연극으로 마지막 무대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라고 이야기했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도 "무대에서 사실 한 번도 같이 함께 해보지 못했다"라면서, "내가 언젠가 선생님과 무대에 한 번 섰으면 했는데 가셨다. 너무나 한 세상을 멋지게 살다 가신 분이다"라고 전했다.

▲ 배우 오달수가 헌화를 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윤소정 배우와 함께 출연한 오달수 배우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라면서, "너무나 후배들한테 모범이 되시는 분이셨다. 안타깝다.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그곳에서 잘 지내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mir@mhns.co.kr 사진ⓒ문화뉴스 MHN 이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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